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라거펠트 파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난 35년 동안 샤넬 하우스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은 칼 라거펠트와의 아주 사적인 인터뷰. | 인터뷰,샤넬,디자이너,칼라거펠트,패션

칼 라거펠트를 처음 만난 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항상 구체적인 자신의 과거 이야기나 미래의 계획에 대해 정확히 언급하는 것을 꺼려했다. “저는 회한이나 후회가 없어요.” 어느 날 그가 고백했다. “과거에 대해서는 기억상실증이 있어요.” 또 다른 어느 날인가에는 이렇게 강조했다. “제가 제 자신을 정의 내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내일은 오늘과는 정반대의 사람이 될 수 있거든요.”그런다 한들 그때도 그랬고 그 후에도 라거펠트는 만날 때마다 내게 언제나 완전한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위트 넘치고 통찰력 있으며 칼날처럼 날카롭기도 하지만 의외로 친절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자신이 말한 것처럼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가장 현명한 방향은 캉봉 가에 위치한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에서 있었던 가장 최근의 만남에서 내가 느낀 그대로의 그를 묘사하는 것이리라. 그날은 두 개의 중요한 쇼(지난달에 본 아름답게 애잔한 2018 F/W 컬렉션과 좀 더 가벼운 분위기의 크루즈 프레젠테이션. 라거펠트는 그날 오후 크루즈 컬렉션의 마지막 디테일 점검을 했다) 사이에 짧은 공백 기간이라 할 수 있었던 금요일 저녁이었고, 건물은 유난히 조용했다.존경할 만한 건 그는 늘 똑같은(한 가지만 빼고) 모습이라는 거다. 드높은 칼라의 풀 먹인 화이트 셔츠, 칠흑 같은 컬러의 진, 테일러드 블랙 재킷, 흰머리 등 장엄하고 당당한 모노크롬 유니폼은 예전 그대로인데 이번에는 회색빛 수염으로 인해 다소 부드러워 보였다. 이 모습은 예상외로 그의 자상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것을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문득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고양이 슈페트가 자신의 털과 똑같은 색깔을 가진 주인의 수염을 마음에 들어 할지 궁금해졌다. “물론이죠!” 칼이 즐거워하며 말한다. “슈페트가 좋아하지 않는 건 제가 잠들어서 그녀에게 등을 돌릴 때뿐이에요. 정말 화를 내거든요.”슈페트와 칼은 앤티크 레이스의 화이트 리넨으로 꾸며진 침대에서 절친한 관계들이 으레 그러하듯 함께 잔다. “슈페트는 배가 고파지면 먼저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요.” 그가 설명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으면 돌아와 제 위로 점프해서는 저를 깨우죠. 때로는 한밤중에 놀고 싶어하기도 하고요. 제 위를 뛰어다니고는 가벼운 여름 캐시미어 블랭킷 사이로 작은 이빨을 이용해 저를 깨물기도 해요.”“슈페트와 점점 더 비슷하게 닮아갈 거예요.” 내가 말했다.“맞아요. 오랜 커플처럼 말이죠.” 그가 아이폰에 담긴 슈페트의 사진을 보여주며 웃는다. “그녀는(슈페트) 정말 감성적인 사람 같아요. 진짜 웃겨요. 제가 신문을 읽고 있을 때 저랑 같이 읽는다니까요. 마루가 아니라 식탁에서 먹기도 하죠. 음식이 바닥에 있으면 만지지도 않아요. 정말 사람 같아요…. 가끔 슈페트가 어머니의 환생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아하, 칼의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있었지.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유난히 혐오감을 드러내는 탓에 그녀는 내게 있어 더 알아보고 싶은 흥미로운 여성이었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그는 평소보다는 살짝 더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오토 라거펠트(연유 회사를 운영했던 유복한 독일 출신 비즈니스맨)의 두 번째 부인인 엘리자베스는 실제로 자신의 외동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칼은 그녀에 대해 ‘완벽’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그녀의 교육 방식을 설명할 때 사실 나는 무섭다고 느꼈다. 이를테면 그녀는 그가 피아노를 연습할 때 손가락 위로 피아노 뚜껑을 내리친다거나, 그림 그리는 것을 억지로 시키곤 했고(이유인즉슨, 소음이 작기 때문에), 손가락이 못생겼다는 둥, 콧구멍이 너무 넓다는 둥, 헤어가 우스꽝스럽다는 둥 그에 관해 가능한 모든 것을 꼬투리 잡아 비웃었다. 그러한 압박은 결국 지금도 그가 대중 앞에 설 때 자신의 못난 손을 가리기 위해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장갑을 끼게 된 계기가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녀의 태도는 칼에게 있어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책임지는 능력에 자신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 후 이어진 엄격한 자기 절제(그는 살면서 지금까지 담배를 피워본 적도, 마약을 해본 적도, 혹은 술에 탐닉해본 적도 없다)는 실제로 당대의 연약했던 이브 생 로랑(쾌락과 우울 사이를 오갔던)보다 업계에서 훨씬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청소년기에 칼은 부모님에게 독일 집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해도 될지 물어봤다고 한다. “사람들은 어머니에게 유학이야말로 아들을 망치는 길이라고 했대요.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방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아들은 그러지 않을 거야.’” 