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충돌 그 자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이불, 충돌 그 자체

지난여름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아티스트 이불의 전시 'Crashing'이 열렸다.

BAZAAR BY BAZAAR 2018.10.19

 

헤이워드 갤러리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는 이 전시에서 이불은 지난 30여 년 동안의 그녀 예술세계의 지표가 된 대표작 110여 점을 통해 ‘아름답고도 위협적인’ 풍경을 구축했다. 헤이워드 갤러리 랄프 루고프 디렉터의 “이불의 유토피언 모더니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갤러리의 모험적인 건축물에 나타난 민주주의에의 열망과 완벽한 짝을 이룬다.”는 표현은 1950년대 브루털리즘 건축인 갤러리 공간과 강렬하고 지적인 이불 작업이 탁월한 창조적 협력을 이뤄냈음을 증명한다. 이제 전시는 런던에서 베를린으로 건너가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에서 곧 그 항해를 시작한다. 그곳의 창밖으로 펼쳐진 무거운 역사의 물리적인 상흔은 사색적인 감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 안에서 인간의 조건과 의문들을 궁리하고 관찰해온 무서운 열정이 ‘충돌’이라는 감각으로 우리들 인식 어딘가와 부딪힐 수 있다면 말이다.

Lee Jea-an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의 전시 은 회고전 성격이 드러나는데요. 지난 30여 년간의 작업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이나 감정이 있을 것 같아요.

돌아보는 일은 늘 민망하죠. 그래도 한편으로 반가운 건 작품들이 내 손을 떠나면 볼 기회가 없는데 이런 전시를 통해서 한자리에 놓고 볼 수 있다는 거예요. 회고전은 사실 기존의 작업을 가지고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잖아요. 새로운 장소나 시점 같은 걸 염두에 두고 큐레이터와 상의하면서 여러 맥락을 고민하죠. 이번에도 런던 전시 끝나고 곧장 베를린으로 가는데 장소의 성격은 너무나도 달라요. 그런 부분까지 초기에 기획할 때 어디에 포커스를 맞출 건지, 앞뒤 전시가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생각하며 진행하는 게 흥미로웠어요.

일반적으로 이불을 서술할 때 초기의 퍼포먼스 작업과 이후 사이보그, 몬스터 시대, 그리고 나의 거대 서사와 이후의 현재 작업으로 구분할 것 같아요. 그 구분을 단절이 아닌 진화나 변화로 본다면, 일관되게 붙들고 있는 주제나 질문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향한 어떤 물음을 지속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에요. 물론 말을 할 수는 있지만 내가 얘기하는 순간 그게 딱지처럼 붙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단어를 프레임으로 작업을 보려고 해요. 그래서 약간은 불친절하게 말을 잘 안 하려고 하죠. 작업을 쭉 보다 보면 그동안 참 많은 시도들을 했구나 싶다가도 이것밖에 안 했었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2012년에 모리미술관 회고전 이후로 계속 회고전 형식으로 전시가 이어지고 있어요. 큐레이터와 인스티튜션이 바뀌었을 뿐 벌써 일곱 번째 정도 돼요. 그래서 이제는 어느 부분이 모자라는지가 많이 보여서 힘에 부치기도 해요. 한편으로는 새로운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1 June - 19 August 2018. Willing To Be Vulnerable, 2015-16.

사진/ ⓒ Lee Bul. Courtesy: Hayward Gallery, London. Photo: Linda Nylind, ⓒ Lee Bul. Courtesy: Hayward Gallery, London. Photo: Mark Blower

새롭다는 건 개념적인 건가요? 아니면 비주얼적인 부분인가요?

