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신변 정리
“어머니, 저는 지금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의 팔루(Palu)라는 지역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서울에서 발리로, 발리에서 마카사르(Makassar)로, 마카사르에서 팔루로, 비행기를 세 번 타고 도착했습니다. 내일이면 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엠파나(Empana)에 간 다음 배를 타고 와카이(Wakai)라는 작은 섬으로, 거기서 또 우나우나(Una Una)라는 더 작은 섬으로 갑니다. 우나우나는 적도 근처에 있는 섬으로, 와이파이도 없고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 편지를 쓰는 이유입니다. 요즘 세상에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요? 혹시 이 자들이 저를 납치, 감금해놓고 돈을 뜯은 다음 죽을 때까지 매춘을 시키고 장기밀매 조직에 팔아넘기려는 건 아닐까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나쁜 놈일지도 모를) 남자친구의 신상 정보를 첨부합니다. 닷새 후에 저로부터 연락이 없으면 이 자를 인터폴에 신고해주세요.”
이메일을 썼지만 보내지 못했다. 네트워크가 말썽이다. 마감은 가까스로 끝났다. 화형대에 올라서도 백조 왕자들에게 입힐 스웨터를 떴다는 동화 속 공주처럼, 공항과 비행기에서 엉덩이만 붙였다 하면 휴대폰과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내 원고를 썼다. 앞으로 닷새 동안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이 없으므로 모든 마감을 당겨서 하고, 첨부 파일을 제대로 보냈는지 다섯 번씩 확인하고, 호텔 와이파이에 접촉하자마자 유언을 남기듯 에디터들에게 카톡을 보내 재촉했다. “수정할 것이 있으면 지금 당장 피드백을 주시고 아니면 영영 입을 다무시길.” 혹시 잊어버린 업무가 있어서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고 내 평판에 흠집이 나면 어떡하지? 가스불을 켜놓고 집을 나온 건망증 환자처럼 마음 한편이 울렁거린다.
첫째 날.
소셜네트워크 끊기
우나우나에 도착했다. 생텀(Sanctum)이라는 다이빙 리조트에 묵는다. 다행히 전기와 수도가 있다. 방갈로 내부는 어둑하고 샤워와 용변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서 해결하지만 비바람을 피할 천장과 벽이 있다. 이 얼마나 호사로운가. 낡은 모기장도 어찌 잘 찍으면 낭만적인 그림이 나올 것 같다. 찰칵찰칵 촬영을 한 다음 인스타그램에 올리려는데 휴대폰에 ‘제한구역서비스’라는 문구가 무심히 떠 있다. 각오는 했지만 믿기지 않는다. 2박 3일 동안 비행기 네 번, 배 두 번을 타고 적도의 낙원에 왔는데 아무한테도 자랑을 못 한다고? 말도 안 돼! 친구들아, 어서 돌아와서 나의 자유를 부러워해줘. 나의 트렌디한 여행을 칭송하고 증언하란 말이야! 반응 없는 인터넷 창을 열다섯 번쯤 당겼다 놓은 후, 마침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짐을 풀고 나가보니 아무도 없다. 모두 다이빙을 하러 간 모양이다. 잠시 바닷물에 몸을 담가본다.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하지만 깨진 산호 조각들 때문에 발바닥이 아프다. 곧 수영을 때려치우고 해먹에 눕는다. 어제 보낸 메일들은 모두 문제없이 처리됐을까? 집에 급한 일이 생겨서 가족이 나를 찾고 있으면 어떡하지? 전세 보증금은 환급됐을까? 그사이 주식과 가상화폐 시장이 요동치고 있으면? 재테크는 타이밍인데….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제한구역서비스: 당신은 고립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올 수 없답니다. 행운을 빌어요.’ 전자책 앱을 열어본다. 아무 것도 없다. 나란 놈은 어쩌자고 이렇게 준비성이 부족하단 말인가. 게임이라도 몇 개 다운받아둘걸. 자책하며 잠에 든다.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지고 있었다. 다이빙 보트가 돌아오고 부두엔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겨우 30분 잤을 뿐이다. 디톡스는 모르겠고, 디지털이 없으면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는 건 잘 알겠다. 아니면 적도 근처라서 하루가 더 긴가? 지구에서 가장 볼록한 부분이니까 한 바퀴를 자전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바로 답을 알 텐데, 제기랄.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주먹을 쥐고 손목을 비틀면서 구체가 360도 회전할 때 지름부와 주변부의 기준점 도달 속도가 같은지 관찰한다. 잘 모르겠다.
