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스모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커피와 담배의 시대가 가고, 한 개비 분량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스틱을 충전해야 하는 아이코스의 시대가 도래했다. | 커피,담배,아이코스

짐자무시가 요즘의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1986년부터 커피와 담배에 대한 짧은 영상들을 찍어 온 그는라는 ‘흡연 권장 영화’를 만들었다.우아한 흑백 필름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대화도 없이,그저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보낸다.하등 무의미하고 쓸데없는 시간 때우기 같지만 커피와 담배 혹은 그 사이를 떠도는 분위기만으로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시간이 된다.이 영화는 담배 한 대를 피우는 짧은 시간에 많은 영감이 피어오른다는 것,그리고 무엇보다 카페인과 니코틴의 조합이 썩 훌륭하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그런데 최근에 조금 당황스러운 경험을 했다.아이코스를 피우는 동안에는 커피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몇 달 전 국내에 들어온 궐련형 전자담배 아이코스는 흡연자들을 둘러싼 풍경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가로수길에 위치한 아이코스 스토어는‘담배를 사겠다고’ 모여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진풍경이었다.나 역시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시간이나 줄을 서고 굴욕적인 교육까지 받은 후에야 아이코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요즘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아이코스가 쥐어져 있다.갤러리에서 마주친 아티스트도,촬영장에서 만난 우아한 여배우도 아이코스 스틱을 꺼내 물었다.아직은 조금 서툰 손놀림으로,흡연을 위해 챙겨야 하는 것이 예전보다 많아졌다며 투덜거리면서 말이다.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이코스가 바꾸어놓은 개인의 스모킹 라이프다.장 콕토는“담뱃갑 속에 있는 담배를 꺼내어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의식과,우리의 폐를 통과하여 코를 킁킁거리게끔 만드는 희한한 연기는 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세계를 유혹하고 지배해왔다”고 말했었지만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의식과 코를 킁킁거리게 만드는 연기는 가까운 미래에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듯하다.아이코스가 가져다준 가장 경이로운 선물은 미래의 건강이나 금연의 가능성이 아니라3백65일 머리카락과 옷에 배어 있는 쿰쿰한 냄새와 지긋지긋한 담뱃재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는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숨 죽인 채 눈치 볼 일도,간밤에 싸리눈이 내린 것처럼 창가에 담뱃재가 내려앉을 일도 없는 것이다.(심지어 창문도 열지 않은 방 안에서 이불에 둘둘 싸인 채로 침대 속에서 담배를 입에 무는 것도 가능하다.)비흡연자라면 공감하기 어렵겠지만 흡연자에게 이것은 아이폰을 처음으로 손에 쥔 날 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전환이다.아이폰과 마찬가지로, 아이코스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입술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촉감(태우는 것이 아니라 찌는 방식이라 열기가 전달된다)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군내 같은 향에 적응하기까지는 한두 달쯤 시간이 필요하지만,일단 적응하고 나면 별다른 문제도 안 된다.사우나에서 수증기를 한껏 들이마시는 듯한 공허함과 입술로 볼펜 뒤끝을 물고 있는 듯한 불쾌함을 선사했던 기존의 전자담배와는 다르게,아이코스는 연초와 제법 흡사한 타격감을 선사한다.입술에 무는 느낌 또한 연초와 똑같다.이것이 그 어떤 타박과 위협에도 꿈쩍하지 않던 흡연자들을 기이할 만큼 신속하게 태세 전환시킬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그런데 아이코스를 써보니까 어떠냐고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나쁘지도,좋지도 않아.사려면 사든지.”불만족스럽지 않다.그러나 아주 만족스럽지도 않다.정신 못 차리게 황홀하거나 두 팔 벌려 환영할 만큼 반가운 일은 결단코 아니다.이것이 솔직한 심정이다.아이코스로 갈아탄 이후에 왜인지 모르게 흡연에 시큰둥해졌다.담배가 떨어지면 새벽 두 시에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편의점에 가야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이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럭저럭 참을 만하다.두툼한 플라스틱 덩어리의 뒤끝을 물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바보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쯤은 무시할 수 있다.그러나 한 번에 오로지 한 개비 분량의 자유만이 허용되는 것도(한 개비의 스틱을 피우고 나면 외장 배터리 역할을 하는 케이스 안에 넣어야 한다),정량의 호흡이 끝나고 나면 문자 메시지가 온 것 같은 진동으로 흠칫 놀래키는 것도,담배를 쥐는 데 두 손가락이 아닌 세 손가락 혹은 다섯 손가락을 사용하게 되는 것도,어쩐지 흡연이라는 행위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 오는 것이다.아이코스와 커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리처드 클레인이라는 작가는라는 책에서“예술적인 흡연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는 마치 말 없는,그리고 불투명한 대리석이 조각가의 도구 아래에서 생명력을 얻듯이 살아 있고 감성적인 피조물이 된다”고 말했다.(정작 작가 본인은 금연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요즘 시대에 흡연이 예술적인 행위라거나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코웃음을 유발하는 과대망상일 것이다. 그러나 전 인류가 얻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담배를 끈덕지게 입에 물어왔던 이유가 단지‘담배의 맛’때문만은 아니었다.아이코스 이전의 삶에서 흡연이 좀 더 격렬한 쾌락이었다면아이코스 이후의 삶에서 흡연은 컨트롤 가능한 무언가가 됐다.얇고 가벼운,그러나 곧 사라지고 마는 즐거움을 오랫동안 선사해주었던 연초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다.다시 연초의 시대로 회귀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한동안 아이코스를 피우다 다시 연초를 태우면 그동안 타이어를 핥으며 만족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새로운 전자 기기가 바꾸어놓은 몸의 감각이 그동안 몰랐던 역한 향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어쩌면 아이코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우매한 민폐 인간들을 구제하기 위해 창조된 물건인지도 모른다.분명한 것은 이제 다시는 연초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그리고 온갖 케이블이 엉켜 있는 침대 머리맡에 꺼내 놓아야 할 충전기가 하나 더 늘어났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