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레볼루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금 재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활자가 우리 주위를 휩쓸고 있다. | 로고

얼마전, 당찬 선언을 목격했다. 디올 역사상 첫 여성 아티스틱 디렉터로 취임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처음 선보인 쇼윈도 속 ‘디올 레볼루션(DIO(R) EVOLUTION)’ 디스플레이는 그 크기만큼이나 거대하게 다가왔다. 이번 봄, 패션계가 가장 뜨거운 찬사를 보낸 브랜드 중 하나인 디올은 여느 브랜드가 화려한 디자인으로 존재감을 분출할 때 되려 절제하고 세련된 ‘Christian Dior’ 스트랩 민소매 상의와 시스루 스커트로 서정적인 컬렉션을 완성했다. 단지 로고를 넣은 정도였다면 ‘디올 혁명’이란 표어에 떨림을 느낄 이유는 없을 거다. 펜싱복에서 영감 받은 벨크로 베스트나 맵시 있게 드러난 긴 소매 셔츠의 ‘CD’ 자수와 더불어 가장 눈에 띈 옷은, 아름답게 수놓은 은빛 비즈 장식 스커트 위에 걸친 간결한 반소매 티셔츠였다.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여야 한다(We Should All Be Feminists)’라는 문장은 급격하게 보수화한 프랑스 정치 상황과 동떨어지지 않았다. 영국 는 이 티셔츠 룩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2017년도 S/S 룩으로 골랐다.다시 로고로 돌아가보자. 하이패션이 ‘표어’와 ‘로고’에 요즘처럼 몰두한 적은 지난 십수년간 없었다. 한바탕 휩쓸고 간 스트리트웨어와 하이패션의 만남이 여전히 순항 중이란 점은 이 대세가 빛을 발하는 중요한 이유다. 스트리트웨어가 하이패션과 거리를 두던 시절이라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할까 봐 눈치라도 봤겠지만, 에이셉 라키가 만든 브이론(VLONE) 티셔츠를 입고 디올 옴므의 캠페인 모델이 되는 시대라면 오히려 ‘눈치’가 어색할 지경이다.2017년 하이패션의 필수 요소가 된 ‘로고 티셔츠’들은 삽시간에 파리와 런던, 밀라노와 런던 등지로 퍼졌다. 10년 전이라면, 거리 좌판 모방 제품으로 믿을 법한 구찌의 빈티지 ‘GG’ 로고 티셔츠가 아이돌 가수부터 패션계 유명인사의 인스타그램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 뎀나 바잘리아가 제안한 ‘Balenciaga’ 자수 야구모자는 들어오자마자 품절되어 웃돈이 붙었다.뎀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발렌시아가는 2017년도 F/W 남성복 컬렉션에선 모회사 ‘케링(Kering)’ 그룹 로고를 고스란히 티셔츠 위에 찍는 재치를 부렸다. 루이 비통 모에헤네시라고 대문짝만 하게 적은 컬렉션을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베트멍의 록 밴드 패러디 티셔츠와 그래피티에 기반을 둔 로고 후디와 스웨트셔츠 역시, 데뷔 쇼부터 애정을 쏟은 비대칭 트렌치 코트 보다 수백 배는 많이 팔렸다.이처럼 로고가 화두로 떠오른 데는 2010년대 스트리트 웨어의 열풍을 몰고 온 후드 바이 에어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충성도 높은 신흥 시장 VIP 고객들을 위해 패션 하우스들이 ‘로고’를 드러낸 경우야 셀 수 없지만, 디자이너 셰인 올리버가 HBA로 이룬 성취는 스트리트웨어와 하이엔드 패션의 만남이라는, 지난 수년간 가장 파괴력 큰 유행의 시발점이었다. 이제 HBA 로고를 걸치고 다니는 패션 피플은 드물지만 후드 바이 에어는 ‘허슬러(HUSTLER)’ 표어 아래 당당히 ‘카피라이트’ 마크를 표기하며 하나의 ‘클래식’을 만들 작정이다. 여전히 선명하게 구분되는 전위적 디자인은 덤이다.알레산드로 미켈레에 이어, 최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바뀐 패션 하우스들이 가방 비즈니스에 과거 유산을 드러내려는 모습 또한 로고와 연결되어 있다. 금속으로 만든 빈티지 CD 로고를 새긴 클래식 디올 자가드 캔버스 가방은 단언컨대, 수년 전만 해도 그 어떤 여성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디자인이다. 