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이 후원하는 프랑스 작가 릴리 레이노 드와가 한국에 왔다. 텍스트, 비디오, 그래픽, 설치, 퍼포먼스 등 드넓은 스펙트럼으로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다. 가녀린 체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예상하기 어려울 만큼 강단 있는 작품들을 선보여와서인지, 전시 오프닝에는 바톨로뮤 마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 등 바쁜 걸음을 한 인사들도 있었다.
이번 컬렉션의 주축은 80분에 이르는 영상 작업, <미니멀리즘이 남긴 것, 그 너머(Beyond the Land of Minimal Possessions)>(2018)이다. 영화의 장르를 분류하자면 뜻밖에도 ‘호러’다. 대학에서 예술을 가르치는 작가의 실제 학생 일곱 명이 주인공이 되어, 예술 활동의 의미를 찾으려 분투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연기한다. 실제 텍사스 마르파(Marfa)의 사막으로 초청된 저명한 예술가와 큐레이터, 미술사학자 등이 세미나를 진행한다. 황량한 벌판에 둘러앉아 여남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도 던진다. 예술작품과 화이트 큐브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이들의 이야기는 천연 자원과 문명의 관계, 퍼포먼스와 초기 미니멀리즘의 관계, 실험적인 형식의 예술 잡지, 예술과 검열 문제 등 예술과 사회, 자본이 뒤얽힌 다양한 쟁점들로 확장된다. 미니멀리즘의 메카, 도널드 저드의 웅대한 레거시라 해도 무방한 마르파 사막 한가운데. 이 특별한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일곱 명의 예술가들은 똑같은 악몽에 시달린다. 이상한 옷을 입고 사악한 영에 홀린 듯 섬뜩한 춤을 추거나, 알 수 없는 의식을 행하며 들판을 헤매기도 한다. 일행 모두가 악령에 홀린 좀비가 되어버리는 영화의 결말은 무얼 의미할까. 미니멀리즘이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유무형의 유산은 과연 뭘까.
주말엔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지하 1층, 아뜰리에 에르메스에 들러보자. 붉디붉은 전시장 한가운데 예술과 사색이 맥박 치고 있다.
이름이 독특하다. 본명인가? 본명은 오필리 레이노다. 스물두 살 때 한 친구가 ‘릴리’라 부른 이래 쭉 릴리다. ‘드와’는 전남편 이름이다. 이혼하면서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 그렇게 ‘릴리 레이노-드와’가 됐다. 이름은 내 은연한 인생.
이번 영상작품에서도 어김없이 춤을 춘다. 행위로, 몸짓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퍼포먼스는 영상이나 회화, 설치와 무엇이 다른가? 행위로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이다, 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게 비디오인가 그림인가 퍼포먼스인가 분류하는 것도 내 관심 밖이다. 말하자면 나는 모호함이 좋다. 예술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걸까”, 하고 스스로로 하여금 질문케 하기 때문이다. 내가 작품에 다양한 매체를 혼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각, 설치, 그래픽, 일상적 사물이나 가구들 등. 그래서 나는 뭘 어떻게 써볼까, 이건 뭘까, 하며 망설이는 시간들이 좋다. 예술을 아카데믹한 잣대로 카테고라이즈하는 접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법과 발레를 전공한 것이 현재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치나? 아주 그렇다. 일반법(Public Law)을 공부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공간의 범주에서 무엇이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허용될지 고민했다. 공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의 차이. 오늘 내 작품들도 그런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몸에 익은 발레 동작과 자세가 행위로 표현을 할 때 응용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중요한 건 내가 법과 발레라는 배경을 내 작품에 직접적으로 활용하고자 의도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뒤돌아본 뒤 알았다. 무의식 중에 과거가 영감이 되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