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말은 너무나 많이 했지만 결코 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만화가 김보통이 전하는 퇴사의 기술. | 휴식,김보통

삶과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을 그려 온 만화가 김보통이 라는 에세이집을 냈다.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퇴사에 대한 이야기다. 쉽게 읽히는 글이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삶의 방향이 바뀌는 거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만화에도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을 심어놓았던 그는 필력도 좋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이삼십 년간의 교육을 받고 비로소 도착하는 일종의 목적지, 때로는 내 삶을 보호해주는 방파제 같다가도 어느 순간 차마 뛰어넘지 못하는 울타리로 삶을 옭아매는 것, 그럼에도 결국 인생의 상당 부분을 그 안에 머물게 되는’ 대기업을 그만두기로 했을 때,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하지만 한결같이 말했다. “너는 망할 것이다.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회사를 그만두면 굉장히 불안할 수밖에 없죠. 부표처럼 떠다니는 동안에 깨달은 게 뭐냐면, 이 파도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예요. 불안과 고독이라는 파도죠. 저의 경우에는 이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서부터 괜찮아졌어요. 봉준호 감독님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심지어 제가 천재라고 생각하는 그 분도 가끔 불안하다고 해요. 천하의 봉준호도 불안하다면, 이 세상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닐까? 불안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거나, 센터가 뭔가 고장 난 사람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바다 위에 떠 있으니까 당연히 파도는 치는 것이고, 그 위에 떠 있는 부표 입장에서 파도는 그냥 늘 존재하는 거라고 인정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공포라는 감정이 없으면 인간이 이 정도까지 진화하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는 기린이나 코끼리랑 달리 일어나지 않을 일까지 상상하며 공포를 느끼잖아요. 미래의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대비하고 노력하며 나아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대기업에 다닐 때는 몰랐던 불안감이 오히려 제 삶을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 것처럼요.”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된 대신에 아무런 계획 없이 우주적 막연함 속에 던져진 그가 남는 시간에 한 일은 의외로 ‘브라우니 굽기’다. 산적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전에 우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했다. 맛있는 걸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중탕한 초콜릿에 버터와 달걀 노른자를 넣고 나무주걱으로 섞어 반죽을 만든 뒤 오븐에서 브라우니를 굽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되는데, 그 문장들을 읽다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디저트인 브라우니가 격렬하게 먹고 싶어진다. 석탄 덩어리처럼 딱딱한 최초의 브라우니로 시작해서 너무 물러 진흙 같은 브라우니를 거쳐 제대로 된 이상적인 브라우니가 나올 때까지 그는 매일 매일 도자기를 빚는 장인처럼 부엌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실패작을 줄줄이 먹어치우는 것만 해도 꽤 곤혹스러웠을 것 같은데 “왜 하필 브라우니였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이렇다. “개인적으로는 브라우니가 굉장히 고급스러운 디저트였거든요.(웃음) 한정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디저트이기도 했고요. 이왕 만들 거면 브라우니의 전문가가 되어보자는 마음이었죠. 책에는 안 썼지만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근처 카페에 납품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웃음)”열기가 느껴지는 오븐을 바라보며 식탁에 앉은 그는 브라우니가 구워지는 시간을 기다리며 학창 시절 이후 17년 만에 그림을 그리게 됐고, 그 그림이 트위터로, 최규석 작가의 눈으로, 웹툰 플랫폼으로 옮겨지며 잘나가는 만화가가 되었고, 와 같은 독보적인 작품이 나왔다. 이 과정을 너무 길게 설명하면 오히려 뻔한 성공 스토리처럼 느껴질 것 같으니 이쯤 해두자. 중요한 것은 그가 브라우니를 구웠다는 거다. 책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만든 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이전까지 먹어온 브라우니들보다 나았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틈날 때마다 브라우니를 잘한다는 곳을 찾아 몇 번 먹어보기까지 했는데, 역시나 내가 만든 게 더 나았다. 당연한 일이다. 내가 만든 브라우니는 철저히 내 입맛에 맞도록 거듭 수정되어 완성된 것이니까. 시중에 파는 것들은 나에겐 ‘너무 달거나 너무 질거나 너무 퍼석하거나 너무 비싼’ 것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만든 브라우니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은 없었다. 내가 먹기에만 좋은 브라우니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궁금했다. 나에게 맛있는 이 브라우니가 과연 브라우니의 본질에 얼마나 가까운 것인지 알고 싶었다.” 퇴사나 성공, 혹은 인생과 하등 상관없는 브라우니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제 막 삶의 방향을 전환한 인간의 선택을 은유하는 문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예언했던 것과 달리, 아무래도 그는 망하지도, 불행해지지도 않은 것 같다.“제 목적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싫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원치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거예요. 자신은 짬뽕을 좋아하는데 사람들이 다 짜장이 맛있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짜장을 맛있는 척 먹으며 평생 동안 사는 게 실패라고 봐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걸 못 먹는 거니까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좋은 대학교에 가고, 좋은 회사에 가고, 30대가 넘으면 이 정도 급의 차는 타야 되고, 특정 지역에 집을 사야 성공한 삶이라고 모두가 이야기하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좇게 되잖아요. 우리 사회는 도망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저는 이게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져요. 가장 약한 계층의 사회 구성원들도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고, 쉴 수 있고, 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걸 비겁하다고 몰아가는 것은 국가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고 포기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을 것 같아요. 빛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쪽에 관심이 많아요. 빛나는 사람들은, 가만히 둬도 잘 사니까요.(웃음)”‘본인 사망 외에는 전원 야근’하라는 시스템 하에서 일하던 그는 이제 자신이 일하는 환경의 시스템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언젠가 김보통 작가가 낸 ‘어시스턴트 채용 공고’가 인터넷상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짧게 일하고, 덜 불행해집시다.”라는 말과 함께 정확한 급여, 휴식 시간까지 명시한 근무 시간, 근무할 때 앉는 의자의 종류까지 세세하게 나열한 채용 공고가 신선하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우리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열정 페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거다. “제가 일하는 곳에서만이라도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것만은 철저하게 지켜요. 인터뷰에서 유난히 수다스러워지는 이유도 저희 작업실에서는 대화가 없어서예요. 제가 작업실에서 어시스턴트 분들에게 농담을 한 마디 해도 좀처럼 대꾸를 안 해줘서, 작업실에 놀러 온 분들이 싸웠냐고 물어볼 정도거든요.(웃음) 저는 이게 일반적인 근무 환경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낸 채용 공고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라 이슈가 되지 않길 바라요.”김보통 작가의 에세이집을 사면 라는 귀여우면서도 크리피한 소책자가 딸려 온다. 어느 날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지친 고양이는 양, 곰, 두더지 등등 많은 동물들을 찾아다니며 말한다. “나는 지쳐버렸어. 이제 쉬어야 해.” 그리고 고양이는 이 말에 “어리석은 녀석, 쉬는 것은 나중에도 할 수 있어.”라거나 “최선에 최선을 다해본 것이니?”라고 화답하는 상대의 심장을 가차없이 꺼내서 가져 간다. 당신 또한 언젠가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상대방의 심장을 꺼내도 좋다. 아, 혹시 궁금할까 봐 덧붙이자면, 김보통 작가가 ‘Normal’이라는 뜻의 이름을 쓰는 것과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 것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