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평론을 찾아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쉽고 얕고 짧고 가볍게’가 대세인 시대, 평론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 평론

해가는 회사의 특징은 회의가 많다는 것이다. 2005년, 내가 일하던 영화 잡지 도 그랬다. 한때 몇 만을 헤아리던 독자 수는 0 한 개가 떨어져나갔다. 패션지처럼 일반인이 제작할 수 없는 수준 높은 화보가 주력인 것도 아니고, 저소득-저비용의 악순환에 빠져 텍스트만 붙들고 있는 문화지는 인터넷과 개인 미디어로 손쉽게 대체되었다. 영화사들도 눈치를 채고 더 이상 잡지 광고를 하지 않았다. 매일 결론 없는 회의를 하던 어느 날 이런 의문이 들었다. “아직 남은 독자들은 뭘까요? 그들이야말로 정말 영화와 잡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더 많은 독자를 끌어들이자고 고민하기 전에 그 소수를 위한 진짜 마니악한 잡지를 만들고, 그만큼만 팔아도 먹고살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는 없나요?” 물론 그것은 중대형 출판사 소속 상업 매체로서는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얼마 못 가 나는 영화 잡지를 떠났고, 많은 업계 동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망한 영화지의 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살아남은 몇몇 영화지도 어렵다는 걸 보니 거기로 간 것 같진 않다. 무엇보다 궁금한 건 문화적 자긍심에 가득 차서 를 탐독하던 시네필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는 점이다. 그들도 이제는 팟캐스트와 카드 뉴스와 유튜브로 파편화된 영화 정보를 얻으며 만족하고 있을까? 요즘은 모두가 영화 전문가를 자처한다. 나는 인터넷 불법 파일과 VOD로 하루에 서너 편씩 영화를 보고 이따금 기사를 읽어서 한국 영화시장의 독과점 문제를 얄팍하게 안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이 산업 관계자나 된 양 뻐기는 방구석 전문가들을 신물 나게 많이 만났다. 반면 한 편의 영화와 깊이 사랑에 빠져 그것이 내포한 다양한 의미망을 분석하고, 기술적 비밀을 파헤치고, 진지한 담론에 몰두하고, 시장에서 소외된 영화들을 발굴하여 그 존재가치를 변론하는 진정한 의미의 비평과 그것을 향유함으로써 얻는 지적 희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미디어 전문가들은 대중이 더 이상 길고 진지한 글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살아남으려면 종이 잡지를 버리고, 글도 버리고, 엄숙주의도 버리고, 동영상과 SNS에 집중하며 한두 줄짜리 잽 같은 문장과 독특한 비주얼로 승부하거나, 트렌드 리포트처럼 실질적으로 돈이 되는 정보를 다루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영화 미디어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지식인을 불신하는 수준을 떠나 미워하고 혐오하는 대중의 반지성주의와도 싸워야 한다. 나는 언젠가 포털 사이트에서 신작을 촌평하고 별점을 매기는 필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매주 리뷰 페이지가 열리는 날이면 부리나케 달려와서 지치지도 않고 똑같은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요지는 “도대체 평론가 나부랭이가 왜 필요하냐. 어려운 말로 잘난 체나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을 가진 평론가 따위 신뢰할 수 없으니 꺼지라.”는 거다. 그런 댓글을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근데요, 저 평론가 아닌데요.’였다. 가이드와 저널리즘과 크리틱의 차이도 모르고, 그것을 어떻게 소비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영화 팬을 자처할 수 있는, 그런 시대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보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남았으니, 그렇게 싫다면서 굳이 포털 한구석에 숨어 찾기도 힘든 게시판을 들락거리는 심리가 뭐냐는 거다. 어쩌면 이들도 사실은 영화에 대해 함께 떠들고 싶어서, 더 긴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끔 했다. 영화란 그런 거니까.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그것을 통해 자신을 고백하고 싶은 충동을 주는. 