둘 다죠. 콘셉트는 내가 아무리 방향을 틀어도 어느 순간 보면 다시 돌아와 있어요. 주제에 있어 제가 만나는 여러 가지 레퍼런스를 많이 쓰기 때문에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내 삶이 일관성이 있다면 작업에서도 일관성이 있지 않겠어요. 최근 들어서 ‘화가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특히 커다란 조각들을 다루는 건 굉장히 물리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큰 작업을 위한 시간이나 여러 가지 제반 여건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힘든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평면 작업을 하면 좀 자유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지 몇 해가 되었는데, 최근 전시들이 대부분 회고전이다 보니까 큐레이터들도 조각을 계속 디벨럽해서 보여주길 원하죠. 시치미 뚝 떼고 ‘나 그림 그리던 화가야’라고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거예요.

조각을 디벨럽한다는 측면에서 작업의 마디마다 어떤 변화들을 동반해왔다고 생각해요. 작업의 규모 혹은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요.

외부에서 제 작업을 읽는 것만큼 터닝이 심한 건 아닌데, 단지 제가 같은 걸 반복적으로 하는 걸 못하거든요. 지루해하길 잘하죠. 너무 쉬우면 작업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내가 재미를 느끼고 나한테 도전인 방식으로 끌고 가는 면이 있어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것에 매달리다 보면 거기서 느껴지는 쾌감 같은 게 있거든요. 내가 잘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거라면 한 번 더 그걸 보여주는 거 외에는 없잖아요. 경험해보지 않은 걸 시도하면서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보여줄 수는 있는 건가 하는 의문들. 마치 연애 감정처럼 오르락내리락 애를 태우는 과정이 재미있나 봐요.

‘Willing To Be Vulnerable’, 2015-16.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최근 들어서 ‘화가가 되어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특히 커다란 조각들을 다루는 건 굉장히 물리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런 큰 작업을 위한 시간이나 여러 가지 제반 여건이 너무 제한적이어서 힘든 부분이 많아요. 그래서 평면 작업을 하면 좀 자유롭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지 몇 해가 되었어요.

사진/ ⓒ Lee Bul. Courtesy: Hayward Gallery, London. Photo: Linda Nylind

헤이워드 갤러리 건물은 1950년대 브루털리즘 건축양식으로 강렬한 풍경을 만들어내죠. 관객 입장에서 그 풍경을 통과한 뒤 전시 으로 진입할 때의 경험적 측면 또한 독특하고 흥미로울 것 같아요.

헤이워드 갤러리는 1950년대에 일종의 이상적인 공간을 제안하면서 나온 거예요. 지금은 콘크리트를 굳건하고 변하지 않는 재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콘크리트가 가장 자유로운 형태(Form)를 만들 수 있는 재료였어요. 굉장히 자유롭고 유기적인 시도를 제안한 거였죠. 건물의 구조도 다른 건물들과의 관계가 복잡하게 되어 있고 어디가 입구고 어디가 어느층인지 헷갈리기도 해요. 2층 전시장에서 나가면 옆에 있는 극장 건물이랑 연결이 된다든가, 지하로도 통로가 뚫려 있기도 한데 그런 목적에 맞춰 디자인을 한 거라 마치 벙커처럼 되어 있어요. 사실 브루털리즘 건축이 많은 수모를 당했죠. 너무 어글리해서.(웃음) 그렇지만 어떤 한 시기를 버텼기 때문에 지금은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획득했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어글리라고 할 때조차 어떤 애정을 갖고 있거든요.

전시되는 공간과의 다이얼로그를 중요한 요소로 고려하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전에서는 각 층에 어떤 작업들을 통해 어떤 상황을 의도하셨는지 궁금해요. 랄프 루고프 디렉터는 “이불은 갤러리의 독특한 디자인을 배경으로보다는 협력자로 활용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어요.

작업을 시기적으로 풀기가 힘든 공간이어서 30년 동안의 작업으로 풍경을 만들어봤어요. 그래서 막 섞여 있어요. 관람객도 우리가 제안한 방식으로밖에 볼 수 없어요. 이 사람이 1980년대에는 무슨 작업을 했고 2000년대에는 어떤 작업을 했는지 아카데믹하게 좇아가는 게 아니라 80년대 작업 뒤로 2000년대 작업이 같이 놓인다든지 그런 방식이었죠. 시간을 거리로 측정해본다면 그 거리를 압축해서 제안한 셈이에요. 자연광이 있는 위층 제일 큰 공간에 재플린이라는 17m짜리 에어십 대형 조각 하나가 있는데, 똑바로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볼륨이 커서 사선 각도로 허공에 띄워놓았어요. 그런 식으로 드라마틱하게 구성했어요.

