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무에게 미안하지 않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열무 대소동 나는 열무에게 미안하지 않다... | 열무

열무 대소동나는 열무에게 미안하지 않다. 열무가 ‘어린 무’ ‘여린 무’ 같은 애처로운 말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걸 백과사전을 통해 오늘 처음 알았으나 여전히 미안하지 않다. 네가 좋아 네가 맛있어, 대놓고 면전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서도 숨길 이유 또한 모른다. 도리어 나는 열무에 관해 말할 때 다분히 과격해지는 편이다. “엄마, 이맘때쯤 열무 쥐어뜯어다가 쓱쓱 밥에 비벼서 와그작와그작 씹는 건데, 그렇지?” 엄마는 열무를 안다. 아주 잘 안다. 충청도 청양이 고향인 엄마의 입맛은 어려서 먹어본 음식으로부터 규정되었고, 어려서 먹어본 음식에 관해서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솜씨를 갖췄다. “그럴 때지. 보리밥 지어다 비벼 먹으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넘어가지. 엄마 처녀 때도 그렇게 많이 먹었으니까.” 그때가 양력으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다. 달력에 미리 체크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다만 어느 날인가가 되면, 열무 넣고 비빌 때가 되었군 생각나는 것이다. 공기 중에 무슨 신호라도 있나?  냄새가 난다. 열무는 어디에나 있다.엄마는 열무김치에 관한 한 누구도 아무 소리 못하게 만든다. 당신이 최고고, 과연 내가 먹어본 최고의 열무김치이자 열무김치의 표본이다. 물기를 꼭 짠 것부터, 그 물에 밥이나 국수를 말아도 될 만큼 흥건하게 담은 것까지. “엄마는 열무김치 담을 때 밀가루풀을 쒀서 넣어. 찹쌀 아니고 그냥 밀가루풀이 좋아. 너도 먹어봐서 알겠지만 열무가 좀 억센 데가 있잖아. 풀을 넣으면 그게 부드러워지지. 그런데 또 설탕을 넣으면 안 돼. 설탕을 넣으면 미끌미끌하니 물러서 좋지가 않아. 엄마는 뉴 슈가를 ‘째끔’ 넣어. 동네 아줌마들도 다 뉴 슈가를 쓴다더라. 그런데 이런 건 왜 물어보셔, 아드님. 이제는 열무김치까지 직접 담아보시게?” 엄마의 얘기를 들으면서 여름 냉장고에 열무김치가 가득 담긴 통들이 떠올랐다. 대청마루보다 시원한 풍경. 그 비주얼에 어울리는 한 쌍이라면 주먹보다 큰 복숭아들이겠지.열무는 언제나 싱싱한 맛을 낸다. 배추처럼 곰삭아 촘촘하게 스민 맛을 낼 줄은 모른다. 몇 번을 먹든 한 번에 시원하게 먹어치우는 게 열무다. 나는 열무 중에서도 특히 어린 열무를 보면 반하는데, 그걸 루콜라 대신 쓰는 것도 좋아한다. 그러니까 루콜라가 들어가야 할 모든 자리에 여린 열무를 대신 넣는 것이다. 익을 대로 익어서는 칼을 대자마자 단물이 줄줄 흐르는 멜론에 붉은 프로슈토를 담요처럼 덮고, 선반에서 가장 비싼 올리브유를 골라 뿌리고, 열무를 한 줄기 얹어 모두 함께 포크로 찌른다. 포크는 아주 큰 게 좋겠다. 말하자면 폭군 스타일. 열무는 여리되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그걸 입에 넣고 씹을 때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나는 열무를 해치운다. 고기도 그렇게 씹지는 않을 텐데 열무는 엄청나게 씹는다.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