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가장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미드를 꼽으라 하면 나는 여전히 <섹스 앤 더 시티>를 떠올린다. 혼자 있을 때 적막함을 견디기 힘들 때면 습관적으로 <섹스 앤 더 시티> 시리즈를 틀어놓곤 하는데, 좀처럼 질리지가 않는다. 비슷한 직종의 30대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는 재미와 더불어 1990년대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리고 사라 제시카 파커가 맡은 극 중 ‘캐리 브래드쇼’의 스타일에서 현재를 발견하고 비교하며 매번 신선한 재미를 느낀다.
최근 인상 깊게 다가온 장면은 <시즌 1>에서 캐리와 썸을 타던 ‘미스터 빅’과의 첫 데이트 신이다. 30대 커리어우먼의 당당함과 세련된 패션 감각으로 그를 유혹하기로 작정한 캐리의 선택은 누드 톤의 슬립 드레스다.(2018 S/S 시즌 드리스 반 노튼 컬렉션의 슬립 드레스와 무척 닮아 있는.) 빅은 캐리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지며 “Interesting Dress.”라고 낮게 읊조렸는데, 이는 ‘스타일리시하다’와 ‘섹슈얼하다’는 의미를 함축한 표현일 것이라 추측해본다.(극의 흐름상 후자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지만.)
오래전부터 관능적이면서 세련된 스타일을 대변해온 슬립 드레스는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손길을 거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슬립 드레스를 스팽글 장식으로 촘촘하게 수놓거나 크리스털과 레이스로 화려함을 극대화하는 등 그 디자인도 다양하다.
하지만 나는 1990년대 초반 캘빈 클라인과 프라다를 연상시키는 모던한 슬립 드레스에 더 마음이 간다. 더 로의 군더더기 없이 재단된 롱 슬립 드레스, 드리스 반 노튼의 살굿빛 슬립 드레스, 그리고 가슴에 비대칭으로 주름을 잡은 자크뮈스의 모던한 슬립 드레스 등. 컬러와 장식뿐만 아니라 최대한 절제한 스타일링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1990년대의 케이트 모스나 기네스 팰트로가 아니기 때문에 스타일링에 있어서 조금 디테일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백화점과 인터넷 직구 사이트를 통해 입고 싶은(입을 수 있는) 슬립 드레스를 찾아 나섰다. 팔과 다리 둘 다 드러내는 게 불편해 그나마 자신 있는 한 부분을 선택했다. 그 결과 고른 건 발목을 덮는 조셉의 롱 슬립 드레스다.
일반적으로 롱 드레스는 작은 키를 부각시킨다는 편견이 있지만 오히려 어중간한 길이보다 비율이 좋아 보인다. 단독으로 입어도 좋겠지만 하얀 탱크톱이나 면 티셔츠와 레이어드하고 싶다.
알렉산더 왕 런웨이를 참고해도 좋은데, 마치 슬립 드레스를 티셔츠와 레이어드한 것처럼 아예 붙여버렸다.(베이식한 티셔츠와의 레이어드는 가장 실패할 확률이 적은 스타일링.) 긴 드레스에 높은 힐은 금물! 1990년대 소피아 코폴라처럼 플랫한 가죽 샌들이나 통, 스니커즈를 매치하는 게 쿨해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매치스패션 사이트에서 발견한 아락스의 슬립 드레스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가 입었던 드레스와 무척 유사한 이 슬립 드레스는 란제리나 다름없지만, 안에 티셔츠를 겹쳐 입거나 위에 얇은 셔츠 한 장을 걸친다면 일상에서 충분히 소화 가능하다. 슈즈는 날렵한 디자인이 좋은데, 스파게티 면 같은 어깨 끈처럼 얇은 스트랩이 달린 앵클 샌들이나 뮬을 신으면 좋을 듯. 이번 시즌 유행인 데다 다리가 길어 보이도록 착시 효과를 주는 투명한 PVC 샌들도 좋겠다.
슬립 드레스 특유의 밋밋함을 볼드한 액세서리나 드레시한 하이힐로 채우려 들면 안 된다. 커다란 패드가 덧대진 브래지어도 마찬가지. 반대로 볼륨감 넘치는 몸매 때문에 꺼려진다면 한 사이즈 큰 드레스를 선택할 것. 슬립 드레스는 몸을 죄지 않고 어깨부터 헴라인까지 직선으로 떨어질 때 비로소 입는 보람이 있는 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