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lin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를 여름의 기운이 불쑥 스며들 무렵 베를린에 도착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베를린에서의 여름은 나와 이 한때의 계절을 더욱 탐스럽게 묶어준다. 여행과 일상의 구분이 모호한 한 챕터의 시간이 새로이 삽입되는 나날들. 세상 어딘가에 내가 사는 도시 다음으로 익숙하고 친밀한 곳이 있다는 건 꽤나 매혹적인 일이다. 마음 속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사적인 유대감을 이루는 어느 먼 곳. 이따금 삶에 불안이 겹칠 때 도망치듯 당도할 수 있는 최후의 장소로서, 베를린의 존재는 늘 내 마음 한 구석을 든든하게 해왔다. 어느 길목을 걸어야 가지런하고 유익한 가게들을 만날 수 있는지, 신선한 도시 풍경을 마주칠 수 있는 트램의 노선과 언제 들러도 그렇게 변함없는 카페, 두터운 추억을 간직한 숲속의 호텔을 몸과 걸음의 기억으로 속속 찾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동시에 어느 아티스트가 말한 것처럼 ‘익숙하다가도 불현듯 낯선 느낌이 침투하는 도시’로서의 베를린 역시 자꾸만 나를 들뜨게 한다. 1930년대 브루탈리즘 건축과 사회주의 시절의 호화롭고 거대한 아파트와 극장, 새로운 꿈을 꾸게 하는 어슴푸레한 램프들의 거리를 걷다 보면 당시의 맥락에서 비껴난 모호함이 미학적으로 마음 어느 곳을 자극하는 것이다. 여러 해, 여러 번의 여름을 거치며 베를린은 그렇게 새삼스러울 것 없는 여정의 포인트가 되었다.
여름은 길 위에서 답을 찾아 헤매기에 제격인 때이다. 게다가 베를린은 도시가 부딪힌 상황을 스스로 깨뜨리며 예술을 일궈온 곳이 아니던가. 걷기와 예술은 정서적으로 같은 맥락 안에 놓인 듯하다. 서로 다른 채도의 회색과 분홍색 카무플라주로 가는 곳마다 내 시선을 끌었던 열 번째 베를린 비엔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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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hmbruck Museum in Duisburg
독일 북서부의 공업 도시 뒤스부르크. 예정에 없던 곳으로 우릴 이끄는 것도 죽은 예술가의 몫인가 보다. 중앙역에서 회색빛 길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공원과 그 속에 새하얗고 개방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렘브루크 뮤지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짧고 강렬하게 살았던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Wilhelm Lehmbruck)의 작품을 중심으로 20세기 모더니즘 조각의 정수를 모은 미술관이다. 청년 시절 고전주의에서 출발해 1910년부터 파리에 머물며 조각가 마이욜에게 매료된 렘브루크는 인체의 풍만한 완결성, 공간과 매스의 독특한 긴장을 표현한 독일 근대조각의 예견된 예술가였다. 그러나 1914년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그의 생을 기울여놓았다. 야전병원 위생병으로 근무하며 목격한 피투성이가 된 지옥상은 예민한 조각가에게 절대 상실의 지경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조각은 인체의 육감이 사라진 가느다란 나체, 비관적으로 체념한 표정과 몸짓을 나타내며 변모해갔다.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엎드린 남자의 그 몸짓만이 의미를 드러내는 작품 ‘쓰러진 사람’처럼, 비극의 시대에서 얻어낸 절망의 이입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결국 렘브루크는 서른여덟의 나이에 베를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이것이 그의 완전한 두 번째 비극이었다. 요셉 보이스는 그의 조각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렘브루크의 비범한 작품은 조각의 개념이 전환되는 상황을 다룬다. 인간의 신체에서 공간성을 체험시키는 전통을 절망으로 이르게 한다.”