결론적으로 그녀의 말은 맞았고, 당시 칼은 국제양모사무국(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이 후원한 1965년 패션 콘테스트에서 코트 부문으로 1등을 수상하면서 발맹 오트 쿠튀르 하우스에서 어시스턴트 일을 시작한다.(같은 해, 이브 생 로랑 또한 수상을 했고 그 둘은 일을 함께 시작하며 친구가 된다.) 칼에게 피에르 발맹이 어땠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복잡하고 콧대 높고, 좋은 사람은 전혀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좋았어요.” 칼이 일러스트레이션에 있어 특별한 재능을 연마할 수 있었던 건 견습생 기간 때였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방법으로 배웠어요. 발맹에 있을 때엔 복사기가 없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서 모든 드레스를 직접 스케치해야만 했죠. 컬렉션이 끝난 날부터 3주 동안은 새벽 두 시까지 한 사람이 모든 걸 그리는 역할을 담당했어요. 스케치들을 클라이언트들에게 바로 보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제 스케치에 모든 테크니컬한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거예요.”이러한 일러스트레이션은 오늘날 펜디와 샤넬,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까지 그가 만드는 모든 것의 기저로 지속되고 있다. 물론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후자는 “보다 자신의 만화 버전 같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스케치들은 그가 지닌 실제적인 전문 기술의 증거임을 차치할 뿐 아니라 한 사람의 감각적인 인생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나는 때로 오래된 드레스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욱 그렇다고 그에게 말해주었다.“네, 맞아요. 전 오래된 드레스를 싫어해요.” 그가 말한다. “빈티지 피스를 보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음 쇼나 미래의 영감 등을 향해 언제나 앞을 내다보지만 그도 가브리엘 샤넬을 포함, 과거의 쿠튀리에가 가진 여러 아이디어에 있어서는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1983년 그가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막 되었을 때 브랜드는 1971년 창업자의 죽음 이후 변한 것이 거의 없어 소멸 직전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태였다. 그의 천재적 재능은 샤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리틀 블랙 드레스, 트위드 재킷, 진주 등 그녀의 아이코닉한 작품을 지나치게 숭배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샤넬이라는 레이블을 성공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샤넬이 지난 6월 108년의 역사상 처음으로 사업 실적을 발표했을 때 2017년의 총 영업 이익은 100억 달러에 가까웠다.(이는 전년에 비해 11퍼센트 상승한 수치로 여러 라이벌 브랜드를 앞지른 것이었다.)칼이 패션계를 지배해온 자신의 지난 여정을 무심한 듯 이야기하고 성취를 다소 가볍게 여긴다 하더라도 그의 훈련 기간은 사실상 길고도 치밀했다. 발맹에서 3년을 보낸 후 그는 장 파투(Jean Patou)라는 역사적인 쿠튀리에 하우스로 거처를 옮긴다. “5년 동안 파투에서 옷을 어떻게 만드는지 정말 제대로 배웠어요.” 그가 말한다. “1920년대부터 활동한 재봉사들이 당시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제게 모든 걸 가르쳐주었거든요.”이 섬세한 기초공사를 바탕으로 그는 다른 패션 하우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한 경력을 거쳐(가장 잘 알려진 건 클로에다) 1965년 펜디의 컬래버레이션을 성공시킨 후 오늘날까지 그 인연을 지속하고 있다. 내가 가장 놀랍다고 생각한 건 수많은 디자이너가 뜨고 진 이 업계에서 단순히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럭셔리 브랜드 업계에서 갈대 같은 소비자들의 마음을 매번 사로잡는, 직관적인 감각을 겸비한 그만의 끊임없는 완벽주의가 그랬다. 이건 순수한 전문가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의 얘기다. 물론 그야말로 개인적인 삶이 일에 절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철저한 프로페셔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일은 그의 삶에서 그 어느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슈페트를 제외하고는 디자인, 스케치, 독서, 꿈꾸는 것들을 가장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는 내게 그의 성공은 처음에는 운명이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렸을 때 한 점쟁이가 제게 ‘자네의 이야기는 이상해. 다른 사람들이 멈출 때 시작하거든.’ 하고 말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어머니가 조롱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는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고 게으른 건 정말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전 다행히 그렇지는 않죠. 저는 일을 사랑해요. 그리고 잊지 않고 있어요. 이곳 샤넬, 그리고 LVMH(펜디를 소유하고 있다)라는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일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죠. 