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사러 나고야에 가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나고야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그릇을 사러 간 어느 작은 가게에서 내가 담아온 건 일본 디자인이 지닌 일상성의 가치와 그것을 소중히 대하는 그들의 정성 어린 태도였다. | 일본,아날로그,그릇

나고야에 왔다. 그릇을 사려는 심산이었다. 당장 쓸 그릇이 없어 유난스레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다. 밥과 반찬을 담는 기능 이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 그리고 그걸 특별하게 여기는 작은 가게하나가 내 행위에 심리적인 동기를 불어넣었다. 나고야 남서쪽 시즈호구에 위치한 아날로그 라이프(Anlaogue Life) 숍은 토론토 출신의 캐나다인 이안과 일본인 미츠에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어느 여자대학 근처의 그곳 주택가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고요해서 방향을 가늠하며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이 도리어 어색할 정도였다. 한참을 맴돌던 중 구글맵이 어느 모퉁이 오래된 목조 가옥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나 대문에 명함만한 크기로 ‘아날로그 라이프’라고 쓰여 있을 뿐, 대체 어디가 입구인지 찾을 수 없었다. 오래된 일본 집 앞마당에 소나무와 동백 꽃 몇 송이만이 속절없이 오후의 나른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후, 조심스레 그윽한 나무 미닫이 문을 열자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이 나타났다. 가지런히 신발을 벗고 2층으로 올라가서야 날 반겨주는 주인 미츠에를 만났다.90년 전쯤 지어졌다는 쇼와시대의 가옥 창으로 햇살이 길게 뻗쳐 들어왔다. 천장과 기둥을 선으로 이어준 목조, 다다미 바닥이 만들어낸 공간 속에 놓인 그릇과 화병, 철 스툴, 선반의 도자기와 정연한 숟가락들이 찬찬히 눈에 들어 왔다. 그 풍경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인 물건들이 어우러져 벌이는 모종의 세리머니처럼 보였다. 차가운 다다미 바닥 탓에 발이 시려왔다. 때마침 도착한 이안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상기되어 있던 나에게 공간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주었다. “원래 이곳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홈 스튜디오였는데, 그녀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우리가 오기로 결정했어요. 명상의 공간 같기도 한 이곳이 장인정신과 정제된 고요함, 컨템퍼러리 스타일링이 조화를 이룬 미적으로 완벽한 숍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했죠.” 소리 야나기, 이사무 노구치에 이끌려 먼 일본까지와 정착한 남자와 패션일을 하던 나고야 출신의 여자의 이상적인 합일이 세상 단 하나뿐인 시간과 이야기를 품고 있는 이 공간에서 이뤄진 것 같았다. “우린 최대한 이 공간의 오리지널한 분위기를 살려두고 싶었어요. 원래는 후즈마(슬라이딩 도어)로 구분된 세 개의 다다미방이 있었는데, 문을 없애고 공간을 오픈시켰죠. 진흙 회반죽으로칠한 낡은 벽과 복도 쪽의 나무 바닥도 그대로 두었어요. 단지 심플한 느낌을 주기 위해 공간 몇 군데에 유리 파티션을 가미했죠.”사람도 그렇지만 물건은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그 존재감을 다르게 발휘하는 법. 