헤이워드 갤러리 내부 공간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서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계속해서 중첩시키면서 작품을 봐야 해요. 공간들이 일종의 큐브처럼 자기를 지우는 게 아니라 계속해서 그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풍경처럼 보여주고 있어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을 보면 작품 사진이 아주 멋있게 나와요. 왜냐면 보통 전시장은 자기 캐릭터를 흰색으로 지워서 작품만 보이거든요. 그런데 헤이워드는 벽과 건물의 일부 그리고 거길 가로지르는 들보가 같이 보여요. 건물의 요소와 작품이 함께 드러나는 거죠. 전체적으로 공간이 제 작품과 잘 맞았어요. 콘크리트, 브라스, 그리고 돌도 콘크리트도 아닌 바닥 소재, 검은색의 천장처럼 강력한 재료가 드러나는 공간인데 제 작업의 재료들은 굉장히 소프트하거나 연약한 느낌이라 두 성격이 부딪히죠. 저는 금속을 쓰더라도 아주 얇고 날카로운 방식으로 사용하잖아요. 그런 충돌들이 흥미로웠어요.

이번 전시에 대해서 유난히 많은 리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흥미로웠던 비평이 있나요?

이번에는 기사가 참 많이 나왔어요. 그리고 기사마다 관점과 내용이 달랐던 것도 흥미로웠어요. 사실 30년 동안의 작업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게 참 어렵죠. 헤드라인 중에 재미있었던 건 ‘Beauty and Menace(미와 위협)’, ‘Beauty and Horror(미와 공포)’. 대부분의 작가가 마찬가지겠지만 다양한 리뷰가 나오면 기분이 좋죠. 그리고 제가 평소 좋아하는 비평가가 아주 흥미롭게 글을 써줬는데, 매튜 콜링스(Matthew Collings)라는 평론가의 ‘Prepare for Maximum Impact and Intellectual Fun’이라는 글이에요. 제가 평소 레퍼런스를 드러내지 않는데 이분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싶더라고요. 읽으면서 참 재미있었어요. 영국 사람들이 참 이상한 게 별점도 매겨요. 어디서부터 온 문화인지 모르겠는데, 전시에도 별점을 붙이더라고요. 그래도 별점 평균이 마음에 들게 나왔어요. 다섯 개 주면 난 전시 접어야 될 것 같다고 그랬는데. 왜냐면 별이 다섯 개면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거잖아요. 그렇다고 매너 없이 하나를 주지는 않겠지 싶었는데 그래도 평균 네 개씩 나왔어요. 이건 미술관 입장에서도 흥행 면에서 좋은 반응인 거예요. 아무래도 관객이 많이 찾아오니까요.

‘Mon grand recit: Weep into stones...’, 2005.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Untitled (Cravings Red)', 2011 (reconstruction of 1988 works).

저는 근대에 제안되었던, 실패한 이상주의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품었던 여러 가지 유토피아라는 제안들이 실패를 경험한 이후 또는 실현되지 않은 상황들을 이 시점에서 언급하는 거죠.

전시가 9월 28일부터는 베를린의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열리게 돼요.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역시 전시 공간 자체도 인상적이지만 역사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잖아요.

