디자이너 박승건의 24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서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푸시버튼의 박승건이 런던에서 치른 첫 신고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 다이어리,푸시버튼,박승건

12:00 A.M지난 5월,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 영국패션협회가 MOU를 체결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2019 S/S 런던 패션위크에서 푸시버튼이 첫 주자로 쇼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어느 정도 베테랑이지만 런던에서는 완벽하게 신인이었다. 서울이었다면 일찌감치 마무리되었을 모델 캐스팅과 피팅은 불과 두 시간 전에 마무리되었다. 쇼 당일 새벽,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1:00 A.M.막바지 정리를 위해 호텔로 돌아왔다. 옛 시청 건물을 개조한 타운 홀 호텔은 런던에 올 때마다 머무는 곳으로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5:00 A.M.밤을 샐 예정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여섯 시에 쇼장을 오픈하는 터라 허겁지겁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늘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나는 편인데 쇼 걱정에 몸이 지칠 대로 지친 듯하다. 피날레를 위해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많이 고민했지만 어김없이 박시한 블랙 셔츠와 팬츠를 집어 들었다. 어렸을 땐 과하다 싶을 정도로 트렌디한 옷을 추구했는데 요즘은 편안하면서도 포멀한 아이템에 손이 간다. 요즘 내 유니폼은 화이트 셔츠다. 비록 오늘은 블랙을 선택했지만.7:00 A.M.서울이었다면 지금쯤 일어날 시간이다. 나는 언제 잠들든 상관없이 일곱 시에 눈을 뜨곤 한다. 백스테이지로 하나둘 모인 모델들은 헤어와 메이크업 준비로 분주했다. 헤어는 영화 (1983)의 제니퍼 빌즈에서 영감을 받아 1970~80년대의 펑키한 스타일로 정했다. 메이크업은 반전의 매력을 더해줄 미래적인 실버 컬러!9:00 A.M.쇼장인 BFC 쇼 스페이스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쇼 타임은 9시지만 조금 지체되고 있다. 아침 쇼엔 흔한 일이다. 서울과 상하이에서 열 번 넘게 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런던행은 불안감과 스트레스에 휩싸이게 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면초가로 몰아넣었다. 뜻밖에도 그 고민의 흔적이었던 네모 낙서에서 이번 시즌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는데, 네모난 파워 숄더가 그 결과물. 또 1998년 런던에서 본 전시 을 떠올리며 쉽게 접근하지 않을 법한 쇼킹한 무언가가 필요하단 생각을 했고 비대칭 바지와 독특한 스커트 바지, 번개 모양 액세서리를 만들었다. 비조(tab)를 활용한 커스터마이징, 트롱프뢰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1980년대의 향수도 가미했다.9:30 A.M.단 8분.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던 쇼가 끝났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감정이 북받친다. 서울에서 함께 온 4명의 스태프는 울었고, 다른 스태프와 모델들은 달려와 축하를 해줬다.12.00 P.M.바쁜 일정 탓에 점심은 거의 맛집인 오토렝기(Ottolenghi)에서 해결했다. 예루살렘 출신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중동부터 지중해, 아시아까지 넘나드는 맛있는 퓨전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주로 샐러드를 주문한다.3.00 P.M.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 보니 이틀 전 잠깐 들렀던 콜롬비아 로드 플라워 마켓의 환상적인 꽃향기가 스친다. 일요일 오전에 잠깐 열리는데 그곳을 가득 채운 꽃 내음은 마치 사프란을 부어놓은 듯 달콤했다. 그곳에서 모델 김다영, 차수민 그리고 믹스테이지와 함께 티저 영상을 촬영하기도.6.00 P.M.컨설턴트와 PR 에이전시, 프레스들과 디너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 넵튠에 갔다. 훌륭한 해산물 요리와 감각적인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쇼가 끝난 뒤 평가의 순간은 언제나 스트레스다. 런던처럼 커다란 시장일 경우는 더더욱. 와 리뷰, 와 매거진에 주목할 만한 쇼로 소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니 마음이 놓인다. 물론 아쉬움도 여전하다.10:00 P.M.많은 것들이 우후죽순 등장한 지금은 발명이 아닌 발견을 통해 동시대적인 것들을 찾아내는 능력을 키워야 할 때다. 물론 운도 동반되어야 하지만. 해외에 나와보면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걸 새삼 느끼게 되는데 K팝부터 뷰티, 모델로 이어진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는 디자이너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다. 푸시버튼은 네타포르테나 유럽, 미국 등 30여 개의 해외 스토어에 진출했으니까.12:00 A.M.곧 상하이와 서울 패션위크에서도 컬렉션을 선보인다. 런던에서는 선보이지 못했던 남성복도 함께 세울 예정. 강아지와 함께하는 한남동 산책과 넷플릭스 시청, 친구들과의 만남까지 서울에서의 일상이 그립다. 평소 수면제 없이는 쉽게 잠들지 못하지만 오늘만큼은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