미술관은 빌헬름의 아들인 건축가 만프레드 렘브루크의 설계로 1964년 문을 열었다. 이미 독일의 대표적인 뮤지엄 전문 건축가로 이름을 알린 만프레드였다. 비극적 유년기를 경험하고 견실한 건축가가 된 아들은 아버지의 젊은 조각을 어떤 공간적 내러티브 속에 숨 쉬게 했을까. 입구 왼편의 렘브루크 윙으로 어둠에 끌리듯 들어간다. 짙은 회색톤의 콘크리트 안에 놓인 몇 개의 조각들, 중정으로 퍼지는 빛이 그리는 조각의 그림자들과 고요. 위층에서 내려다본 뷰를 길잡이 삼아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전시장 중앙으로 서서히 걸어내려갔다. 여인의 토르소, 서 있는 여자 그리고 쓰러진 남자와 몇 개의 음울한 두상들. 무엇보다 중심을 잡아주는 건 중정의 유리 프레임 밖에 홀로 서 있는 남자의 전신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왼발을 내디딘 동적인 포즈에서 그의 작품들 가운데 드물게 상승 의지가 느껴졌다. 몇 년 전, 뒤셀도르프에서 보았던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사진 속 구도와 같은 자리를 서성이며 겹쳐지는 조각들의 흐름을 탐한다. 햇살이 추상의 실루엣을 던져내는 내내 예술가의 절규에 가담해보려 했지만 어떤 진실에도 닿을 수 없다. 티켓과 함께 구입한 작은 책자 안에서 간신히 빌헬름 렘브루크의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굳게 다문 입술, 힘준 미간, 깊은 눈매가 그리는 전체적인 인상에 과민한 것들이 지나가는 듯했다. 토마스 만은 그의 소설 속에 이런 절묘한 문장을 남겼다. “예술은 자기에 봉사하는 사람의 얼굴에 환상적이며 정신적인 모험의 흔적을 아로새겨 놓는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며, 우연한 여정이 발견한 빌헬름 렘브루크라는 존재가 그 순간 내 마음에 기쁨인지 슬픔 쪽인지 조금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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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ulpturepark Waldfrieden in Wuppertal
긴 여행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더 이상 새로운 감격 따위는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연히 책 속에서 본 ‘숲속의 조각들’이라는 말이 펼쳐내는 이미지는 내내 환상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부퍼탈이라는 도시는 그렇게 찾아간 곳이었다. 수목이 무성한 삼림지대에 위치한 발트프리덴(Waldfrieden)은 2008년 영국 조각가 토니 크랙(Tony Cragg) 재단이 조성한 조각공원이다. 크랙의 볼륨감 있는 작품들을 영구히 보전할 장소로 이 비밀스러운 곳을 택한 것이다.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면 박스형 입구를 만나는데, 이 우주적인 플랫폼을 지나야만 조각공원에 들어설 수 있다. 12헥타르의 거대한 부지 안에는 마치 숲속의 점들처럼 언덕의 지형을 따라 토니 크랙과 리처드 디컨, 헨리 무어와 빌헬름 문트의 조각 40여 점이 설치되어 있다. 한눈에는 절대 들어오지 않는, 알알이 숨겨진 조형의 물성들을 찾아 밤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사이를 찾아 헤매야만 한다. 평생 자연과 공간을 의식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자연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빛나는 법. 특히 회전하는 횡단면이 변형과 소멸을 반복하며 수직으로 상승하는 토니 크랙의 조각들은 밑바닥부터 동요하는 시지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어릴 적부터 화석 돌멩이를 집착적으로 모으고, 퇴적층이 만들어지는 자연현상을 모방해 작품을 구사하는 그에게 이 유구한 사암 지대야말로 예술가의 에고를 이식할 가장 성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하강하는 초원 끝으로 소라 모양처럼 생긴 2층짜리 건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땅의 이전 소유주였던 쿠르트 헤르베르츠(Kurt Herberts)가 건축가 프란츠 크라우스에게 의뢰해 1947년 지어진 저택으로 발트프리덴이라는 공원의 이름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빛의 충돌, 인체의 움직임, 대지의 지형이라는 건축의 유기적인 요소들은 독특한 이 건물에 리드미컬한 생동감을 새겨놓았다. 언덕의 중간쯤에서 이젤을 펴놓고 세계를 재현하던 두 여인의 뒷모습과 함께 퍼져나가던 푸르른 랜드스케이프는 힘든 순간 불현듯 찾아온 새벽녘의 반짝임으로 느껴졌다. 