하지만 간결한 검은 드레스를 입은 모델의 하얀 손목이 움켜쥔 클래식 디올의 자태는 과거와 현재의 우아한 조우 그 자체였다. 앤서니 바카렐로의 생 로랑은 하이패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니셜, ‘YSL’을 아찔한 검정 스트랩 스틸레토 힐에 넣었다. 생 로랑을 편애하는 여성이라면, 누가 이 매력적인 유머를 거부할까?그뿐인가? 패션과 음악을 넘나들며 한 시대를 대표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 이름난 피터 새빌은 이제 다시 새 도약을 준비하는 파코 라반과의 캡슐 컬렉션으로 ‘활자’의 힘을 증명했다. 파코 라반의 아티스틱 디렉터, 줄리앙 도세나는 과거 파코 라반에 명성을 가져다준 플라스틱 디스크 조각 드레스와 머리를 덮은 스판덱스 마스크로 ‘미래 노동자들의 유니폼’을 재창조했다. 둘이 함께 만든 ‘퓨처섹스(FUTURESEX)’ 티셔츠는 쉽게 찍어낸 공산품이라기 보단 한 벌의 ‘에디션’ 예술 작품에 가깝다. 실제 이 로고를 넣은 티셔츠들은 각 1백장씩 한정 수량만 판매하고 더 생산하지 않는다.활자와 슬로건의 강세 속,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현상은 동시대 디자이너들이 현실을 ‘메타포(Metaphor, 은유)’ 대신 ‘시밀레(Simile, 직유)’로 받아들이기 시작했 다는 점이다. 모델의 건강 논란이나 동물성 소재처럼 패션이 사회적 화두에 들어온 경우야 있었지만, 2017년 패션계는 짐짓 관계성을 부정하던 ‘사회’와 ‘세계’로 눈을 돌린다. 작년 가을 열린 S/S 컬렉션이 전초전이었다면 올 2월과 3월에 걸친 2017년도 F/W 컬렉션은 더 선명한 주장들이 ‘표어’와 함께 대두했다.지난 뉴욕 패션 위크에서 가장 ‘정치적인 액세서리’였던 퍼블릭 스쿨의 ‘메이크 아메리카 뉴욕(Make America New York)’ 모자는 명백히 도널드 트럼프의 ‘Make America Great Again’을 비꼰 표어였다. 퍼블릭 스쿨 듀오의 다오이 초는 와의 인터뷰에서 ‘고립주의와 민족주의, 외국인 혐오증의 등장’에 우려를 표하며 이 65달러짜리 야구모자의 판매 수익 전부를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에 기부한다고 선언했다.(ACLU는 무슬림 입국을 금지하는 트럼프의 행정 명령이 부당하다는 행정소송을 제기한 단체 중 하나다.)뉴욕에서 자신의 남성복 컬렉션과 캘빈 클라인 컬렉션을 선보인 라프 시몬스 역시 컬렉션을 보러 온 이들에게 '함께 걷자(WALK WITH ME)'는 메시지를 전했다. 두툼한 코트부터 헐렁한 벨트와 티셔츠에 이르는 메시지 나열은 라프 시몬스의 전매특허였지만, 그 언어 만큼은 이전의 고독한 그래픽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방식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메시지를 전하는 수단으로 표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정치와 패션이 떨어져 있지 않다는 당연한, 아니 당면한 동시대 디자이너들의 과제였다.미국 소수 인종 디자이너가 이끄는 퍼블릭 스쿨의 모자를 꼭 하나 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든 '슬로건 컬렉션'의 대단원에는 개인적으로 리카르도 티시의 마지막 지방시 컬렉션이 있다.2000년대 여성복 디자이너 중 가장 아름다운 발자치를 남기며 여성과 남성가릴 것 없이 수많은 추종자를 낳은 그는, 마지막 여성복 컬렉션을 레드 단 한 색상으로 물들였다. 컬렉션의 시작을 선언하는 'GIVENCHY FW 17-18' 흰색 로고가 빨간 머리 장식 아래 드리우고, 숨을 턱 멈추게 했던 2006년의 시스루 블라우스부터 카니예 웨스트를 위시한 힙한 음악가들의 전성기를 연 그래픽 스웨트셔츠까지, 모든 모델은 선글라스와 손목, 목 둘레에 해당 시즌을 표기한 흰색 활자를 붙인채 디자이너의 '자체 회고전'을 축복했다.총 스물일곱 벌의 컬렉션은 일반적인 패션 하우스치고는 적은 편이었지만, 그만큼 압축한 정수만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처럼 보였다. 뭉쿨한 마무리가 추분하고 장엄하게 느껴진 데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활자'의 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