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이 시대를 사로잡는 천재가 되려면 예술적인 좌뇌와 현실적인 우뇌, 그리고 동시대적인 안목까지 겸비하고 여기에 날개를 날아줄 운도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기술은 완벽하고 정보는 넘치며 천재의 재능은 오늘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낭비된다. | 천재,좌뇌,우뇌,안목,운

패션 에디터를 관두고 쉬기 시작했을 무렵, 이 바쁜 패션 월드에서 나란 인간이 완전히 아웃되는 건 아닌지 처음으로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던 건 베트멍과 뎀나 바잘리아라는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였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자 친구(이자 패션 에디터인)가 이렇게 말했다.“뎀나 바잘리아? 요즘엔 고샤 루브친스키까지는 알아야지.”벌써 3년 전 일이다. 그 후 지금까지 다행으로 여기는 건 지금의 트렌드는 디자이너 이름 말고는 내가 책상을 빼던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고, 되려 엘리트적인 콧대를 내려놓은 하이패션 덕분에 런웨이와 리얼웨이 간의 격차가 없어졌다는 거다. 시즌을 보여주는 디자이너 인스퍼레이션 보드나 새로운 테마, 철학 같은 것들이 더는 흥미롭지 않으며(이제는 그들도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영감을 받는 것 같으니) 아는 사람만 알기에 보물처럼 여겨지던 전설적인 컬렉션과 비주얼 아카이브도 SNS를 통해 대중적으로 생명력을 얻었다. 패션 인사이더 간에 공유되던 고급 정보들은 공신력 있는 트렌드 회사 이메일을 통해 제목만 읽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고 전문적으로 내게도 자동 업데이트된다.한때 나는 피비 파일로의 디자인 철학을 읽고 그녀가 만든 옷의 실루엣과 컬러를 보며 여자로서 어떤 인생을 살지에 대한 것까지 진지하게 생각했었지만 더는 옷과 슈즈를 삶에까지 연결 짓는 거창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어떻게 스타일링했는지를 통해 특정 아이템과 디자이너 이름을 기억하고 내가 어떤 걸 어떻게 어떤 날 스타일링하면 좋을지를 생각한다.생각해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샤넬, 디올, 랑방 등 럭셔리 하우스 이름은 패션의 거의 모든 것이었다. 역사도, 전통도, 혁신도, 그리고 미래를 짊어갈 수장까지 그곳에서 나오고 인정받았다. 역사로 치면 귀족 가문 같달까. 왕좌나 다름없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교체라도 될라치면 온갖 루머가 나돌고 새 주인공의 컬렉션은 언제나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헌정 컬렉션으로 시작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디 슬리메인이 등장해 이브 생 로랑을 생 로랑으로 갈아치우고 ‘럭셔리’의 개념을 소재나 디자인이 아닌 ‘청춘’으로 대체하면서 패션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이어 루이 비통의 바통을 이어 받은 니콜라 제스키에르 또한 과거에 대한 향수보다는 ‘컨템퍼러리’한 트렌드에 집중한 데뷔 컬렉션을 선보였다.그 후 지난 2년간은 모두 알다시피 생 로랑의 에디 슬리메인, 디올의 라프 시몬스, 구찌의 프리다 지아니니, 랑방의 앨버 엘바즈, 푸치의 피터 던다스,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클로에의 클레어 웨이트 켈러 등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모두 한때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이를 이어받은 건 J.W 앤더슨(로에베), 뎀나 바잘리아(발렌시아가), 안토니 바카렐로(생 로랑) 같은 1980년대에 태어난 청춘들이며 그나마도 지금의 짝짓기가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LVMH, 케어링 그룹이 마치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처럼 변한 지금, 랑방의 부크라 자라르, 디올의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 클로에의 나타샤 램지 레비 등 새롭게 등장한 이름이 예전처럼 흥미롭지 않은 것도 그 이유다. 그뿐인가, 왕좌를 내놓지 않은 노장들은 인맥과 권위를 이용해 젊은 피를 직접 수혈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으니. 칼 라거펠트부터 토미 힐피거까지 그들에게 빛나는 건 카라 델레바인, 지지 하디드와 켄달 제너부터 릴리 로즈 뎁까지 셀러브리티를 불러들이는 파워라 해야 맞을 거다.2017 F/W 쇼를 앞두고 누군가 발렌시아가의 뎀나 바잘리아가 얼마나 갈 것인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전성기 시절 마르지엘라의 천재성을 배우고 마찬가지로 전성기 시절 루이 비통의 마크 제이콥스에게서 재미를 배웠다는 그의 컬렉션은 전위적이고 전복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기가 탄탄하다. 컬래버레이션 컬렉션으로 보여준 그의 쇼맨십 역시 실로 놀랍다!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는 동시에 대중과 유리되지 않도록 아주 조금 앞서가는 영리한 컬렉션을 보면 오히려 그에게 발렌시아가라는 이름은 헌신할 정도로 절대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시대는 변패했고 모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이제 완벽한 솔로전으로도 승부가 가능한 본인의 네임 밸류가 더 중요하다. 이쯤에서 뎀나 바잘리아의 한 인터뷰를 소개한다.“전체 시스템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창조적 비전과 상업적 비전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패션 비즈니스 시스템은 창의성과 비즈니스를 파괴하고 끊임없는 악순환을 초래하고 있다. ...(중략) 창조적인 부분은 시장보다 훨씬 앞서가야 한다. 시장에 없는 것을 제공하고, 시장에 도전하고, 시장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패션 천재? 더 이상 이브 생 로랑이나 마크 제이콥스처럼 타고난 예술성에 으레 따르는 슬픈 자아를 반추할 여유가 없다. 새 시대의 천재란 예술적인 좌뇌와 현실적인 우뇌, 그리고 동시대적인 안목까지 겸비하고 여기에 날개를 날아줄 운도 구할 줄 알아야 한다.여전히 계속되는 패션계의 회전문 신드롬을 무라카미 류의 글을 빌어 정리해보려 한다. 비록 그는 경제를 빗댄 거였지만.“돈은 써버리면 거품 따위가 일어날 수 없다. 더 벌자, 더 저축하자. 서글픈 농경민적 가치관이 거품 경제와 디플레이션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렵민은 낭비밖에 모른다. 어떤 측면에서 볼 때 낭비는 미덕인 것이다.”바야흐로 패션 천재란 오늘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는 데 붙이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기술은 완벽하고 정보는 넘치며 재능은 끊임없이 낭비된다. 이것이야말로 패션의 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