맞아요. 베를린의 경우는 완전히 달라요.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는 공간이라기보단 장소에 가깝죠. 플레이스. 왜냐하면 그 건물의 독특함이라기보다 그 건물이 놓인 그 장소, 그리고 거기서 일어났던 역사가 너무나 강해요. 여전히 건물 바깥에 총알 자국이 남아 있고, 미술관 옆에 게슈타포 본부 자리도 있고 건축의 양식조차 여러 시대가 합쳐지고 무너졌다가 다시 이어진 형국이에요. 아름답다기보다는 흔적을 온몸으로 다 갖고 있는 독특함이 있어요. 그런데 전시장 내부는 또 완전히 달라요. 아주 전형적인 방들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방과 방을 계속 지나면서 작업을 경험하게 돼요. 베를린에서는 근대사 쪽에 초점을 맞춰서 설치를 풀어가보려고 계획 중이에요.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의 스테파니 로젠탈 디렉터는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관람자들이 유토피아로의 탐험 여정에 오르기를 바란다. 그녀의 작업에서 특히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그 잠재적 실패를 함께 다루는 방식이 흥미로우며, 이 주제들에 접근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하다.”라면서 작가님의 주제인 유토피아를 언급하고 있어요. 시대를 초월한 여러 유토피아를 향한 시도들에서 어떤 영감을 얻었으며, 유토피아의 언급이 자신의 어떤 질문들과 맞닿아 있나요?

저는 유토피아를 언급하면서 늘 유토피아라는 단어 앞에 어떤 표현을 써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표현을 빼놓고 마치 제가 어떤 유토피아를 제안한다고 오해를 해요. 그건 정말 아니거든요. 어쨌든 이번에 정정할 기회가 왔으니 얘길 할게요. 저는 근대에 제안되었던, 실패한 이상주의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인간이 품었던 여러 가지 유토피아라는 제안들이 실패를 경험한 이후 또는 실현되지 않은 상황들을 이 시점에서 언급하는 거죠. 정확하게는 그거예요. 물론 제 시선은 있지만 제가 어떤 이상적인 걸 제안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실패한 유토피아를 언급하는 의도는 무엇인가요?

모든 사람의 관심이니까요. 인간의 운명 같은 거 아닐까요? 그런 제안이나 아이디어를 꿈꾸지 않는다면 사람이 살 수 없겠죠. 그건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언급하는 거예요. 그리고 실패한 것일수록 그 안에 굉장히 아름다운 것들이 많아요. 당연히 그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어차피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에는 ‘실현 불가능함’을 내포하고 있어요. 단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방식으로서 등장을 했던 거죠. 어쨌든 그런 모든 제안들이 어떤 과정들을 겪고 언제 작동을 했었고 어떤 이유로 작동을 멈추고 어떤 이유로 실패하게 되었는지 그런 과정들에 흥미가 있는 거예요.

레퍼런스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편인데, ‘브루노 타우트 이후’라는 작업에서는 예외적으로 타이틀에서부터 레퍼런스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요.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의 비전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불가능성을 띠는 것 같아요. 그의 비전에 대한 입장이 있으신가요?

타우트는 제가 좋아하는 건축가이기도 하고 실제로 영감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작업 제목으로 붙이기도 했어요. 20세기 초반 타우트의 제안들은 정말 황당한 것들이 많아요. 정말 이건 실현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제안하거든요. 그중에서 아주 극단적인 게 ‘스턴바우(Sternbau)’라고 제 작업의 제목이기도 한데 스턴바우의 뜻은 일종의 별(플래닛)인 동시에 건축 구조예요. 그런 걸 제안한 거예요. 극단적 이상주의죠. 그게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했던 거예요. 브루노 타우트가 굉장히 실용적인 건물들도 제안을 했지만, 한편으로 더 강력하게 본인이 추구했던 것들은 인류에게 어떤 것이 이상적인 것인지에 대한 디벨럽이었어요. 그 제안들이 아주 흥미로워요. 실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드로잉 같은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죠. 크리스털 팰리스라고 투명한 유리로 지어서 내부를 다 볼 수 있는 건물 같은 걸 제안했어요. 지금이야 유리 건물이 많지만 당시로선 불가능했거든요. 재료와 이상, 그리고 여러 시도들 거기에 일종의 기술 발전이 뒤엉켜서 그 과정 전체가 상당히 흥미로워요. 타우트의 건축 언어 하나하나를 깊게 파고 들었다기보다는 그 사람이 제안했던 계획 중에서 너무나 흥미로운 것에 집중을 해서 그 레퍼런스를 갖고 무엇을 내가 얘기할 수 있는지 진행해본 거죠.

