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근을 사랑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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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근을 사랑해

어떤 채소가 좋아지는 이유, 그것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시선, 천천히 다듬고 잘라서 요리해 먹는 일. 한 가지 채소를 편애한다는 건 자신만의 소우주를 발견하는 일이다.

BAZAAR BY BAZAAR 2018.05.20

뿌리채소, 그중에서도 연근을 좋아한다. 연근을 좋아한다고 에세이까지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 기회에 오랜 애호를 고백해본다. 메뉴를 살피다 연근이 들어 있으면 더 고민 없이 고르게 될 정도다. 우엉도 마도 좋아하지만 역시 연근이 최고다. 과하지 않은 향과 부드럽지도 아삭하지도 않은 절묘한 식감이 근사하다고 생각한다. 모양이 예쁜 것도 좋지만, 손질이 쉬운 점 역시 호감 포인트다. 냉이나 콩나물을 손질할 때면, 아무리 맛있다 해도 손질하다가 지쳐버리곤 하는데 연근은 감자 칼로 슥슥 깎은 후 씻어 소금물이나 식초물에 아린 맛을 빼면 끝이다. 간단하지만 건강하게 먹고 싶은 날 손이 가는 채소랄까.

최근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연근 요리는 혜화동 노바 키친에서 먹은 ‘연근 함바그’였다. 채식 식당이니 채소가 맛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백미였다. 얼마나 맛있었느냐면, 혜화동으로 이사를 고려할 정도로 맛있었다. 집에서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그 완벽한 질감, 완벽한 소스, 완벽한 곁들임 요리들

연근 함바그를 맛본 이후로, 고기를 먹는 빈도가 다소 줄었다. 어디서 별로 만족스럽지 않은 고기 요리를 먹을 때면 ‘연근보다 맛없는데 내가 왜 이걸 먹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맛있는 채소 요리를 더 접해보고 싶다. 얼마 전 일 때문에 L.A에서 온 분을 뵌 적 있는데, 그분이 “L.A에선 요즘 제대로 된 바비큐를 먹을 수가 없어요. 모조리 다 채식 요리밖에 없다니까요.” 하고 불만을 담아 말했건만 나도 모르게 연근 함바그를 생각하며 입에 침이 고였다. 채식 식당이 발에 챈다는 L.A에 가보고 싶어졌다. 채식 식당이 많아지고 접근성이 좋아진다면, 그래서 우리가 채소의 진정한 맛을 더 즐길 수 있게 된다면, 동물권과 환경의 측면에 있어서도 한 발 전진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의 농업 역시 환경 파괴적인 측면이 크니 채식이 곧 정답은 아니겠지만 변화를, 더 나은 미래를 소망한다.

조금 더 접하기 쉬운 연근 메뉴는 본죽의 영양버섯뿌리채소밥이다. 죽이 먹고 싶지 않아서 골랐다가,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먹고 나서도 두 시간 정도 계속 기분이 좋을 만큼 맛있었다. 본죽은 찾기 어렵지 않은 체인점이므로, 그곳에 영양버섯뿌리채소밥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왜인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 제발 메뉴 개편 등으로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다.

집에서 해 먹기엔, 다른 것 아무것도 넣지 않고 연근만 넣어서 만드는 연근밥도 좋다. 간단한 양념장과 함께 해도 좋고 저염식을 좋아한다면 양념장까지 생략해도 맛있다. 흙 묻은 싱싱한 연근을 사 와서 반쯤은 밥을 하고 반쯤은 조림을 하면 알맞은 것 같다. 조림이 질린다면, 강판에 갈아서 짠 다음 전분을 더해 만드는 연근전도 근사하다. 연근과 감자를 1:1로 넣어도 맛이 어울리고 말이다. 요리를 잘하는 편이 아닌데, 연근으로는 확실히 실패를 덜 한다. 연근이 나의 믿는 구석이다. 글/ 정세랑(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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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김 아름,사진|Jang Wooc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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