전 회의를 하지 않고요, 그 누구도 제게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저 제가 원하는 것들을 설명하면 그뿐이죠.” LVMH의 CEO인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과 그의 사이는 따뜻하고, 서로에게 고마워한다. 그는 샤넬의 오랜 오너인 베르트하이머(Wertheimers) 일가를 ‘가족’과 같다고 묘사한다. 일터에서는 긴밀한 유대관계로 맺어진 자신의 집단을 만들기도 했다. 샤넬의 패션 스튜디오 디렉터 버지니 비아르(Virginie Viard)는 그의 곁에서 30년 동안 있었고, 1996년부터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칼과 함께 일해온 아만다 할레치(Amanda Harlech), 20년 동안 그를 보살핀 개인 어시스턴트 세바스티앙 용도(Sebastien Jondeau), 그리고 주위의 많은 귀족 출신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래된 클래식(에밀리 디킨슨과 콜레트의 산문)은 물론이고 최근 발견한 방대한 책들과 홀로 보내는 시간을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어느 날 폴 발레리가 번역한 릴케 책을 찾았어요.” 그가 말한다. “저는 번역된 시를 인정하지 않는 편인데,이건 나쁘지 않았어요.”“시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시인이 필요하거든요.” 내가 거들었다.“맞아요.” 그가 대답한다. “특히 릴케처럼 훌륭한 작가의 작품은 더욱 그렇죠.”순간 나는 이것이야말로 디자이너로서 칼의 작업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샤넬의 언어에 있어서 그는 너무나 유창하지만, 그의 작업은 단순 번역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만의 시이기도 하다. 우리는 샤넬 여사보다도 샤넬에서 더 오래 일했다는 그의 커리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녀의 유산을 재해석하는 데 지난 35년을 보냈고, 반면 그녀의 커리어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1910년 자신의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1939년 쿠튀르 하우스의 문을 닫았으며, 1954년 다시 오픈했다.)“전쟁 동안 독일인과는 문제가 없었어요. 물론 제가 독일인이었지만.” 예상을 깨고 그가 말했다. “전쟁이 끝날 때를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몸소 겪은 건 아니었어요. 당시 덴마크 경계에 있는 시골 집에 살았었거든요.”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유로운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하면서, 독일계 유대인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지성인 헤드비히 돔(Hedwig Dohm)의 작품을 추천했다고 했다.그의 아버지도 히틀러 치하의 제3국에서 자신의 가족을 가능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살게 하고 싶어했다. 또한 어머니는 히틀러가 그저 못난 사람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어머니는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정말 못생겼다고 했어요. 그 외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어머니가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요제프 괴벨스의 아내인 마그다 괴벨스(Magda Goebbells)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에요. 신부 학교에 다닌 건데, 주말마다 베를린에 가는 게 허용되었다네요. 마그다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자인 첫 번째 남편 군터 퀀트(Gunther Quandt)를 기차에서 만났다고 했지요. 어머니는 그 어떤 것과도 엮이고 싶지 않아 했어요.”칼의 어린 시절 독일 이야기를 살짝 엿듣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대화법은 늘 그렇듯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이야기 형태를 취하길 거부하지만. 나는 지난 12월, 그의 출생지이기도 한 함부르크에서 그가 선보인 샤넬의 공방(M´etiers d’Art) 컬렉션의 우아함에 대해 내가 얼마나 존경심을 표하고 있는지 언급했다. 그가 선택한 배경은 향수를 자극하지만 동시에 매우 모던한 엘브필하모니(Elbphilharmonie). 헤르초크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의 건축 실험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콘서트 홀이다.“독일 사람들 몇몇은 컬렉션이 어머니를 향한 경외 같았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정작 함부르크를 싫어했어요.” 그가 말한다. “어머니와 이모는 어린 첫 번째 남편이 있었는데, 후에 나이 많은 남자와 재혼을 했지요. 아버지는 16살이나 많았고, 제 대부이기도 했던 이모부는 서른 살이나 많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멋진 분이었어요. 제 얼굴을 때린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모부는 매일 너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시에스타를 즐기셨는데, 한 시간 정도 자고 나서 산책을 나가시고는 했어요. 저는 휴일에 종종 이모와 이모부를 뵈러 가곤 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이모부를 따라 나서 프라일리그라트(Freiligrath)라는 거리에 다다랐을 때였어요. 당시 저는 10살이었는데 이모부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누가 프라일리그라트였죠?’ 이 말을 들은 그가 제 얼굴을 철썩 때리고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안 하지 뭐예요. 집 문을 여니까 어머니가 거기에 서 있었어요. 