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 커포티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그가 주최했던 블랙 앤 화이트 볼(Black and White Ball) 파티는 너무 화려해서 파티의 전설로 여겨졌다. 파티는 1966년 11월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열렸으며, 앤디 워홀, 글로리아 밴더빌트, 프랭크 시나트라와 자이푸르 마하라니 같은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마스크와 모노크롬 룩을 착장한 그들의 모습은 눈부신 연회장을 빛냈다. 그로부터 1년 후, 피아트 제국의 계승자와 결혼한 이탈리아 공주 마렐라 아넬리는 회고록을 통해 당시 파티에 대해 회상했다. 그리고 커포티가 말하지 않았던 파티의 목적이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그가 차기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며 그 파티에 그들을 초대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마스크를 쓴 540명의 게스트 중에는 커포티가 자신의 백조로 여기는 여섯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었다. 슬림 키스(Slim Keith), 베이브 페일리(Babe Paley), 리 라지윌(Lee Radziwill), 글로리아 기네스(Gloria Guinness), CZ 게스트(CZ Guest), 아넬리(Agnelli)가 그들이었다. 커포티는 그녀들과 긴밀한 우정을 쌓았으며,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지중해에서 같이 요트를 타기도 했고, 함께 개인용 여객기로 카리브 해까지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75년의 파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은밀한 비밀의 모든 것을 담은 미완성 소설 <응답받은 기도(Answered Prayer)>를 <에스콰이어>지에 공개하면서 우정은 끝났다. 커포티는 분노한 뮤즈들에 의해 그들의 세상에서 추방되었다. 그를 나락으로 몰게 한 소설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어떤 작품도 남길 수 없었다. 그는 술과 마약을 남용하기 시작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커포티의 아름다운 그녀들은 수십 년 동안 뉴욕 사회를 지배한 여성들로, 흥미로운 기삿거리에 자주 등장했다. <바자>와 같은 패션 잡지에 자주 나왔으며, 그 중 세 명은 잡지 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모델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슬림 키스는 <바자>의 패션 에디터 다이애나 브릴랜드, 그리고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던 편집장 카멜 스노와 친한 사이였다. 후에 영화 디렉터 하워드 호크스와 결혼하게 되는 키스는
<바자>의 커버 모델을 장식하며 할리우드의 이목을 끌게 된 로런 버콜을 남편 영화인 <소유와 무소유(To Have and Have Not)>에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반면, 글로리아 기네스는 유명한 양조장 후계자와 결혼하여 멕시코에서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1963년부터 1971년까지, 그녀는 당대 패션 변화를 연대기 형식의 칼럼으로 작성하여 <바자>에 기고하였다. 재키 케네디의 여동생인 리 라지윌 역시 잠시 동안 잡지사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이브 페일리는 뉴욕의 패션 아이콘이었으며, 밝은 블론드 헤어와 페일 블루 컬러의 눈이 매력적인 CZ 게스트는 영화배우이자 사교계의 명사였다.
그들은 아주 매력적인 여성들이었지만, 커포티가 그들에게 빠졌던 데에는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커포티의 변덕스러웠던 어머니는 1954년에 자살했고, 그는 그 다음 해부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불안한 균열을 채우려는 듯이 자신의 백조들을 찾기 시작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여섯 명의 백조 중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제법 나이가 많았다.
커포티가 <바자>에 기고한 많은 글 중에서 ‘백조들의 모임(A Gathering of Swans)’은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 백조들의 모임은 1959년 10월호 이슈에 게재되었고, 리처드 애버던이 글로리아 기네스의 딸인 돌로레스와 베이브 페일리가 딸 아만다와 함께 포즈를 취한 이미지를 촬영했다. 당시 페일리는 44세였다. 이에 대해 커포티는 어리고 아름다운 소녀는 주변의 관심을 끌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감탄과 존경을 얻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는 수십 년간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타고난 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신감을 갖춰야 하고, 백조가 되기 위한 헌신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관객들로부터 완벽한 존중을 받을 수 있다. 위대한 인내, 그리고 예술가의 집중력이 조화되어 탄생한 그들의 업적은 자신의 신념을 대변한다.
“그는 그들을 자신의 소설 속 여주인공으로 보았다.” 켈리 그린버그 제프콧(Kelleigh Greenberg-Jephcott)이 말한다. 커포티의 백조들로부터 영감을 얻은 그녀는 수십 년간의 리서치를 통해 소설을 완성했다. “그녀들 중 다수는 커포티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쟁취했고, 나는 커포티가 자신과 영혼이 닮은 사람들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저서는 커포티의 사회적 몰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에스콰이어>의 ‘La Cote Basque’(1965) 공개 이후의 여정을 보여준다. 커포티와 가장 가까웠던 페일리와 키스는 가장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녀들의 삶은 텍스트를 통해 아주 잔인하게 노출되어 가십거리가 되었다.(하지만 이 둘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커포티가 경멸했던 사교계 명사 앤 우드워드의 경우 남편의 살인사건에 대한 내용이 폭로되었고, 그 문제가 신문 가판대에도 오르기 전에 치사량의 약을 복용했다.)
“커포티는 자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린버그 제프콧이 말한다. “그리고 그는 20년간의 우정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건 완벽한 판단 착오였다.” 아마도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가 커포티의 분별력을 흐리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1959년 <바자>에 기고했던 글에 따르면, 그들과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기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최상의 아름다운 존재와 마주칠 때 생기는 두려움은 나의 즉각적인 태도를 결정한다. 아름다운 존재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만큼이나 두려움도 크기 때문에 커다란 고드름에 찔리는 듯한 한기를 느끼게 된다.”
커포티는 그가 처음 느꼈던 기분이 글로 표현되었을 때 모든 일들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 못했다. 소설의 영감이 되는 풍부한 자원의 유혹에 저항하지 많은 채, 그는 태양에 너무 가깝게 다가갔다. 그의 기품 있는 친구들이 지닌 힘과 영향력을 잊은 채,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위해 그들을 배신하고 말았다.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완벽한 소설이 되었다. 자신이 지녔던 펜에 의해 불운하게 독살당해버린 커포티가 그린 20세기의 대서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