넓은 의미의 ‘모던’의 개념에 오래 집중을 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오랜 테마로서 ‘근대’를 관통하는 문제제기 혹은 발화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모던이 훨씬 더 중요하고 넓은 개념이에요. 제 작업의 거의 모든 작업 언어가 사실 근대적 개념이거든요. ‘비아 네가티바’ 작업 같은 경우 내부는 미로지만 겉에 드러나는 요소나 텍스트를 보면 자의식에 대한 언급이 많아요. 사실 자아라는 단어가 근대의 발명품이거든요. 근대를 단순히 시기적으로 몇 년도부터 몇 년도까지로 구분하기보다는 근대에 어떤 개념들이 탄생했는지,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여러 가지 판단이나 우리 사고에 굉장히 중요한 틀이 근대에 만들어졌다는 게 더 중요했어요. 그 이전까지 그런 개념이 없었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근대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설사 근대적인 언어처럼 보이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레이어를 들춰내다 보면 이 사람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게 결국은 ‘근대’구나라는 생각이 드실 거예요.

사실 근대라는 개념이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아주 방대한 테마가 되죠. 한국적 상황에서는 해결되지 않은 근대일 수도 있고요. 어떤 이유 때문에 그 키워드에 자꾸 시선이 가세요?

정치적인 것에서 산업적인 것까지 근대에 탄생한 것들이 너무 많고, 사실 지금도 탈근대냐 근대냐 후기근대냐를 따지면서 계속해서 근대라는 단어 안에서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렇다는 거 자체가 이미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근대의 발명품으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의문이나 주변에 갖는 의문이 있잖아요. 그 의문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근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나는 근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고, 특히 한국 사람들은 더더욱 압축적 근대를 살고 있잖아요. 그걸 에센셜하게 다루기에 가장 적합한 세대가 아닌가 해요. 시기가 짧고 눌려 있다 보니 마치 편육의 결을 보듯이 살펴보는 거죠. 생각해보면 제가 이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야심찬 주제를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나 그 근대의 화두는 특정 작품에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드러나지는 않고 있어요. 지난 수년간의 작업들을 부유하며 맴도는 화두 같아요. 그게 이불만의 주제를 이끄는 방식, 작품을 보여주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여주는 거 이상일 때도 있죠. 보는 것도 감각의 하나라면 감각 자체를 어떻게 다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니까요. 그리고 일종의 감각 자체에 어필을 하고 싶을 때 내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시도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개념은 이성적 판단이어서 그 두 가지가 강력하게 부딪힐 때 일어나는 현상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실제로 경험을 해야 하는 작업들이 꽤 있죠. 이를테면 촉각이라든가 그런 방식을 통하기도 하고, 시각만으로 제한해서 시도하진 않았어요. 그걸 확장하겠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초창기였을 거예요. 초기 퍼포먼스부터도 그런 과정이었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좌에서 우) ‘Cyborg W2’, 1998. ‘Monster: Black’, 2011 (reconstruction of 1998 works). ‘Amaryllis’, 1999. ‘Civitas Solis II’, 2014.

'Via Negativa II (interior detail)', 2014.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사진/ ⓒ Lee Bul. Courtesy: Hayward Gallery, London. Photo: Linda Nylind,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1 June - 19 August 2018. Willing To Be, Vulnerable, 2015-16.

제한 없이 재료를 구사하시는 것 같아요. 거울, 크리스털, LED를 비롯해 아크릴 비즈나 클레이까지요.

