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런 류의 공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빈티지 아티스트 딜런 류. 그녀가 남산의 오래된 아파트 16층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다. 여러 시대의 아름다움이 실현된 탐미적인 공간마다 아스라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른다. | 인테리어,딜런 류

소월길 초입 남산맨션을 지날 때면 이 건물을 향한 신비 서린 궁금함 때문에 늘 마음이 쓰이곤 했다. 그윽한 남산길의 시작점에 40년이 넘도록 건재하는 단 한 동짜리 건물, 건축가 김수근의 이름에서 비롯되는 독보적인 존재감, 게다가 남산맨션이라는 이름의 레트로적인 무드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여름 끝의 초록들이 남산을 감싸던 무렵, 빈티지 아티스트 딜런 류가 이곳의 높은 층에 새 집을 꾸렸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16층에 내려 컴컴한 호텔식 복도를 따라 걸으며 그녀에게 이곳을 택한 까닭부터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 전쯤 지인의 친구가 여는 파티에 초대받아서 남산맨션을 처음 방문했어요. 맨션 두 채를 연결해서 하나는 집으로, 다른 공간은 사무실로 사용하는 걸 보고 무척 신선하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이곳의 매력에 빠져서 하나둘씩 알아보니 1972년에 김수근 선생님께서 호텔로 만들었던 건물이 이후에 레지던스로 용도 변경되었더라고요. 여기에 살고 싶어서 수시로 알아봤지만 원하는 층의 집이 매물로 안 나와서 2년 동안은 렌트로 10층에서 살다가 마침내 원하던 뷰가 펼쳐지는 층의 집이 나와서 바로 계약을 했어요.” 새하얀 벽 끝의 큰 창 너머로 산과 맑은 하늘이 절반씩 펼쳐졌다. “늘 바다보다는 산이 보이는 걸 더 좋아해요. 이 집은 뒤로는 남산, 앞으로는 매봉산을 마주하고 있어요. 서울 시내에서 앞뒤로 산을 두고 살 수 있는 공간은 정말 흔치 않잖아요. 나무가 만들어주는 향기가 너무 좋아요.”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빈티지 백에 오래된 엠블럼과 리본, 카메오 같은 빈티지한 요소를 더해 ‘히스토리 바이 딜런(HISTORY BY DYLAN)’이라는 유니크한 아트 백을 만들어내는 딜런 류. 그녀의 인스타그램 속 집 사진에는 항상 ‘hôtel de Dylan’이라는 좌표가 붙어 있다. 프랑스와 미국, 이탈리아, 일본, 싱가포르로 출장과 긴 여행을 떠나곤 하는 그녀를 언제고 포근히 맞아주는 아주 넉넉한 집, 그래서 큰 집이라는 뜻의 ‘hôtel’이라 칭한다. 방 하나를 터서 확장했다는 넓고 밝은 거실로 오후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와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데이베드가 마주 놓여 있는 공간, 그 뒤로는 브루클린에서 어렵게 사 온 묵직한 빈티지 서랍장과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서랍장 옆에 걸린, 팝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제법 큰 판화 한 점에 눈이 갔다. “너무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클래스 올덴버그가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랑 아주 친했는데, 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다니는 미스를 보면서 ‘건축가는 항상 저렇게 댄디하게 멋을 내고 다니는구나’ 생각하면서 만든 작업이라고 해요. 제목도 ‘Architect’s Handkerchief’구요. 이 작품을 걸고 나니 문득 미스가 디자인한 데이베드를 매치하고 싶어져서, 1965년에 만들어진 빈티지 제품을 구입했죠.” 그녀의 센스와 열망이 만들어낸, 위트 가득한 절묘한 매치였다. 딥티크의 수줍은 향 너머로 초록색 대리석이 반질거렸다. 장기간 집을 비우곤 하는 딜런 류에게 걸맞게 규모가 축소된 주방은 그녀가 고집한 진짜 대리석 아일랜드 테이블로 인해 글래머러스한 느낌을 풍겼다. “음식을 다루는 주방에서는 리얼 마블을 쓰는 건 아니라고 모두가 말렸어요. 게다가 초록색이 너무 세다고 걱정하셨는데, 결론적으로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손이 많이 가고 관리하기 힘들다는 진리를 깨달았죠.”10층에 살던 그녀가 16층을 소유하게 되면서 50평 남짓 오래된 아파트는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대대적인 공사가 이루어졌다. 뉴욕에서의 생활 그리고 여러 도시의 앤티크 마켓을 돌아다니며 직접 모은 아이템과 집 계약 직후 프랑스 곳곳에서 어렵사리 구한 아이템들로 집을 꾸몄다. 파리에서 만들어진 1900년대의 벽난로, 샤르트르에서 공수한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집 안의 모든 동그란 빈티지 스위치와 가장 찾기 힘들었던 욕실의 휴지걸이까지 말이다. “저희 집의 모든 스위치는 1950년대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자세히 보시면 조금씩 컬러와 상태가 달라요. 은색은 크롬이고 하얀 부분은 세라믹인데, 요즘 만들어지는 건 플라스틱이더라고요. 몇 백 개 중에 고르고 골라 스물다섯 개를 가져왔어요.” 