그러기에 더더욱 비평이 소생할 여지도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새로 창간한 영화비평지 는 우선 한 가지 의문에 답을 주었다. 를 읽던 시네필들은 증발하거나 멸종한 게 아니었다. 텀블벅 이벤트에 후원자 1782명이 참여했고, 목표액의 490%인 7천만원 남짓이 모였다. 기존에도 크라우드 펀딩으로 탄생한 비평지가 있긴 했지만 이번엔 이른바 ‘네임드’들이 벌인 일이고, 의 정체성을 잇는다는 점에서 주목도가 높았다. 한국 시네필 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정성일, 전 편집장 허문영, 평론가 남다은, 정한석, 이후경이 고정 필진이다. 창간호가 다룬 영화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폴 토머스 앤더슨의 , 짐 자무시의 , 사프디 형제의 , 왕빙의 등이다. 그 밖에 여러 고전 영화들이 언급된다. 상업 영화지처럼 의례적 개봉작 소개나 특집 기사 없이 비평에 집중하겠다는 의도가 선명하다. 텀블벅에 올라온 후원자들의 인사는 이 잡지의 존재 의미를 잘 드러낸다. “예전에 와 의 광팬이었는데 다시 영화비평 잡지가 발간된다니 너무 기쁘네요.” “영화 평론과 담론이 고리타분한 말이 되고, 출력된 활자를 읽는 행위가 어색해진 시대가 되었더라도, 여전히 저는 일 년에 한 번쯤은 가 재창간되는 꿈을 실제로 꿨습니다.” 이런 말도 있었다.“가 있던 세대가 늘 부러웠습니다. 이런 잡지 정말 기다렸어요.”한때 망한 잡지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그런 이들의 숫자가 1782명이라는 게 또 의미심장하다. 종이 잡지와 영화와 긴 텍스트의 교집합을 원하는 사람들, 그중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들의 수가 그 정도인 것이다. 문지시인선의 초판 발행부수와도 비슷하다. 에세이를 전문으로 출판하는 어느 편집자는 그랬다. “중쇄 찍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지만 ‘저런 책 누가 사지?’ 한 것도 나중에 보면 천 권은 팔렸더라고요. 세상에는 모든 에세이를 수집하는 천 명의 독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농담도 해요.” 대자본이 문화 다양성을 말살한다고들 하지만 너무 비좁아서 그들의 발이 미치지 않는 틈새에 무언가 다른 씨앗을 심을 땅은 남아 있다. 그 틈새를 1천~2천 명이라 치자. 정말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창작자들이라면 시장 상황을 불평하기 전에 그 수요에 몸집을 맞추면 되는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 가지 방법으로 ‘첫째,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것, 둘째, 영화에 대해 쓰는 것, 셋째, 영화를 만드는 것’을 들었다. 아직도 영화에 대해 쓰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는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독자로서도 가 반갑다. 이건 좀 웃긴 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다종다양한 영화지가 나와 인문소매점 역할을 하거나 트렌디한 서구 대중문화를 소개하는 유일한 창구로 기능하거나 유흥을 제공하던 짧은 시기에 청춘을 보냈지만 시네필도 아니고 를 읽지도 않았다. 비평가들의 엄숙주의를 비아냥대며 할리우드 팝콘 영화의 효용을 진지하게 변론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런 관객이었다. 어딘가 멋들어지게 들리는 제3세계 사람들의 이름이나 심각한 영화에 대한 심각한 담론, 번역투 장문이 바글바글한 가 나의 지적 소양에 기여한 바가 있다면 “영화에 관해 내가 뭘 안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다”라는 겸손함을 가르쳐준 정도다. 그런데 이제는 가 그립고 가 반갑다. 평론이 죽었다고 말하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작가주의를 수호하고 영화의 의미와 윤리를 따져묻고 세 시간짜리 롱테이크를 졸지도 않고 보는가 하면 읽을 엄두도 안 나는 긴 글을 써내는 미친 인간들이 세상 어딘가에서는 밥을 먹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쉽고 가벼운 것으로 가득한 세상에 누군가는 무게중심을 잡아주기를, 그래서 가끔 얄팍하고 의미 없는 말들에 지칠 때 가서 쉴 수 있으면 좋겠다. 는 이제 창간호가 나왔고, 격월간으로 5번 더 발행될 예정이다. 그 다음은 알 수 없다. 일단 창간호를 받아든 독자가 텀블벅 게시판에 쓴 글을 옮긴다. “재밌게 읽고 열심히 보고 치열하게 생각할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