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용재오닐의 파노라마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난 겨울, 리처드 용재 오닐을 만났다. 산타모니카의 해변, 영국의 날씨, 마라톤, 비올라와 베토벤, 그리고 앙상블 디토의 10주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를 읽고 듣고 만났던 겹겹의 시간들이 봄날을 통과하며 고요한 진동을 일으켰다. | 뮤직,리처드 용재오닐,비올리스트,비올라

차디찬 2월의 마지막 밤. 저녁 8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계 초침을 초초하게 바라보며 서울의 동쪽으로 움직였다. 5호선 끝에 있는 어느 한적한 동네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의 리사이틀이 열렸던 날이었다.가장 중앙 자리에 무사히 착지하며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조명이 밝아지면서 블랙 수트를 입은 그가 환히 웃으며 등장했고, 잔잔한 갈채 소리가 옅어지자 벤저민 브리튼의 ‘라크리메(Lachrymae)’를 연주하기 시작했다.환청이었을까, 실제였을까. 뚜렷하게 알 길은 없다. 공연장 2층 너머로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공연에 방해가 될 만큼의 볼륨은 아니었다. 비올라 소리의 어둡고 묵중한 질감은 누구라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언젠가 용재 오닐은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 소리가 비올라의 선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음울하고 촉촉했던 1부 ‘브리티시 비올라’를 지나 ‘로맨틱 비올라’로 채워진 2부는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 피아졸라의 ‘위대한 탱고’처럼 낯익은 멜로디로 객석의 공기를 전환시켰다.이날 공연장엔 어깨 한쪽에 악기를 둘러멘 학구적인 클래식 꿈나무부터 나이 지긋한 노부부, 퇴근하자마자 달려온 기색이 역력한 직장인까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붐볐다.리처드 용재 오닐과 인터뷰할 수 있는 기회가 2016년, 2017년 두 번 있었다. 모두 추운 겨울이었다. 두툼한 점퍼로 무장한 채 예외 없이 모두에게 악수를 청했던 그는 언제나 벤티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홀짝였다.평소에 몸에 정확하게 피트되는 디올 수트를 즐겨 입는 그이지만, 몸을 낙낙하게 감싸는 구조적인 수트 안에서 용재 오닐은 본인만이 감지하는 편안한 지점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포즈를 취했다. 비올라를 아기처럼 감싸 안은 그의 모습을 적막 속에서 한참 바라봤다.촬영을 마친 사진가가 모니터를 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저 손의 근육들 좀 보세요. 얼마나 연습을 했으면 손마디마다 저런 근육이 붙어 있을까요? 저런 손은 처음 봤어요.”리처드 용재 오닐은 열다섯 살에 처음 비행기를 탔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삶에서 ‘지상’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머나먼 여정, 리허설, 공연이란 세 개의 사이클이 쉴 새 없이 반복된다.실내악 연주자로서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그가 이룩해온 기념비적인 지점들은 위키백과에도 충분히 설명이 되어 있으니 지금부터는 그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지극히 사소한 것을 나열해볼까 한다.용재 오닐은 동해와 남해와 서해의 바닷물 색의 차이를 아는 섬세한 음악가다. 그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다. 얼마 전 종영한 JTBC 에 출연하여 광안리 해변을 배경으로 ‘섬집아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여러 번 돌려 보았다. 그날 방송에서 들려준 내밀한 이야기들은 방송 후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다.영화 의 조지 클루니에 버금가는 사이클을 가진 리처드 용재 오닐은 산타모니카에서 살고 있다. 모래밭 위로 발을 저벅거리며 해변을 걷다 보면 경쾌하게 바람을 가르며 조깅하는 탄탄한 체구의 남자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된다. 그 역시 캘리포니아의 건강한 볕 아래서 그렇게 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리처드 용재 오닐은 스스로가 아닌 타인을 위해 달린다. 1m를 질주할 때마다 기부가 이루어지는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의 캠페인에 누구보다 열심을 다했던 그다. 기부를 삶의 일부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비올리스트의 마라톤 최고 기록은 3시간 35분이다.‘헉’ 소리 나는 숫자가 아니냐며 깜짝 놀라자 세계 최고 기록은 2시간 초반대라며 자신의 기록이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비범한 사람다운 면모를 보인다.리처드 용재 오닐은 애서가로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문학 잡지와 인터뷰를 나눴다고 했다. 최근에는 음악학에 대해 집중적으로 읽고 있다. 베드 타임 스토리에 대해 물으니 베토벤에 대한 매우 학문적이고 구체적인 책이라 잠들기 전 읽기엔 적절하지 않은 책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 시간에 주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숙면의 세계로 접어든다.