일단 재료에 제한을 많이 받지 않는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재료와 개념 이 두 개가 서로 만나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이 있어요. 어느 하나도 후자로 두지 않는 거죠. 개념과 재료를 어떻게 팽팽하게 끌고 갈 수 있는지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그것에 적합하다면, 그런 힘을 일으킬 수 있는 재료라면 두려움 없이 선택을 해요. 그래서 실제로 사용방식이 정해져 있는 재료들조차도 새롭게 시도해보기도 하죠. 그렇다 보니 그 과정에서 실패도 많이 해요.

전시에서도 그렇고 도록도 살펴보면 드로잉을 비중 있게 보여주세요. 구상과 상상, 스터디에서 출발해 오랜 시간의 노동과 조율을 거치고 마침내 구현된 작업을 마주하면 어떤 기분이 드세요?

일단 그 순간에는 끝냈다는 생각밖엔 안 들어요. 보통 6개월에서 일 년이 걸리기도 하니까요. 조각이나 입체는 처음 구상을 하고 나서 그걸 실현하는 과정은 매우 공학적이에요. 감정이 개입할 틈이 없어요. 그걸 이렇게 만들려면 물리적으로 어떤 밸런스를 가져야 하고 어떤 재료야 하고 각 부분을 어떻게 연결을 해서 확장을 시키고 하물며 나중에 포장 사이즈를 줄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구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해요. 항상 중력을 염두에 두면서 싸워야 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 모든 과정은 건축에 비하면 규모가 작긴 하지만 거의 흡사한 과정을 겪는 거죠. 그러니까 구현이 되면 일단은 완성이 됐구나 그래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건 완성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이걸 멈춘 거라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보고 있다 보면 어디도 바꿔야 될 것 같고 하다못해 타이틀도 바꿔야 될 것 같기도 하고 자꾸 뭐가 보이는 거죠.

‘예술’을 시작하게 한 근원적인 이미지 혹은 내면의 동기가 있을까요?

너무 어릴 때였어요. 어린 시절에 그런 결심을 할 때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잖아요. 내가 뭘 하면 사람들이 잘한다는 얘기를 했고,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나 보다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철들고 나서는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인간의 계급이라는 구조 속에서 ‘클래스’라는 걸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예술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오지 않았나 싶네요. 전 운명이라는 단어를 생각보다 많이 써요. 뭔가를 선택하거나 작업하는 과정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이란 말을 자주 해요. 그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될 때가 분명히 있어요. 아니면 운명이란 말로 인식을 해야 그나마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재료에 제한을 많이 받지 않는 사람이에요. 무엇보다 재료와 개념 이 두 개가 서로 만나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심이 있어요.

(좌에서 우)Titan, 2013. Untitled Sculpture (W3), 2010. Installation view of Lee Bul: Crashing at the Hayward Gallery.

사진/ ⓒ Lee Bul. Courtesy: Hayward Gallery, London. Photo: Linda Nylind

‘태양의 도시’나 ‘비아 네가티바’ 등 여러 작품에서 거울을 흥미롭게 사용해오셨어요. 거울을 통한 리플렉션의 방법론도 중요하겠지만, ‘리플렉션’이라는 현상이나 상황 자체가 갖는 개념적인 의미 안에서 구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리플렉션이라는 것 자체가 인식의 한 방식이기도 해서 제가 작업에서 얘기하고자 하는 부분으로 끌고 오기에 아주 적합한 방식이었어요. 그저 반사하는 거울이 아닌, 그 매체가 어떻게 작동을 하는지 건드려보는 거죠. 실제로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동을 해요. 대부분 알고 있으면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전형이면서도 계속 작동을 하는 그 부분이 흥미로워요. ‘태양의 도시’는 톰마소 캄파넬라라는 르네상스 철학자의 저서를 레퍼런스로 사용했지만, 다른 한 축은 제 경험하고 연결된 부분이 있어요. 몇 년 전 일본에 재난이 있었을 때 마침 전시 때문에 비행기 안에 있었어요. 밤에 동경 시내가 보이는데, 불빛들이 대단하더라고요. 불빛이 멀리 있게 되면 주파 때문에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아주 어두운 속에서 미약하게 반짝반짝 신호를 보내면서 유기체처럼 움직이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구요. 우리가 이 문명을 거대하게 느끼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문명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 것인지 그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구상을 했어요. 물론 작업으로 나올 때는 센티멘털한 부분이 쏙 빠져나오면서 보여지게 되었지만 처음 구상했을 땐 상당히 감정적인 상태였어요. 암흑 속의 랜드스케이프를 어떻게 끌고 갈까 하다가 끝없이 파편적인 리플렉션으로 형성된 거대한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오게 된 거죠. 굉장히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설치되었을 때 효과는 불안정하고 아름다우면서 너무나 연약한 것으로 보여줄 수 있었어요.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아티스트로서 느끼는 가장 큰 한계는 무엇인가요?

