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부산시립미술관 별관인 ‘이우환 공간’으로 향했다. 일본 나오시마에 있는 이우환 미술관을 안도 다다오가 설계했다면, 201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관한 이우환 공간은 작가가 직접 건축 설계부터 내부 공간까지 디자인에 참여했다. 안과 밖, 1층과 2층 공간에서 조각작품부터 회화작품까지,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15년까지의 이우환 작품 2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은 그 가치에 비해 덜 알려졌다. 한 달 전 워너원 팬들이 ‘오빠’ 이름을 새겨 넣었던 야외 조각작품 ‘관계항-길 모퉁이’는 복원됐다. 이우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은 공간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보자. “각 방은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연출하는 장으로서의 무대가 되어 관객을 맞습니다. 공간이 단순히 미술품을 전시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울림을 주는 하나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공간과 있는 그대로 제시된 사물들의 만남이 어떻게 긴장을 형성하고 울림을 주는지를 그야말로 온몸으로 느낀 시간이었다. 2층 마지막 방, 덩그러니 놓인 돌을 마주한 캔버스는 점도 선도 없이 비어 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와 공간을 채운다. 어릴 적 성당 지하 명상실에서 기도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우환 작가는 내게 초월의 세계로 통하는 순간을 권하고 있었다.
개관 20주년을 맞은 부산시립미술관은 지역 미술의 정체성을 조명하는 특별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부산을 대륙침략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갖춘 근대도시로 만들어갔다. 당시 부산 사람들에게 일본을 거쳐 유입된 철도와 백화점, 미술 전람회 등 근대문화는 낯설었지만,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다. 특별전 1부 <모던혼성 1928-1938>은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거나 방문하면서 미술 활동을 한 일본인 미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해 그들의 눈을 통해 본 당시 부산을 조명한다. 2부 <피란수도 부산_절망 속에 핀 꽃>은 한국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서 활발히 일어난 현상을 탐색한다. 박수근, 천경자,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등 이때 부산에 내려와 활동한 한국 근대미술의 선구자들이 부산의 주요 작가였던 김종식, 송혜수 등과 함께 전쟁 중에 역설적으로 부산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의 르네상스를 꽃피웠음을 보여준다. 7월 29일까지 계속되는 2부작 전시는 부산의 아트 신에 대한 외지인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당신이 단 하루 만에 부산의 아트 신을 섭렵하고 싶다면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급부상한 해운대 지역이 제격이다. 부산시립미술관 건너편에 중요한 아트 이벤트가 열리는 벡스코 전시장이 있고,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복합문화공간 F1963, 지역 갤러리인 아트 소향과 소울아트스페이스 모두 지척에 있다.
애초에 부산을 찾은 이유는 지난 4월 19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벡스코 제1전시장에 열린 ‘아트 부산’을 보기 위함이었다. 한 달 전 홍콩에서 열린 아트 바젤의 성공 요인으로 각 페어가 열리는 도시의 선정을 들 수 있다. 권위 있는 오리지널 페어인 바젤, 한겨울에 짜릿한 예술적 체험을 선사하는 마이애미, 집약적인 발전을 이룬 홍콩, 전혀 다른 세 도시가 아트 바젤을 가장 매력적인 브랜드로 만들어주었다. 아트 부산 역시 특별한 해양도시에서 열린다는 걸 효과적으로 어필하며 올해 6만 명이 넘는 역대 최다 관람객을 모았다. 서울에서 대각선으로 400km 떨어진 부산의 ‘로컬리티’는 부스 사이사이 넘실댔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조현화랑 부스에 걸린 김종학 화백의 가로 3m, 세로 2m40cm의 강렬한 회화작품에 눈길이 쏠렸다. “6월에 프랑스 최대 아시아 미술관인 기메뮤지엄에서 전시를 앞두고 계세요. 선생님께서 1937년생이신데, 이렇게 천진하고 기운찬 작품을 2018년 작으로 소개할 수 있어 너무나 기쁩니다.” 주민영 디렉터의 감동 어린 미소에서 기쁨이 전해졌다. 조현화랑이 부산을 대표하는 갤러리라면 안 페롯(Ahn_Perrot)은 올해로 4년째 아트 부산에서 만날 수 있는 갤러리다. 