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슈카 마쿠카, 이 이름을 기억할 것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수년에 걸쳐 아트페어와 비엔날레를 오가다 고슈카 마쿠가(Goshka Macuga)라는 아티스트의 이름을 발견했다. 폴란드 태생으로 런던에서 활동하는 이 미술가는 지난해 밀라노와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프랑수아 피노와 미우치아 프라다가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급진적인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작가는 그림, 조각, 태피스트리, 무대미술, 인공지능 등을 다루며 예술이 사회·정치적 맥락과 가지는 연관성에 대해 자신만의 관점을 야심차게 제시한다. 그리하여 게으른 관람객으로 하여금 역사적 주체로서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한다. 인터뷰 역시 그랬다. 무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질문들을 보내자 A4 5장에 빽빽이 적힌 답신이 돌아왔다. | 고슈카 마쿠가

작년 봄, 밀라노의 폰다지오네 프라다에서 선보인 개인전에는 조각작품 ‘국제협력 지적기관(Intellectu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Co-Operation)’이 매우 큰 규모로 설치되었다. 시스테나 건물 3개의 방에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마틴 루터 킹, 칼 마르크스 등을 청동 머리로 제작해 분자 구조처럼 이어 붙일 생각을 어떻게 했나?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다양한 시대의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상가들 사이의 상상의 만남을 실현시켜보고 싶었다. 예술을 참고하는 수단으로서의 대화와 연설을 통해 지적인 교류를 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말이다. 사전조사 과정에서 나는 역사적이고 현대적인 60여 건의 사건과 관련된 편지나 글을 선택했고, 그것들을 살펴보고 주요 인물의 두상 조각을 만들기로 결정하면서 우리 인간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본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대화는 실제로 있었던 글을 그대로 인용했고 어떤 것은 편지 형식으로 편집했는데, 예를 들면 전쟁을 종식시킬 방법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의 대화나 노동자 계급에 가해지는 사회적 탄압을 멈춰야 하는 중요성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의견 교환 등은 당시 젊은 세대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특정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도록 독려했다. 1931년에 아인슈타인은 정치가들이 꾸린 정부 대신 지식인들이 구성한 조직이 시민을 다스리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는데 그러한 아이디어는 현 시점에 더욱 시급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대화는 역사에서 파괴적인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가이드로 아직도 충분히 효용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슈카 마쿠가라는 이름이 탄생한 당신의 조국 폴란드에서는 어떻게 자랐나?자유로운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아버지가 자신의 아티스트 친구에게 조각과 그림을 배우게 했고, 예술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공산국가인 폴란드에서의 내 삶과 내가 받은 교육은 책에 쓰인 역사만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말고 더 공부해서 진정한 진실을 알아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폴란드를 떠나 런던에 갔다. 원래는 2주만 있을 예정이었지만 더 머무르기로 했다. 그 당시 폴란드는 급변하기 직전이었지만 나는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고 새로운 곳에서 스스로 인생을 변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다행히 런던은 아주 생동감 넘치고 신나는 곳이었다.카셀과 카불, 다른 공간에 위치한 두 개의 반원에 여러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해놓은 태피스트리는 은유적으로 공존하는 현실과 겹쳐진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반원을 거울처럼 비추고 완성한다.처음 영국에 왔을 때는 영어도 잘 못했다고 알고 있는데 영국 미술계에서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당신이 2008년 터너 상에 노미네이트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내가 막 영국에 도착했을 당시 yBa의 선전은 매우 흥미롭고 고무적이었다. 나는 그들의 언어나 뿌리, 그들이 작품에 투영하려는 문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너무 국수주의적이라 느껴졌다. yBa는 갤러리, 비평가, 예술 잡지는 물론 컬렉터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내가 그곳에 낄 수는 없었다. 