때때로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전히 음악이 울리고 있을 때도 있다고 했다. 어제 밤에는 작년에 발매한 8집 를 틀어놓았다. 스스로 “지난 세기의 모든 비올라 작품에 대한 경의를 담은 앨범”이라고 소개했던 4년 만의 신보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실황 녹음으로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들의 깊고 진한 울림을 전해주는 앨범이다.비올라와 영국은 묘하게 닮았다. 영국 특유의 음울하고 축축한 날씨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한밤중에 틀어놓으면 복합적인 감정이 일렁인다. 그 앨범 덕에 나는 윌리엄 윌튼, 프랭크 프리지, 요크 보웬, 벤저민 브리튼이라는 낯선 음악가들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리처드 용재 오닐은 윌튼 때문에 비올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윌튼을 ‘천재’라고 표현했다. 윌튼의 음악에 대해 “함축적이고 심오하다”고 말했다.사실 음악은 내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음악은 우리 모두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삶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다.음악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인터뷰이가 리처드 용재 오닐이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음악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이 그의 심연에 들어갔다 나오면 이런 답이 되돌아온다.“나의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런 걸 체험한 적 있다. 어느 날 음악이 강렬하게 말을 걸었고 나를 진화시켰으며 내 마음을 열었다. 천 번도 넘게 들은 음악을 지금까지도 CD, MP3로 계속해서 듣고 있는데 여전히 나를 변화시키고 감동을 전해주는 순간이 찾아온다. 사실 음악은 내 것도, 당신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다. 음악은 우리 모두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 삶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다. 사실 요즘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엔터테인먼트를 혼동한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물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깊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의 핵심 요소가 바로 듣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내가 디토를 시작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앙상블 디토가 10주년을 맞이했다. 실내악 프로젝트인 디토는 국내 클래식의 문턱을 한 단계 낮추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억할 만한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2008, 2009년 예술의전당 유료 관객 1위, 매해 10개 도시 투어, 일본 데뷔 첫 해에 7천 석 매진. 한자리에 모이기 좀처럼 어려운 클래식계 거장과 라이징 스타들이 협업하며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왜 클래식 음악회에는 젊은 관객이 오지 않는 것일까, 그들을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물음표가 디토의 출발점이었다.올해 디토 페스티벌의 ‘장관’은 7월 1일에 펼쳐진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지금 내가 연주하는 이유”라고 고백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실내악이 그날 공연된다. 모든 연주가의 멘토이자 대선배인 정경화와 그녀를 동경하며 자라온 디토의 4인방 리처드 용재 오닐, 임동혁, 문태국, 성민제는 10주년 갈라 콘서트 에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를 연주한다.요즘 한국 클래식 음악의 신선하고 젊은 색깔이 궁금한 관객들에겐 앙상블 디토 역시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 세계 공신력 있는 콩쿠르에서 실력을 인정 받은 바이올리니스트 유-치엔 챙과 대니 구, 첼리스트 문태국, 클라리넷 연주가 김한이 낯설고도 낯익은 순간을 선사한다.리처드 용재 오닐은 디토라는 큰 프레임 안에서 음악 감독과 연주가 사이의 균형을 고민해왔다. 언젠가 본인의 에세이집에서 이런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비올리스트로 자란 나는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이입시키는 것을 훈련 받아온 음악가였다. 늘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어했지만, 선두에 서는 솔리스트가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런 나에게 디토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은 처절하게 힘든 경험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터득한 점은 이렇다.