사진작가이자 갤러리 대표인 안선미는 파리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이자 남편이기도 한 탱크의 작품 여덟 점을 갖고 와 페어 이틀째에 한 점을 제외하고 모두 판매한 수완 좋은 갤러리스트다. “저랑 남편 모두 20여 년 가까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수동적으로 갤러리에서 우리를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직접 우리의 작품을 알리고 판매하면 어떨까? 몇 년 전에 시험 삼아 파리의 한 아트 페어에 참가하게 되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매년 부스를 세우고 있죠.” “왜 아트 부산을 선택했나요?” “제 고향이니까요. 일 년에 한 번씩 집에도 올 겸.” 그녀가 시원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번 아트 부산은 퀄리티 컨트롤에 집중한 것 같아요. 적절한 수의 선별된 갤러리들을 모아놓아 관객들이 과식한 느낌 없이 즐겁게 보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박여숙 화랑 박여숙 대표
페어장 중앙에서 해외의 비엔날레나 전시에서 만날 때 유독 반가운 최정화 작가의 작품이 기운생동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관람객을 맞고 있던 박여숙 화랑의 박여숙 대표와 인사를 나눴다. “이번 아트 부산은 퀄리티 컨트롤에 집중한 것 같아요. 적절한 수의 선별된 갤러리들을 모아놓아 관객들이 과식한 느낌 없이 즐겁게 보고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여숙 화랑처럼 서울에서도 많은 갤러리가 내려왔다. 국제 갤러리는 지난 2017년 10월호 <바자 아트>와 함께 한 포트레이트 프로젝트에서 탄생한 작품들을 출품했다. 문성식 작가가 회화적 대상이 된 다섯 배우(윤여정, 임수정, 김옥빈, 천우희, 정은채)를 관찰하고 이해한 경험을 통해 그려낸 초상화 작품들을 소개한 것. 페어 이튿날 이 가운데 윤여정의 초상화는 이미 누군가의 컬렉션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아트 바젤 홍콩의 전신인 아트 홍콩의 설립자 팀 에첼스가 만든 아트 센트럴은 젊고 실험적인 예술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출범돼 홍콩 아트 위크를 풍성하게 했다. 아트 센트럴에 참가했던 아틀리에 아키는 당시 많은 컬렉터들의 관심을 끈 강예신 작가의 책장 시리즈를 아트 부산에서 선보였다. 아트 센트럴의 스폰서인 UOB 그룹의 체어맨, 세계적인 미술재단인 보고시안 파운데이션의 쟝 보고시안 회장 등 유수의 컬렉터들에게 소장된 강예신 작가의 작품은 부산에서도 큰 관심을 받았다. 스튜디오 콘크리트는 2016년 이후 두 번째로 참가했다. 회화와 드로잉에서 자신만의 인장이 뚜렷한 권철화, 건축 사진작가 김재훈, 같은 시기 한남동 스튜디오 콘크리트에서 전시 중인 조엔 코넬라의 작품을 선보였다. 판매보다는 작가들을 알리는 데 역점을 두고 아트 부산에 참가한 그들은 맛집 탐험에도 열심이었다.
아트 부산 역시 다른 많은 아트 페어처럼 단순한 아트 마켓을 넘어 의미 있는 관람의 체험을 선사하기 위해 다채로운 기획 전시와 컨버세이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드넓은 벡스코 광장을 전시장으로 활용해 조각가 박은선의 대리석 작품으로 관객을 맞이하고, 한중일 작가들의 미디어 특별전을 위해 큰 공간을 할애하였으며, 부산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창작 레지던시 공간 홍티아트센터 입주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그룹전 <아트 악센트>를 마련한 것. 특히 한중일 미디어아트 특별전에 출품된 일본 작가 오마키 신지의 미디어 설치작품 ‘중력과 은총’은 숨 죽이며 바라보는 관객들로 인산인해였다. 7m에 달하는 거대한 호리병 같은 작품 표면에 인류의 진화 과정과 각종 동식물을 투조 방식으로 새겨놓아 그 안에서 태양을 상징하는 조명이 오르내릴 때마다 인류의 시원을 연상케 하는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 앞에서 데이비드 즈워너 홍콩의 디렉터 제니퍼 염을 만났다. 아트 바젤 홍콩은 “더 이상 스위스 바젤을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평가 속에 막을 내렸고, 그 눈부신 도약에는 아트 바젤 시즌에 맞춰 개관한 데이비드 즈워너 같은 국제적인 갤러리의 역할도 컸다. “아트 페어의 역할이란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게 하는 것입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채로운 아트를 접하며 토론할 기회를 선사하죠. 아트 페어에 와서 현대미술에 대한 흥미를 끌어올리는 모멘텀을 경험한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서도 그 흥미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집니다. 현대미술과 갤러리 시스템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아트 부산과 같은 페어가 중요할 수밖에 없죠.”