폴란드 악센트도 강해서 말투도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을 거고 그들이 하는 말을 나 역시 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96년에 골드스미스를 졸업했을 때 사람들은 영국적인 미술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적인 것에는 한계가 있고 세계에는 더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까. 박제된 동물을 통해 죽음을 표현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들 말이다. 또한 외국 큐레이터들의 yBa에 대한 흥미도 떨어져갔고, 더 이상 영국 아티스트와 일하고 싶어 하지 않게 됐다. 자연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된 거다. 외부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내부의 정치와 사회계층 때문에도 수명이 짧았다. 나는 영국인으로 여겨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슬프게도 폴란드 예술계도 나를 폴란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폴란드보다는 영국에서 전시를 가질 기회가 많았고 감사하게도 2008년에는 터너 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베니스에 갔을 때 한 해 40만 명의 관객이 찾는다는 페기 구겐하임 컬렉션 대신 푼타 델라 도가나에 갔다가 그룹전 에서 당신의 작품을 처음 보았다. 마주보고 있는 두 점의 거대한 태피스트리 작품 ‘그것이 바로 그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 1, 2(Of what is, that it is; of what is not, that it is not 1, 2)’를 고안했을 때의 얘기를 듣고 싶다.이 작품은 도큐멘타(13)를 위한 작품이었는데 너무 힘들게 작업했다. 당시 나는 예술가로서 나의 역할과 더 폭넓은 사회적 이슈를 고민하고 풀어내는 역할에 대해 자문했었다. 도큐멘타가 개최되는 카셀의 프레데리치아눔 미술관 원형 홀의 건축학적인 특징은 카불에서도 똑같은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반은 진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반원. 카셀과 카불, 다른 공간에 위치한 두 개의 반원에 여러 역사적인 사실을 나열해놓은 태피스트리는 은유적으로 공존하는 현실과 겹쳐진다. 진실의 한쪽 면만 대변하는 종군기자의 모호한 역할을 표현하면서 나는 카셀과 카불에서 열린 두 건의 문화 이벤트에서 사진을 찍었다. 첫 번째 태피스트리를 위한 이미지는 카셀에서 2011년 10월에 열린 아놀드 보드 프라이스 상의 수상식에서 찍었다. 카셀의 외이 공원 잔디밭에서 상 선정 위원회와 큐레이터와 임원으로 일한 스태프 그리고 내가 등장하는 사진으로 목가적인 세팅을 하고 약간 허구적인 이벤트를 연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 있는 바흐에 바부르(Bagh-e Babur) 가든 가건물의 휘어진 벽에 설치한 두번째 태피스트리는 2012년 이 가든에서 예술가들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을 나열해놓은 것이다. 노동자, 아프간 정부의 문화부 장관, 아프가니스탄 국립박물관장, 유네스코 소속 고고학자, NGO 직원, 기자 등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묘사했다. 이 평화로운 공원이 현대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문제, 즉 붕괴와 회복, 거짓과 진실의 정치적·경제적 문제를 다루는 애매한 배경이 되는 거다.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반원을 거울처럼 비추고 완성한다. 또 다른 의도는 대표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즉, 진실을 말하고 나누는 기준을 회의적으로 탐험하는 것. 그래서 제목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진실에 대한 정의를 변형한 버전이다.(“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이다.(To say of what is that it is not, or of what is not that it is, is false, while to say of what is that it is, and of what is not that it is not, is true.)”)지난해 봄 뉴욕 뉴 뮤지엄에서의 전시는 지난 작품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다. 그렇게 여러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작가로서 어떤 새로운 감상이 찾아왔는지 궁금하다.과거 프로젝트들이 한 전시 공간에 놓여지는 것을 보는 일은 항상 흥미롭다. 각 작업은 관객이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나를 대표하며 한마디로 엄청난 양의 리서치 자료들 속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이 영화라는 매개에 대해 토론할 때 말한 것과 비슷하기도 하다. 영화는 다른 역사를 하나의 장으로 불러오는 능력이 있다는 말.당신은 그림, 조각, 설치, 태패스트리 등 매우 다양한 매체를 다룸에도 뉴 뮤지엄의 전시 제목은 이었다. 