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큐레이터 하랄트 제만(1933~2005)의 50년 업적을 되돌아보는 아카이브 전시 <강박의 미술관(Museum of Obsessions)>이 지난 2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게티 센터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게티 센터는 하랄트 제만의 2만 6천 권이 넘는 책과 2만 4천 명의 작가에 대한 4만 5천 장의 사진과 자료를 소장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는 이 방대한 자료 중 일부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전시로 전시 준비와 도록 출판에만 4년이 걸렸다. 전시에는 하랄트 제만이 생전에 기획한 150회가 넘는 전시에 대한 연구, 사진, 작가들과 주고받은 편지, 제안서, 단명 자료뿐만 아니라 그가 모아온 특이한 오브제들도 소개된다. 전시의 제목 <강박의 미술관>은 하랄트 제만이 상상 속에 세운 미술관으로, 실체가 없기에 어떤 형태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미술관이다.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글렌 필립스는 방대한 양의 전시 자료로 구성되어 있던 제만의 유산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지도였다고 말한다. 또한 제만이 만든 이 자료의 구조가 이번 전시 기획의 토대가 되어 제만이 기획했던 큰 전시들과 함께 이번 아카이브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전한다.
하랄트 제만은 1933년 스위스 베른 태생으로 파리와 베른에서 수학하였고, 미술사, 고고학 언론학 학위를 받았다. 그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베른 쿤스트할레의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이후 1967년 요셉 보이스와의 만남을 통해 생각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작가의 존재, 작품의 제작 이면에 깊이 관심을 가지면서 작품을 제작하는 창작 과정과 아이디어의 전개 과정 자체를 예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9년, <태도가 형식이 될 때(When Attitudes Become Form)> 전시를 계기로 큐레이터도 창작자이자 기획자라는 가치관을 정립하고, 작가와 예술의 다양한 범주와 전시의 장을 완성해가는 존재임을 입증했다. 이 전시는 개념미술, 행위예술, 아트 포베라, 랜드아트를 미술관으로 끌어들이며 작품의 제작 과정에 주목했다. 이후 그는 쿤스트할레 베른 관장직을 그만두고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했다. 1972년 제5회 도큐멘타의 총감독을 맡았고, 198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아페르토(Aperto) 섹션을 만들어 신진작가들을 위한 실험적 미술을 소개하기도 했으며, 1997년에 제2회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냈다.
게티 센터는 이번 전시를 세 개의 큰 섹션으로 구성했다. 큐레이터 제만의 큐레이팅에 중요한 마침표가 되었던 아방가르드, 유토피아의 개념과 환상, 그리고 지리학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구성되었다. 동시에 제만을 통해 미술계에서 처음 조명된 큐레이터의 역할과 중요성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관객들은 20세기 모더니즘을 정치적인 운동, 신비로운 세계관, 그리고 이상적 이념으로 재구성한 그의 옛 전시를 엿볼 수 있다. 스위스 태생으로서의 정체성과 즐겼던 여행, 그리고 그가 기획했던 국제적인 전시들의 자료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게티 센터의 전시는 5월 6일까지 열린 후 스위스 베른 쿤스트할레(6월 9일~9월 2일)와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할레(10월 10일~2019년 1월 20일), 이탈리아 토리노 현대미술관(2019년 2월 26일~5월 26일)에서 계속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1974년 하랄트 제만이 베른 아파트에서 열었던 <대부: 우리와 같은 개척자(Grandfather: A Pioneer Like Us)>가 로스앤젤레스 인스티튜트 오브 컨템퍼러리 아트(ICA LA)에서 4월 22일까지 재현되고 있다. 이 전시는 헝가리 출신의 이발사이자 가발 장인이었던 제만의 할아버지에 관한 전시로 약 1천200여 점의 자료가 소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