목재 선반과 정갈한 나무장, 어느 구석진 공간에 놓인 부부의 감식안으로 고른 물건들이 각각의 유려한 형태와 색감을 발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일본 전통의 테크닉을 모던한 형태로 불러들인다는 브랜드 컨셉트를 가진 S 의 반들반들하며 유용한 식기들, 디자이너이자 뮤지션인 오사무 사루야마(Osamu Saruyama)의 우아한 백색 그릇, 일본의 단단한 노송나무로 제작 된 아즈마야(Azmaya)의 옷걸이, 나라현의 천연 나무와 라탄을 정교하게 짜 만든 요헤이 마루야마(Yohei Maruyama)의 스툴, 코튼과 실크, 리넨을 감각적으로 패치워크해 만든 주머니, 다양한 두께의 대나무 껍질로 오이타 지역의 장인이 만든 바구니... 단순한 물건 이상의 미학적 차원을 점하고 있는 듯한 아이템들은 동시에 분명한 쓰임새를 드러내고 있었다.오래전부터 일본 도자기에 매료된 이안은 일본 각 지역의 장인과 디자이너들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공방을 찾아다녔고, 공예 전시와 도예 페어에서 만난 좋은 그릇들을 눈여겨봐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셀렉션’의 명분을 강하게 드러내는 그들의 아이템은 묘한 어울림이 있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라 불리는 영역에는 밝고 팬시한 것들이 많은데, 우리를 사로잡는 건 주로 어둡고 무거운 것들이에요. 과하게 디자인되지 않고 물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걸 좋아하죠. 아주 단순하면서도 재료를 매만진 손길이 드러나는 물건이 아날로그 라이 프의 스타일이에요.” 어둑한 조도로 떨어지는 몇 개의 작은 조명, 옛 목조가옥이 드러내는 짙은 밤색들, 부부가 입고 있는 무채색조의 스웨터까지 모두 아날로그 라이프의 묵직하고 어두운 톤과 어우러져 있었다.난 틈틈이 집으로 가져갈 몇 개의 아이템을 골랐다. ‘무엇에 쓰는 물건이고?’ 싶은 것보다는 부엌 살림에 유용할 것을 주로 집었다. 야마구치현 근처의 가마에서 제작된 오사무 사루야마의 접시 두 개와 컵, 천연염색한 핸드메이드 네이비 톤의 코튼 패브릭, 백색 유약에 첨벙 담그고 나온 듯한 세라믹 티스푼 두 개와 S 의 말간 옥빛과 분홍빛 밥그릇을 샀다. 메이지시대 때부터 이어져온 가마사다 공방에서 제작된 하가마 무쇠솥이 너무 탐났지만 4kg이나 되는 무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려놓았다. 내가 머물던 몇 시간 동안, 세 명의 손님이 숍에 들렀는데 주인 마츠에와 친근하게 몇 마디 나누며 필요한 물건을 산뜻하게 구매하는 일상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 물건들이 고객들의 평범 한 일상에서 쓰였으면 해요. 일본 문화 안에는 물건의 물성과 외형이 쓰임의 정도나 시간의 흔적을 머금고 변해가는 것에 대한 존중이 있어요. 오히려 물건을 새것처럼 보이게 유지하려 는 태도는 별로 없죠.”일본의 컨템퍼러리 디자인은 놀랍도록 그들의 일상성과 맞닿아 있다. 그들의 그릇, 숟가락과 냄비, 찻잔과 주전자 같은 매일의 물건들을 특별하게 하는 건 ‘만드는 손’과 ‘쓰는 손’이 나눠 갖는 정성과 애정에 있다. 탁월한 디자이너가 곧 숙련된 장인으로 존중받는 지점이 그 옛날 민예로부터 이어지는 현대 일본 디자인의 특별함이 아닐까? “일본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공방이 전역에 있어요. 공방들은 여전히 가업의 형태로 숙련된 핸드메이드 방식을 고수하며 운영되고있고, 무엇보다 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어떤 고립 속에서 일본 특유의 장인적 테크닉을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유지될 수 있었죠.” 일본 디자인이 시각적, 행위적으로 전통과 단절되지 않은 까닭을 늘 궁금해 해왔던 내게 이안이 거들어준 이야기가 명쾌하게 다가왔다. 바라던 대로 이곳 나고야 까지와서 그릇을 사고야 말았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음을 떠올리는 요즘, 일상의 아름다움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지기 시작했다. 호젓한 동네를 걸어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말이다.*아날로그 라이프 www.analoguelif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