아트 소향과 소울아트스페이스는 페어장에 부스를 마련한 것은 물론 이 기간에 맞춰 해운대구에 위치한 본 전시 공간에서 야심 찬 기획 전시를 선보여 아트 위크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4월 20일 오전, 아트 소향을 찾았을 때 오유경, 홍범 작가의 2인전 <마술환등>을 기념해 아트 부산 VIP를 위한 아티스트 토크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르테 포베라 운동의 중심인물인 주세페 페노네를 사사한 오유경 작가가 마술적인 환상을 보여주는 자신의 작업에 숨겨진 에너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었다. “부산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두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부산에서는 좀처럼 드문 설치 전시를 선보이게 되어 저에게도 매우 뜻깊습니다. 아트 부산을 통해서 많은 분이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만났으면 좋겠어요.” 박세란 큐레이터가 따뜻한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지척에 위치한 소울아트스페이스에서는 427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평화의 집에 두 점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개인전
2014년 부산 비엔날레 특별전시장으로 사용된 것을 계기로 2016년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F1963은 현재 부산의 문화적 감도를 대변하는 대표적 공간이다. 와이어 공장을 개조한 F1963에는 테라로사 카페와 전시 공간 석천홀, 예스24 서점, 복순도가 레스토랑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 6월 24일까지 석천홀에서는 단순하고 명료한 그래픽 양식으로 환원된 이미지를 회화, 조각,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로 보여주는 줄리언 오피의 개인전이 계속된다. 작가는 F1963을 방문하고 받는 영감을 토대로 작품을 구성하고 전개했다. ‘물리적인 탐색’을 통해 관람자가 스스로의 위치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중세 마을’ 조각이 챕터 역할을 하고, 오피의 대표작인 걷기와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형상을 담은 페인팅과 미디어 아트 작품, 인간의 얼굴을 주제로 한 초상화와 3D 조형물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가 전시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 거리에까지 뻗어나가길 바라는 작가의 바람처럼 석천홀 입구와 대나무 숲에 설치된 미디어 아트 작품부터 서울-부산 KTX 열차에서 본 풍경을 담아낸 배너 작품 등 공간과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조율된 전시였다.
떠오르는 해운대 쪽을 떠나 전통적으로 갤러리 밀집 지역이었던 달맞이고개로 차를 돌렸다. 부산에오면 나는 언제나 조현화랑을 찾는다. 가로로 긴 조현화랑 창밖으로 바라볼 때 부산 바다는 가장 고요하고 다정하다. 올해로 29년 된 조현화랑에서는 국내외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전시들을 선보여왔다. 이번에는 1990년대 떠오른 프랑스 신구상주의를 대표하는 필립 코네의 신작 20여 점을 소개한다. 밀랍화 기법으로 그린 작품을 실제로 보니 제작 과정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선한 눈웃음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필립 코네가 말했다. “벌집에서 채취한 밀랍과 안료를 섞어서 그림을 그린 후에 두꺼운 플라스틱을 덮고 다림질을 합니다. 그러면 어떤 부분은 약간 지워지기도 하고 뭉개지기도 하죠. 일그러지고 소멸해가는 시간성을 표현하는 저만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 부분을 스스로 재구성하고 복원시켜 그림을 바라본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발전시킨 테마 중 ‘군중’과 ‘탑’은 서사적으로 연결된다. 극심한 밀도의 군중 그림은 ‘지옥철’의 압력을 전해주고 바벨탑이 연상되는 탑 그림은 터져버릴 듯한 도시에 관한 은유로 읽힌다. “군중이 타워에 들어간다는 상상을 했습니다. 어릴 적 아프리카 베냉에 살 때 타워처럼 생긴 개미집을 형이랑 발로 차 무너뜨리고 놀았습니다. 순간 개미들이 쫙 퍼지는 그 모습이 마치 도시에 몰려 살아가는 우리를 떠올리게 하더군요.”
3년 후 기장에는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국내 최초로 설계하는 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올해 6월에는 을숙도에 부산현대미술관이 문을 연다. 가을이 되면 부산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로 한창일 것이다.
3년 후 기장에는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국내 최초로 설계하는 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조현화랑이 운영하는 기장 미술관(가칭)은 겐고의 건축 철학을 고스란히 담아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모습으로 관객을 맞을 것이다. 그보다 앞서 올해 6월에는 을숙도에 부산현대미술관이 문을 연다. 개관전의 핵심 전시는 <수직정원>. 프랑스의 세계적 조경학자이자 아티스트인 패트릭 블랑과 함께 건물 외벽에 구조물을 설치한 후 식물을 심는 방식으로 전시가 이뤄진다. 그로부터 3개월 후엔 설계 당시 부산비엔날레 전용관으로 기획된 만큼 부산현대미술관은 비엔날레로 한창일 것이다. 아트를 찾아 부산으로 떠날 일이 많은 한 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