둘째 날.
먹고 기도하고 자라
숙소는 아침부터 또 텅 비었다. 일행은 발리에서 만난 다국적 다이빙 강사들로, 휴가라고 몰려와서는 하루 세 번씩 다이빙을 하러 나간다. 나는 휴가 와서 취미로 글을 쓰고 싶진 않은데 니들은 정말 너네 일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들에게 말했다. 인터넷 사전을 쓸 수 없어서 두뇌 노동은 어째서 취미가 될 수 없는지, 작가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그의 뇌가 어떻게 몸을 속이고 몰래 일을 계속해서 포도당을 축내고 사람을 피로에 빠뜨리는지 과학적 해설을 덧붙이는 데는 실패했다. 나는 지식을 뇌가 아니라 인터넷에 저장하고 그것을 파먹으며 살아가는 21세기 원고 노동자라서 네이버와 구글 없이는 똑똑한 소리라곤 한마디도 못한다. 다행히 전날 밤 숙소에서 읽을거리를 찾아냈다. 닉 혼비의 <슬램> 영문판이다. 문체를 아는 작가인 데다 고등학생이 사고 치고 (너무나 닉 혼비답게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얘기라 나의 중급 영어로도 알아먹을 만하다. 습관처럼 손에 붙이고 다니던 휴대폰은 방에 팽개쳐두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디지털 디톡스인지, 자동차도, 오토바이도 없는 섬이라 공기가 맑아서 그런 건지, 머리가 개운한 느낌이다. 식당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잠이 오기에 해먹으로 옮겼다. 해먹에서 책을 읽다가 또 잠이 솔솔 오기에 침대로 옮겼다. 침대에서 읽다가 섬집아가처럼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마깐(식사)!” 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응!” 하고 소리친다. 여기가 고향 집이 아니라 우나우나고, 저 밖에서 부르는 게 엄마가 아니라 인도네시아 아줌마라는 걸 깨닫기까지 몇 초가 더 걸린다. 어리둥절한 아줌마에게 “Ya”라고 고쳐 대답하고 방을 나선다. 이런 곤한 잠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여긴 아무것도 할 게 없지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리조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셋째 날.
머리 대신 몸을 쓰자
어제 일찍 잤더니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덕분에 멋진 일출을 보았다.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으니 밤에 잠이 잘 온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무선공유기가 있는 방과 없는 방의 수면 질을 비교한 실험을 보았다. 결론은 예상대로다. 전자파는 숙면에 해롭다. 며칠 컴퓨터에 붙어 앉아 밤낮으로 일을 하거나 스마트폰을 갖고 놀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린다. 그럴 때면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종이책을 읽으려고 하지만 곧 다시 SNS로 빠져든다. 과연 도시에서 전자파를 피하는 게 가능한가? 인구 천만 명이 바글대는 서울에서, 모두가 원하는 순간 아무 때나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전자파가 빼곡히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염력, 공중부양, 텔레파시, 예지력 같은 것들이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과거엔 계룡산에서 도 닦고 수도원에서 포도주 좀 빚다 보면 수월하게 깨우칠 수 있던 능력인데 현대에 와서 전파 간섭으로 불가능해진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디지털 청정 구역에서라면? 나는 눈을 감고 우주의 기운을 느껴본다. 아아, 보인다. 나의 미래가. 아주 선명하게 보인다. 오늘도 종일 먹다 자다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보낼 것이다!
예언은 틀렸다. 오후에 다이빙을 했다. 작은 나무 배를 타고 나가서 바다에 뛰어들었다. 커다란 바다거북을 만났다. 거북은 인간들이 귀찮다는 듯 천천히 몸을 돌려 심해로 떠나갔다. 안녕 거북아. 너 참 팔자 좋구나. 내 팔자도 뭐, 지금으로선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넷째 날.