“음악을 하다 보면 서로 잘 맞는다는 것이 그만큼 좋은 공연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평소에는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무대에서는 서로의 소리가 좋지 않게 들리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실제로 무대에 올라가 함께 연주를 해보면 꽤 잘 어울리는 경우가 있다.(웃음)”매해 디토 페스티벌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이런 순간 때문일 것이다. 귀로 흘러 들어온 음악이 온몸과 정신까지 투과하여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감흥을 일으키는 일련의 과정 말이다. 리처드 용재 오닐 스스로에게 인상 깊은 앙상블로 기억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피아니스트 임동혁과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피 재키브가 합류했던 2008년, 디토의 두 번째 시즌은 가장 최고의 해 중 하나였다. 멤버들 간에 마음이 잘 맞았고 정말로 재미있게 음악을 했다.” 이번 2017 디토 페스티벌에서 임동혁은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과, 스테판 피 재키브는 피아니스트 지용과 듀오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클래식 스타의 만남도 올해 디토 페스티벌에서 이루어진다. 리처드 용재 오닐과 클래식 기타리스트 무라지 카오리가 펼치는 리사이틀 에서는 사람의 귀에 가장 편안한 중음역대를 가진 두 악기의 하모니를 감상할 수 있다.사실 리처드 용재 오닐이 일말의 고민 없이 뽑은 디토 페스티벌 ‘최고의 명장면’은 2016년에 나왔다. 라는 타이틀로 열린 작년 페스티벌에서 리처드 용재 오닐은 베토벤이 남긴 현악사중주 전곡을 모두 연주하는 도전을 감행했다.“한국에서는 처음 시도한 공연이었다. 굉장히 크고 어려운 프로그램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15~16시간 이상 지속되는 공연 내내 객석에서 관객들이 자리를 지켜준 점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베토벤을 알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에 대해 계속 공부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정말로 수천 시간에 걸쳐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공부했다. 특히 작년에 베토벤으로부터 얻은 깨달음이 많다.”리처드 용재 오닐은 말과 글의 톤, 그리고 무게가 놀랍도록 일치하는 사람이다. 작년에 그가 출간한 에세이 집 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의 글은 단단하고 담백하다. 본인 인생사의 지극히 내밀하고 쓰라린 부분을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전곡과 관련된 스토리와 함께 이리저리 교차시키며 담담하게 써 내려갔다. 솔직하고도 사색적인 화법은 텍스트에서도 이어진다. 울림을 전해주었던 문장들의 일부를 발췌해본다.“음악은 희극과 비극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인생의 가르침을 전해준다.”(88p) “우리의 활이 현에 닿기 전에는, 한 명의 연주가가 희생과 헌신, 인내, 그리고 책임을 쏟아부으며 한 악기의 일인자가 되기 전에는, 악보 한 장 한 장에 농축되어 있는 가치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것이다.”(156p) “음악은 말로 할 수 없는 숭고함과 우리를 이어주는 이름 없는 끈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이고, 그 죽음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궁금해하는 존재다. 음악가로서 나는 내가 살아갈 모든 인생을 음악과 바꾸는 것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167p)베토벤은 음악을 작곡할 때 바덴 지방 근처에 있는 황금빛 밀밭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영감을 얻곤 했었다. 리처드 용재 오닐에게 ‘영감’이라 명명할 수 있는 강렬한 무언가는 뜻밖에도 미술관에서 찾아오곤 한다. 뉴욕의 모마(MoMA), 구겐하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더 브로드 뮤지엄 등 즐겨 찾는 미술관 리스트와 아이 웨이웨이, 아니시 카푸어, 리처드 세라처럼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이 빠른 속도로 쏟아졌다.“하늘 끝까지 올라가거나 아래로 끌어내리는 아니시 카푸어의 작품은 정말 흥미롭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음악도 이와 비슷한데, 어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하늘 높이까지 끌어올리고 또 어떤 음악은 내면 깊은 곳으로 소용돌이치게 만든다.”리처드 용재 오닐을 읽고 듣고 만났던 지난 봄날, 내 안에서도 고요한 진동이 일었다.※ 오는 6월 14일부터 7월 2일까지 디토 10주년 페스티벌 이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피아니스트 임동혁,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 클래식 기타리스트 무라지 카오리 등 화려한 라인업이 기다리고 있다. 자세한 공연 일정은 웹사이트(www.dittofest.com)를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