은밀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여미고서 돌아가는 길, 1901년 개통한 부퍼탈의 명물 슈베베반에 몸을 실었다. 선로에 매달려 도심을 운행하는 모노레일로 오래된 객차의 분위기와 흔들거리며 이동할 때의 순수한 묘미가 있다. 창밖으론 공업도시 특유의 녹슨 색감이 오후의 햇살과 겹쳐지고 있었다. 대롱대롱 매달려 부유하는 느낌으로 가파른 부퍼 강 사이를 지나간다. ‘대롱대롱 매달린’ 그 유쾌한 감각처럼, 내 여름의 날들에도 영롱한 달콤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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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um Insel Hombroich in Neuss
뒤셀도르프에서 차로 30분쯤 달려 어느 벌판에 들어서면 인젤 홈브로이히(Insel Hombroich)라는 ‘섬’을 만난다. 숲과 늪지대, 너른 들판 그리고 세상에서의 고립을 자처한 개념적인 이 ‘섬’은 뮤지엄이라는 이름으로 우릴 반긴다. 미술품 컬렉터였던 칼 하인리히 뮐러는 옛 나토 로켓 발사 기지였던 이 광활한 대지를 매입해 자연과 예술을 경계 없이 만날 수 있는 미술관을 지었다. 그리고 뮐러와 절친했던 조각가 에르빈 헤리히, 아나톨 헤르츠펠트가 동참해 자연 속 절묘한 자리마다에 벽돌 건물을 짓고 사색적인 조각들을 설치했다. 1987년의 일이었고 얼마간 비밀스러운 발길만 이어지던 이곳이 최근 수많은 예술여행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이르렀다. 작은 간이역 같은 건물로 들어가 티켓을 사고 지도를 받아들면 비로소 긴 여정이 시작된다. 초입의 잔잔한 오솔길을 지나 나무들과 들풀 더미를 만나고, 그 야생의 내음에 살며시 이끌리다 보면 정방형의 벽돌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빛과 공기만 떠도는 첫 번째 텅 빈 방은 그저 관람객이 생경하게 지나가는 통로 혹은 안과 밖을 가장 감각적으로 서술하는 적막의 공간이 된다. 그렇다면 다음번 건물은 어떤 형태로 누구의 작품들을 품고 있을까. 거대한 땅 이곳저곳에 펼쳐진 열여섯 동 건물들은 그렇게 차례대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촘촘히 쌓은 벽돌 벽이 폐허의 조각처럼 무성한 수풀 사이에, 이끼 낀 물가 너머에 숨어 있다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 때의 시각적 경험은 드라마틱하다 못해 꿈결 속 장면 같다.
비로소 그림이 걸린 전시장 안을 거닌다. 풍경 속에 머물다가 풍경화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코린트의 봄볕 같은 회화들, 그라우브너의 푸릇한 추상화, 아르프의 조형적인 캔버스, 고대 크메르의 조각들이 어우러진 공간.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컬렉터의 손과 눈은 이토록 조화롭고 위대하다. 동행한 친구가 “여긴 전부 타이틀이 없네요?”라고 조심스레 묻는다. 인젤 홈브로이히의 모든 작품들에는 아무런 설명도 친절한 안내도 존재하지 않는다. 감시자의 눈도 없는 그 공간에서 자연과 예술작품을 평행하게 바라보게 하는 건 관람자의 쉼 없는 의지와 지성일 것이다. “해석하지 말고 그저 되살려라. 아름다운 것 뒤에, 닿아야만 하는 근원이 있다.”는 부조니의 통렬한 언어만큼 어쩌면 이 미술관을 지은 이도 그 깊은 진실의 언저리에 도달했는지 모를 일이다. 여름 햇살에 더욱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와 만발한 수국들 곁으로 연못이 흐르고 있었다. 발밑을 간지럽히는 자갈 소리와 ‘지금을 기억하자’는 마음속의 말이 차례로 들려왔다.
미술관의 절반쯤을 둘러보고 피로가 밀려올 무렵 카페테리아가 나타났다. 테이블에 놓인 사과와 빵은 누구나 무료로 먹을 수 있다. 나무 그늘 아래, 초록색 철제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여정의 여운에 만족한 듯 어딘가 초월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휴식보다는 사색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누구에게라도 먼저 말을 건네면 다정한 대화가 이어질 듯했다. 인젤 홈브로이히에서는 관람보다는 산책 혹은 방황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두 갈래 길에서 고민에 빠져 머뭇거렸거나 이미 지나온 건물을 멋쩍게 다시 통과하고, 길을 잃은 채 감각을 긴장시켰던 모든 시간까지 반나절은 넘게 걸린다. 태곳적을 떠올리게 하는 야생과 풍요를 선사하지만 날씨가 사나울 때는 휘몰아치는 황량한 바람을 온몸으로 견뎌야 할 것이다. 이토록 기대에 찬 여정이라도, 걷고 또 걷다보면 내 발자국 소리만을 감지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여름이라는 계절 속 풍광은 이토록 다채롭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