검색 대신 사색
우나우나에서 사흘이나 지내면서 섬 구경을 안 했다. 섬에는 멋진 화산과 폭포가 있다고 했다. 오늘은 꼭 산책을 가야지, 아침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아, 더 늦기 전에 나가야지, 점심을 먹을 때도 생각했다. 어머나, 늦어버렸네, 저녁을 먹을 때 그랬다. 대신 해먹에서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잠을 잤다. 오후에 책을 끝냈다. 그래도 시간이 남고 심심하기에 일을 좀 했다. 다음에 집필할 책 목차를 짰다. 석 달이나 미룬 일이다. 여기 좀 더 있으면 취미로 글도 쓰게 생겼다. 두뇌 노동은 취미가 될 수 없다고 누가 그랬나? 내가? 그럴 리가.
사실 내가 다닌 직장은 엄청나게 업무 강도가 높은 곳들이었다. 때려치워야지, 하면서도 사표 내고 부대낄 에너지가 없어서 몇 달씩 뭉개고 다니기도 했다. 숲의 모양은 밖에서 봐야 더 잘 보이는 법. 회사를 나와서 보니 너무 바쁘고 고통스러운 나머지 본성을 잃고 포악하거나 우울해진 사람들이 뻔히 보였다. 그 지경쯤 되면 오히려 하루하루 견디기 바빠서 자신을 돌아보거나, 미래를 생각할 여력이 없다. 한국이 유럽처럼 한 달씩 휴가를 쓸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니, 너무 피로해서 피로하지 않을 방법을 못 찾는 피로의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래서 나는 늘 회사에 남은 동료들을 동정하고 여유를 가지라고 잔소리를 해왔는데, 알고 보니 나도 꽤나 여유 없이 살았구나 싶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벗어나는 것은 수족이 묶인 듯 불편한 상황이었으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생각의 여유를 되찾게 해주었다.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될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서울의 친구들을 몽땅 여기 불러다가 일주일쯤 가둬놓고 싶다.
밤에는 파티를 했다. 디지털 청정 구역답게 모닥불 피워놓고 통기타로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어쩌고…는 개뿔. 프랑스인, 핀란드인, 중국인이 모여서 서로 자기 블루투스 스피커가 음질 더 좋다고 싸우면서 귀청 떨어질 것 같은 데시벨로 EDM을 틀고 발리에서부터 바리바리 싸온 와인과 럼을 위장에 콸콸 쏟아부었다. 아아 문명의 노예들이여, 어찌하여 그대들은 고요를 들을 줄 모르는가. 나는 다 놓았노라.
마지막 날.
다시 매트릭스 속으로
아침 일찍 일행들은 마지막 다이빙을 하러 가고, 나는 숙소 주변을 산책했다. 가도 가도 바다와 숲과 게으른 소들뿐이다. 그래서 이름이 우(牛)나우나였나?
보트에서 육지가 보이기 시작하자, 잊고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제한구역서비스’라는 글씨가 지워지고 인도네시아 통신사 마크가 뜬다. 까톡, 까톡, 까톡, 봉인 해제된 디멘터들이 울부짖는다. 온몸이 얼어붙는다. 빌어먹을 메신저 때문에 인류는 진정한 휴식과 고립의 자유를 잃었다. 타짜가 화투장을 쪼듯 조심스레 메시지들을 읽어나간다. 다행히 별일은 없다. <바자> 빼고는. ‘아직 마감이 안 끝났으니 괜찮으시면…’ 에디터 K의 메시지다. 다른 월간지 다 일 끝내고 쉴 날짜에 뭐하는 거지? 이 사람들 건강은 괜찮은 건가?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건 분명 전자파 때문이다. 이제 느낄 수 있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는다. 내가 4박 5일쯤 잠적해도 세상엔 별일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종종 휴대폰을 끌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바자> 기자들을 납치해서 우나우나에 가둬놓고 그들의 휴대폰을 모두 불살라버려야지. 완전한 휴식이 뭔지, 당신들도 한 번쯤 느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