복도식으로 이어진 공간에는 그녀가 특별히 애착을 갖고 만든 ‘살롱’과 욕실이, 그리고 가장 은밀하면서도 포근한 푸른색 침실이 있다. 거실의 모던한 공간감과 달리 핑크빛으로 마감된 살롱에 들어선 순간 1900년대 파리의 어느 시간에 당도한 듯 로맨틱한 놀라움에 압도되었다. 그녀가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헤밍웨이가 즐겨 찾던 리츠 호텔 헤밍웨이 바의 무드와 어떤 시절이 재현된 듯 보였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회색빛 대리석 벽난로와 골드 프레임의 앤티크 거울, 나란히 벽에 걸린 아르데코 스타일의 월램프, 그리고 산이 펼쳐지는 창문의 중간에는 분홍빛 꽃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탐미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벽을 오롯이 차지한 ‘ᄃ’ 자형의 월넛 책장엔 여인의 호기심을 채워줄 두툼한 책들로 가득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자크 브랑주 집의 책장 사진을 우연히 봤어요. 그리고 이렇게 책장 가운데에 소파를 넣을 수 있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어요. 다만 책장의 몰딩이나 트리밍 같은 부분은 리츠 호텔 헤밍웨이 바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참고했죠. 이 책장을 실현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다행히 신념이 있으신 제작자를 만나서 잘 완성되었어요.” 책장에 둘러싸인, 한스 베그너의 그레이 소파에 앉아 그녀의 조분조분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곳에서의 시간이 그려내는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거울에 비친 안스리움과 카라, 보랏빛 수국의 만개를 바라보다가 어느 시대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르데코 시대를 특히 좋아해요. 아르데코를 표현하는 ‘Splendid but Modern’이라는 말처럼 과장되지 않고 점잖은 화려함 그런 미감이 좋아요. 영화 에 나오는 1910년에서 1930년대까지가 극도의 아름다움이 확립된 시대라고 생각해요. 문학과 그림, 음악에서도 그렇구요.”이 집이 품은 모든 공간의 이음새를 더욱 우아하게 조율하는 건 그녀가 컬렉션한 작품들이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벅 비도의 작품 ‘Art History’, 그녀의 첫 번째 컬렉션인 레이첼 후닥의 콜라주, 살롱 벽엔 그녀가 좋아하는 장 콕토와 피카소의 드로잉이, 침실엔 알렉스 카츠의 도도한 여인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복도에 걸린 다니엘 뷔랑의 커다란 판화 두 점은 파리의 경매에서 낙찰 받아 직접 들고 온 것이기도 하다. 2007년 브루클린 덤보에 있던 아티스트의 스튜디오에서 처음 작품을 구입한 이후로 꾸준히 세계 이곳저곳에서 만난, 오롯이 사적인 취향으로 선택한 집 안 곳곳의 매혹적인 작품들. 이따금 아티스트와 나눈 사색적인 인터뷰를 매거진에 기고하기도 하는 진정한 아트러버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그녀다. “저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호기심이 지금의 저를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해요. 아티스트 쥘 드 발랭쿠르는 순수한 팬으로 만났다가 친구가 된 케이스인데 인터뷰를 통해서 그의 작품세계와 생각을 좀 더 깊이 있게 알게 되었죠. 몇 년 전 파리에서 만났던 장 자크 상페도 건강 상태가 몹시 좋지 않으셨음에도 밝게 농담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함께 기대어 있던 소파와 살롱의 빈티지 사다리 사이사이, 보석 같은 그녀의 가방들 틈에 각기 다른 사이즈의 체크무늬 쿠션과 방석, 스툴이 오브제처럼 놓여 있었다. 패브릭 브랜드 ‘유 앤 어스’와 그녀가 함께 ‘딜런 앤 유(DYLAN & Y.U.)’ 라는 이름으로 선보일 피스들이었다. “히스토리 바이 딜런을 통해 지난 12년간 했던 작업은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것이었어요. 1980년대 빈티지 가방에 1950년대 테이프와 1930년대의 펜던트를 연결해 하나뿐인 가방을 만드는 식이죠. 유 앤 어스의 원단들을 다시 배열하고, 빈티지 테이프와 엠블럼 장식을 더하는 작업은 제가 해왔던 작업과 맥을 같이하면서 라이프스타일로 확장되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로웠어요. 조각 원단들의 특성상 작은 쿠션 하나도 같을 수 없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었죠.” 일상에 보다 밀접한 소재로서 아름다운 패브릭 조각과 빛나는 빈티지 터칭이 더해질 작업으로 그녀는 새로움의 무드를 채워가고 있었다.시각적인 것에 유난히 약해 아름다운 것들에 깊이 감동한다는 딜런 류. 어쩌면 그녀가 실현한 ‘딜런의 집’은 아름다운 것을 향한 그녀의 모든 여정과 궤적으로 이루어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고 떠날 채비를 해야만 하는 그녀를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합당하고 편안한 보금자리로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