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기울어져가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민화 중에서도 특히 꽃 그림이 유행했다. 집을 꾸미고, 부귀와 장수, 사랑과 행복을 소망하며 병풍, 벽장, 다락 등에 붙였던 긍정과 열정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들. 갤러리현대에서는 민화 중에서도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받았던 장르로서 현실과 이상세계를 넘나드는 꽃과 새의 이미지를 자유로운 구성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한 작품들을 <민화, 현대를 만나다: 조선시대 꽃그림> 전시에서 8월 19일까지 선보인다.
갤러리현대, 현대화랑, 두가헌갤러리를 수놓은 4첩부터 12첩 병풍에는 꽃들이 만개하고 쌍쌍의 동물들이 자아내는 사랑스러운 기운으로 터질 듯하다. 17~18세기에 그려진 화조도 8첩 병풍을 들여다본다. 병풍은 오른쪽을 제1폭으로 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어둠이 깃든 정원, 석류 익고 국화 피어난 가을 뜰에 백색 공작 한 쌍이 푸른빛 이끼가 꽃처럼 피어난 괴석 위에 포근하게 앉았다. 100년 전 선조들이 어여쁜 생명체들을 세심하게 데커레이션 해놓은 환상 정원은 3D보다 생생하고 판타지적이며 패셔너블하다. 이 그림들은 신화나 성경 이야기를 소재로 긴 서사의 행간을 함축하기 위해 도상을 활용한 중세의 서양화처럼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 아이콘들이다. 석류는 다산, 국화는 길상, 바위는 장수를 뜻하니 그림 속 새들처럼 사랑을 나누어 다산하고 행복하게 장수하라는 온갖 축복을 담은 것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사계절 꽃이 가득 핀 ‘화초병(花草屛)’, 그 안에 새와 작은 동물들이 노니는 ‘화초영모병(花草翎毛屛)’ 등 회화와 자수 60여 점은 많은 수가 개인 소장품이다. 그동안 민화가 국공립미술관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개인 소장품으로 전해온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본민예관을 설립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표구 디자인 개념을 잡고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족자봉을 만든 일본민예관의 ‘연화모란도’도 한 점 출품됐다. 조선시대 도자기와 공예품을 중심으로 민예운동을 벌였고, 1950년대 여러 글을 통해서 조선 민화에서 받은 감동과 불가사의한 아름다움을 세상에 널리 알린 무네요시는 ‘속화(俗畵)’라 불리던 채색화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가 가치 절하된 민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해주었지만 그 어감 때문에 아마추어가 그린 그림이라는 인식도 커졌다. 민화를 그린 이들에는 비전문가, 떠돌이 화공도 있었지만 도화서 화원이 돈벌이를 위해 몰래 그리거나 그들의 제자들이 그리기도 하였다.
저 하늘 상서로운 정기, 별이 되어 빛나고, 구름 되어 오르더니, 그 빛이 아래로 드리워져, 물체를 만나고 형태로 흘러들었네. 초목이 이를 얻어서, 붉은 꽃뿌리로 발하더니, 꽃뿌리가 매우 붉어, 모란으로 피어났도다.‐ 서원여, <전당문>에 나오는 시 ‘모란부’에서 인용
갤러리현대와 함께 이번 전시를 기획안 정병모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는 “민화에는 상징, 추상, 조형 등 모든 언어가 들어 있다. 민화가 더 이상 옛 그림이 아닌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화에선 도상이 중요하므로 정형화될 수밖에 없는 장르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20세기 초 그려진 ‘낙도’라는 작품에선 민화에서 가장 낯익은 소재인 까치 호랑이가 놀랍도록 창의적인 변형으로 나타나 있고, 일본에 소장된 민화 화조화 가운데 명품으로 손꼽히는 19세기 화조도에선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질박한 표현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현대회화라 해도 좋을 만큼 추상적이다. 정 교수는 “민화 꽃그림에는 패턴의 조형적 언어가 가득하다”며 “150년 전 개발돼 아직까지도 영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윌리엄 모리스의 꽃 패턴 디자인처럼,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는 우리식 꽃 패턴 디자인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갤러리현대 1층에 소개한 화훼도들은 그대로 서머 드레스로 만들어 입고 싶을 정도로 웨어러블한 패턴이었다.
이번 전시와 더불어 갤러리현대에서는 예술의전당과 공동 주최로 7월 18일부터 한 달간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민화의 대표적 컬렉터인 김세종의 소장 민화를 선보이는 전시 <조선민화걸작전: 내일을 그리다>를 마련한다. 두 전시는 갤러리현대와 예술의전당 공동 주최로 2016년 개최된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전-문자도·책거리> 전시에 이어 두 번째로 기획된 대규모 민화 기획전이다. 2016년 전시는 캔자스대학교 스펜서미술관, 클리블랜드 미술관 등에서 성황리에 미국 순회전을 이어갔다. 이번에는 ‘오색구름인 양 색색으로 뭉실뭉실 달처럼 해처럼 커다랗게 환하게’ 모란이 그려진 모란 병풍이 해외 미술관들에서 휘황하게 존재감을 드러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