강력한 인상을 선사하는 태피스트리 작품은 당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지난 20여 년 동안 거의 모든 전시에서 대부분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아트 마켓이 예술가들에게 특정 타입의 작품을 결과적으로 강요하게 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컬렉터들을 위해 대표작을 복제 생산하게 되면 예술계는 빈곤하고 피폐해진다.(마쿠가가 태피스트리 작품의 많은 에디션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세계에서 단 두세 명의 컬렉터만이 태피스트리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는 미술관에서 구입했다. 행운의 컬렉터는 엘리 & 에디트 브로드 부부, 프랑수아 피노, 미우치아 프라다로 알려져 있다.) 태피스트리 작업을 시작한 건 2009년 벨기에 앤트워트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에서 부터였다. 아프리카와 인디언의 공예작품을 포함해서 다양한 텍스타일 아트가 전시됐는데, 1920년대의 정치적인 선전 문구를 담은 배너부터 현대미술 작품까지 모두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인 뜻을 담고 있었다. 같은 해 여름에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플루스 울트라(Plus Ultra)’ 역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정치적 모토에서 따온 작품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군사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많은 태피스트리를 선전 형태로 만들게 했다. 영어로 번역하면 ‘보다 더 멀리 나아가다’ 정도 될 ‘플루스 울트라’는 카를 5세의 좌우명이었고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의 역사적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두 기둥을 가로지르게 설치된 가로 24m 태피스트리의 한쪽에는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있는데 미국 달러 기호가 거기서 나왔다는 가정을 보여준다. 다른 쪽에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그려놓았고, 중앙에는 G20 정상 회담 회원들을 카를 5세의 초상화와 나란히 그려놓았다. 세계 권력의 대표자들을 구름 위에 붕 뜨게 하고 그 아래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배를 타고 가는 난민들이 있다.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사회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또 다른 태피스트리 작품으로는 영국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진행한 ‘야수의 본성(The Beast of Nature)’이 있다. 1939년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영국에 처음 선보인 곳에서 ‘게르니카’의 역사적 상징성과 의미를 되새긴 아카이브 프로젝트라고 들었다.화이프 채플 갤러리는 2009년 리모델링을 하면서 아카이브 활용 방안을 고심했다. 그 결과 아카이브 전문 큐레이터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그때 큐레이터 나이아 이야쿠마키는 갤러리의 아카이브에 남겨진 피카소 전시의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고 내 방식대로 응답하는 작업을 만들도록 해주었다. 그때 나는 회의장 중앙에 원형 테이블을 설치하고 ‘게르니카’의 태피스트리 버전을 걸었다. 이 ‘게르니카’ 태피스트리는 1955년에 피카소의 허락 하에 넬슨 록펠러가 주문 제작한 거였다. 이는 전쟁의 잔혹성을 떠올리자는 의미에서 뉴욕 UN 건물에 영구 대여 전시 중이고 1985년부터는 주로 UN 본부에 있는 UN 안전보장이사회의 회의장 밖에 걸려 있었다. 2003년 2월 5일에 이라크 침공이 임박해서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의 연설을 듣기 위해 이사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작품이 보이지 않도록 푸른색 커튼으로 가리고 이사회 회원국의 국기를 걸어놓았다. 피카소가 직접 그린 ‘게르니카’는 당신 말대로 스페인 내전이 끝나가던 1939년에 화이트 채플에서 전시되었는데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극우파에 맞서 싸우도록 사람들을 선동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하겠다. 전시가 진행된 일 년 동안 원형 테이블에서는 전쟁과 프로파간다 그리고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각종 세미나와 강의, 집회 등이 수차례 이루어졌다. 태피스트리 작업은 역사가 어떻게 현대 정치 현장과 교차하는지 탐색하고 또 통합하는 데 가장 적합한 매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준 작업이었다.당신의 태피스트리 작업들은 거대한 스케일이 주는 에너지가 압도적이다. 의도된 건가?작업의 크기는 보통 전시 공간에 맞춰 결정하지만 클수록 좋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작품은 이미지를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들의 크기와도 관계가 있다. 내 작품은 정치적인 뜻을 담고 있다, 르 코르뷔지에 작품처럼. 그는 태피스트리를 ‘유목민의 벽화’라고 불렀고, 선전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나에게는 잘 맞는 매체다.