저는 작가로서 사는 건 아니에요. 사실 그 구분이 모호하긴 하지만 난 나로 사는 거예요. ‘작가로서’라는 생각 같은 건 안 해요. 이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하는 거고 또 습관처럼 하는 거예요. 너무 뻔한 얘기 같지만 실제로 그래요. 항상 내 자신한테 언제든지 내가 원하면 그만둘 수 있다고 얘기는 해요. 물론 실제로 그러지는 못하겠지만, 그 정도는 의식한다는 거예요. 적어도 딸려가진 않겠다는. 그리고 지금 이 상태로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욕망에 충실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작업이 길게는 수개월씩 걸리기도 하는데,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하시는 편인가요?

매일 하긴 해요. 작업실에서 있는 시간이 제일 좋고 편해요. 한편으로는 취미 같기도 하고 작업하는 건 일 같은 생각이 안 들어요. 팽팽해지는 건 작업실 들어가면서부터가 아니라 거기서 놀고, 빈둥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팽팽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그러다가 다시 풀어지는 과정이 있고요. 난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작업실로 들어가서 모드를 바꾸는 게 아무리 훈련을 해도 잘 안 돼요. 그게 안 되는 사람이더라고요. 그냥 오는 것 같아요 어느 시점에. 어떻게 보면 작업실 안에서 그런 순간을 기다리나 봐요.

사진/ Lee Jea-an

요즘 작가님을 건드리는 화두는 무엇인가요?

관심사나 화두는 거의 변한 게 없어요. 난 관심의 웨이브가 굉장히 뚜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아침에도 작업실에 앉아서 아직 완성 안 된 두 개의 작업을 한참 바라봤는데, 그 두 개가 너무 달라요. 내가 이걸 하면서 이것도 어떻게 동시에 할 수 있지? 싶더라고요. 지금 하고 있는 건 너무나 날카롭고 재앙적인 무드인데, 직전에 한 건 너무 아름답고 너무나 미약한 것이더라고요. 나 스스로는 이게 뭘까 궁금한 거예요. 결국 이건 일종의 화두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삶의 웨이브를 따라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벽의 노래’나 ‘비아 네가티바’ 같은 작품 안에 머물다 보면, 이불 작업에 대한 수많은 텍스트와 언어가 무력해짐을 느낍니다. 어쩌면 그 지점이 작가님의 의도가 잘 작동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작업의 의도나 전략에 있어 고수하는 방식이 있으신가요?

고수하는 원칙은 특별히 없어요. 그런데 내 생각에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가 그 핵심을 좀 잡아준 것 같아요. 그 사람은 내 작업의 주제나 소주제가 계속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충돌’, 그것이 방법적이든 아니면 개념적이든 ‘충돌’을 지속적으로 시도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라는 타이틀을 끝까지 강력하게 주장한 거예요. 나도 그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지만 내가 흥미로워하는 작가의 제목과 너무 흡사해서 안 썼으면 했는데 그걸 키워드로 써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충돌 그 자체.

※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 베를린(Martin Gropius Bau Berlin)에서 열리는 전은 9월 29일부터 2019년 1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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