이모부가 우리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엘리자베스, 당신 아들은 당신처럼 무식하구만.’ 그건 그렇고 프라일리그라트가 누군지 아세요? 1848년 독일 혁명 때 가장 훌륭한 시인이었지요.”내가 몹시 놀라면서 아이는 그런 걸 모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지만 칼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이모부는 104년 동안 사셨어요. 그분의 형제는 106세, 103세, 그리고 이모부의 어머니는 102세까지 사셨어요. 그 사람들은 1850년 이전에 태어났어요. 이모부는 1868년에 태어나 1972년에 돌아가셨어요.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죠. 정말 완벽했어요.”굳이 언급할 필요 없이 칼은 그들보다 더 오래 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일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아직도 당신을 채찍질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물었다.“아마도.” 그가 대답한다. “그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어머니는 내게 말하곤 했지요. ‘넌 날 닮았어. 하지만 나만큼 괜찮지는 않아.’”“어머니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나요?”“네. 그녀는 자신이 완벽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제가 코 수술을 하길 바랐어요. 못생겼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머니는 남색의 푸른 눈에 머리 색은 짙은 검정색이었어요. 모든 독일인들은 블론드였는데 어머니만 검정색이었던 거죠. 그래서 어떨 땐 집시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그녀의 여자 형제는 블론드였고 제 누나도 약간 블론드예요. 저의 이복누나(아버지가 첫 결혼에서 얻은 딸)는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같이 자라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하지 못했어요. 그들이 보딩 스쿨을 다니기도 했고요. 이복누나는 결혼을 5번 했어요. 첫 번째 남편을 희미하게 기억하는데 멋있는 사람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기억을 거의 못하겠군요.”이복누나의 어머니는 그의 말에 따르면 젊은 나이에 출산 도중 사망했고 칼의 아버지는 80대 후반까지 살았다. “아버지는 아픈 적이 없었어요. 신문을 읽다가 돌아가셨죠.” 그가 잠깐 멈추었고 나는 이 틈을 타 혼령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떨지 물었다. “전 귀신을 좋아해요!” 그가 말했다. “위니베르시테 가에 살 때 프랑스혁명 도중 도망치려다가 사망한 여자 유령이 있었어요. 저는 실제로 본 적이 없었는데 어머니는 저희 집에 올 때마다 보셨죠. 또 다른 좋은 유령도 있었어요. 창문에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는 남자였어요. 스물세 명의 아이들이 있었어요. 때로는 아주 시크한 흰색 가발을 쓰고 있기도 했고요.”그렇다면 요즘 그는 이러한 유령들과 계속 살고 있을까? “지금처럼 이렇게 행복한 적이 없어요.” 그가 대답한다. “저는 슈페트랑 볼테르 부두에 살고 있어요.”“그럼 유령은 더 이상 없는 거예요?”“네, 없어요. 마당에는 앵그르가 마담 이네 무아테시에의 유명한 초상화를 그렸던 또다른 아틀리에가 있기는 해요.” 그는 아티스트가 1856년 완성했다는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폰을 검색했다. 그리고는 피카소가 앵그르를 매우 존경했다는 사실도, 특히나 그 그림을 칭송했다는 것도 설명해주었다. “이걸 보세요.” 그가 앵그르가 그린 마담 무아테시에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거울에 비쳐 있고 이 반사 기법은 피카소의 작업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칼은 자신의 작업을 예술과 비교하는 것은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았다. 코코 샤넬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패션이란 수명이 짧고, 영원한 스타일로 정제된다고 하더라도 미술관에 어울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내게 있어서 패션과 아트의 사이에서 겹쳐지는 풍경,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그 지점에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인다. 물론 이 생각에 그가 비웃음을 날릴지는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만의 탐구 안에서 스타일에 대한 그의 이해와 과거의 유산에 불어넣는 예술적인 활동이 오늘날 패션계의 지도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이야기를 하는 동안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지나갔고, 그사이 그의 어시스턴트 세바스티앙이 슈페트가 있는 볼테르 부두의 집으로 그를 바래다주기 위해 도착했다. 늘 그렇듯 칼은 내게 우리의 대화가 계속되면 좋겠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그건 정중한 예의의 표시이기도 하고, 내가 다음번에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하게끔 만드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만날 때까지” 그가 내 양 볼에 가볍게 키스를 건네며 말했다.“기다리고 있을게요.” 내가 대답했다. 이건 진짜다.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네는 와중에도 나는 이미 이 쿠튀르계의 거장이자 시크함의 슈발리에, 세상에서 오직 단 한 명인 칼 라거펠트와의 다음 만남을 고대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