‘플루스 울트라’의 경우 유럽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극동 아시아 사람인 내게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작품의 30%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는 우려가 드는 게 사실이다. (많은 현대미술이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당신의 작품을 우연히 보고 뭔가 특별함을 느꼈다. 당신도 한 인터뷰에서 완전히 폴란드적인 내용의 전시를 시카고나 비엔나에서 할 때 사람들이 이해한다는 걸 느낀다고 했다. 이건 예술의 어떤 속성에 기인하는 걸까?사람들은 예술가의 의도를 전부 다 알지 못하더라도 작품과 연결될 수 있다. 대부분의 예술작품에 가까이 가려면 조금만 조사를 하면 된다. 작품을 접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전시회를 개인적인 배움의 공간으로 활용해도 좋다. 예술은 완벽하게 다 드러내거나 즉각적으로 이해될 필요는 없다. 그래야 더 흥미로우니까. 작품이 너무 1차원적이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면 사색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거다. 나는 모든 작업을 할 때 실제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만큼이나 사전 조사 과정을 즐기며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를테면 폰다지오네 프라다 전시의 경우 평소 6개월에서 일 년 정도 걸리는 과정이 이번에는 일 년 반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된다. 관객들이 원한다면 그들도 같은 과정을 약간이라도 거치기를 바란다.당신은 예술이 현재의 정치 및 사회 상황에 대해 공개 토론을 벌이게 하고 사회적 변화에 대해 고무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것 같다. 마치 조지 오웰이 에서 적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라는 구절이 떠오르기도 하고 도큐멘타(13)의 총감독이었던 캐롤린(Carolyn Christove-Bakargiev)이 인터뷰에서 한 말도 생각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상황을 고려하면 미술 전시는 미술을 위한 기획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네트워크로 묶인 세상에 살고 있고, 시리아에서는 아직도 사람이 살해 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들과 당신의 예술관이 맥락을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사회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그런 주제를 아예 피하는 거다. 물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 과거나 역사에 대해서 자기 입장을 밝히는 것이 훨씬 쉽다. 문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의 분노나 좌절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그것에 대한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이 충분한가 등일 거다.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것, 영국의 브렉시트 등은 수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척하며 행복하게 하던 일이나 계속하거나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작품 활동에만 몰두하기는 어렵다. 이런 국가들의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들과 그들이 창조할 현실은 많은 사람들과 예술과 문화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이미 우리는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정치인들의 잘못된 결정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다양한 방향을 제시하고 인식 수준을 높이는 데 예술이 사용될 수 있고 또한 사람들에게 동일한 신념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소속감을 줄 수 있다.뉴 뮤지엄 전시 이후 또 다른 프로젝트가 있었는지, 미술애호가들이 손꼽아 기다려온 ‘그랜드 투어’의 해를 맞이하여 선보일 작업이 있는지 궁금하다.작년 10월 런던의 데이비드 로버츠 예술재단(DRAF)에서 무용 안무를 선보였다. 무용이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작업에 사용했고 무용의 세계를 접하여 매우 흥미로웠다. 또한 스위스 감독인 스테판 뮐러가 독일 카셀 슈탓츠테아터에서 오페라를 공동작업 하자고 제안했다. 그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한 이후 나는 개념 구조뿐 아니라 무대장치 디자인 작업을 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다. 공연은 6월 3일, 카셀 도큐멘타 14의 오프닝 기간에 맞추어 초연될 예정이다. 이는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작곡가 토마소 트라에타(Tommaso Traetta)의 바로크 형식 작품인 의 미래 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