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의 아날로그적 비트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파워포인트와 랜티큘러라는 독특한 방식을 매개체로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세계를 평면 위에 구현하는 젊은 작가 이정민을 만났다. | 이정민

당신은 미디어 아티스트입니까? “컴퓨터를 잘 못하는데.... 그렇게 불려도 될까요?(웃음)” 한남동의 지익스비션이 얼마 전 청담동에 새롭게 오픈한 지갤러리(g·gallery) 개관 전시의 첫 번째 주인공 이정민 작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이란 전무후무한 신(新) 장르로 주목 받은 그녀는 미디어 아티스트가 틀림없다. 영상과 인터랙티브한 작품을 선보이는 작가이므로.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 기간 설치된 평창홍보관의 거대한 벽과 SKT 사옥 로비에 미디어 파사드 작업을 쏘아 올린 이력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다만 작업 방식이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다. 선물 받은 최신형 노트북이 있는데도 굳이 종이 위에 볼펜을 꾹꾹 눌러 소설을 쓰는 우직한 작가 같달까?디테일한 과정을 알고 나면 그의 작업은 꼭 ‘시지프의 신화’처럼 느껴진다. 끊임없고 무한반복된다.“고생하는 걸 즐기는 것 같아요. 파워포인트 평면 위에 건물을 짓듯이 선 하나하나를 붙여서 그림을 그렸어요. 어느 때는 파워포인트 한 장에 선을 7백 개까지 그어본 적도 있어요. ‘어떻게든 결과만 나오면 되는 거잖아?’라는 쓸데없는 고집이 있어서 단축키도 하찮게 여기죠.” (문서 작업용 프로그램이 본인 몸집 이상의 것을 감당해야 했던 탓에) 애써 만든 작업물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사건도 예삿일이지만 작가는 꿋꿋하다.“다른 툴을 좀 배워서 작업해보는 게 어때?”라는 주변의 안타까운 시선과 걱정 어린 조언도 소용없다. ‘마이 웨이’ 정신이 이정민의 작업을 관통한다.시간을 인터뷰 전날 새벽으로 잠시 돌려본다. 작가의 홈페이지(leejungmin.net)에 올라온 문제적 영상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은 나는 단박에 실망하고야 말았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처럼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하얀 평면 위로 가느다란 실오라기 같은 것이 또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2분 남짓한 그 영상은 마치 테트리스 게임의 1단계처럼 여유만만하고 느릿느릿했다.몇 가닥의 선이 모여 면이 되고, 가구를 만들고, 방을 이루었다가 사진으로 콜라주한 이런저런 실존하는 사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 숨죽이고 보다가도 지극히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것이 갑자기 ‘툭’ 튀어나와서 웃음이 터진다. 어이가 없고 다소 허무하기까지 하다.작가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표현을 위해 파워포인트(Powerpoint) 프로그램을 사용했다.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기능에 있는 ‘매우 빠르게’ ‘빠르게’ ‘중간’ ‘느리게’ ‘매우 느리게’라는 총 다섯 가지 방식의 표현이 작가에겐 “경험한 시간 속도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이상적인 도구인 것이다. “1분이나 2초처럼 정확한 숫자보다 파워포인트의 표현 방식이 우리가 일상에서 말하고 표현하는 시간과 훨씬 똑같게 느껴지지 않나요?”작가는 처음엔 본인의 방, 친구의 작업실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판을 키웠다. 발표를 앞두고 파워포인트의 별거 아닌 기능과 밤새 씨름해본 경험 있는 사람이라면 ‘광화문’의 빼곡한 빌딩 숲과 거대한 공간감의 ‘잠실야구장’을 오직 파워포인트만으로 건설한 작가의 발상과 뚝심이 경이롭게 느껴질 것이다.(반드시 영상으로 감상해볼 것을 권한다. 단 자정 이후 시간은 웬만하면 피할 것!)지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첫 번째 기획전는 이정민과 가구 디자이너 곽철안의 듀오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파워포인트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후 보다 복합적인 평면과 색채를 탐구한 작가의 ‘제2막’을 감상할 수 있다. 아트와 디자인의 접선, 작품과 상품 사이를 유연하게 줄타기해온 갤러리답게 미디어 아티스트와 가구 디자이너의 유쾌한 화학작용을 큐레이션했다.두 작가는 작업의 출발점에서부터 긴밀한 교류를 통해 ‘면’과 ‘톤’의 아름다운 균형점을 찾아나갔다. 공간감과 사실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정민의 모던한 작품과 한복 소재인 오간자 실크를 재료로 제작한 곽철안의 찰랑이는 가구는 갤러리 안에서 보는 이의 시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이정민 작가는 움직이는 영상의 연장선상에서 ‘랜티큘러’라는 새로운 형식을 차용했다. ‘랜티큘러’ 방식은 어린 시절 접었다 폈다 하면 전혀 다른 이미지로 눈속임 하는 ‘책받침’을 떠올려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될 것이다.(랜티큘러는 미디어 아트 특성상 쉽게 소장하거나 설치하기 어려웠던 그동안의 난관에 대한 작가 나름의 고민에서 나온 최선책이기도 하다.)몸을 좌우로 흔들흔들,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여보면 벽에 걸린 작품이 달리 보인다. 작가와 함께 가볍게 운동하듯 몸을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작품을 감상해보니 수고스러움을 즐기는 작가 특유의 ‘성실 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똑같은 그림을 조금씩 다르게 그려서 레이어를 여러 장 겹친 방식을 통해 작품 안에 깨알 같은 디테일을 만들었다. 건축적 요소인 선과 면, 벽, 기둥, 문 등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정적인 듯 보이지만 그 어떤 영상보다 리드미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는 만큼이 아닌, 움직이는 만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사람들이 그냥 놓치고 지나갈 수 있는 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주로 담았어요. 공간이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달까요? 관객들은 이동하면서 작품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요. 움직이다 보면 빛이 들어오다가 다시 사라질 수 있고, 창문이 닫혔다가 열리기도 하고, 건물 벽면에 없던 그림자가 보일 수도 있죠.”어디선가 본 듯한 풍경은 작가가 디지털 세상에서 부유하는 이런저런 일련의 이미지를 콜라주한 것이다. 그래픽과 사진이 교묘하게 편집되어 익숙하지만 실존하지는 않는 새로운 신(Secne)을 마주할 수 있다. 이정민 작가는 실로 검색의 여왕이다. 구글 세계를 부유하며 작업의 재료를 그러모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서 건져 올린 이미지를 마치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용접한 세상이다. 작가가 상상을 통해 그 세계를 완성했듯, 관객 역시 친숙한 그 이미지 속에서 유희를 즐기면 그만이다.“주로 공간을 그리고 단순하게 선 작업을 이어온 작가들의 작업을 좋아해요. 이를테면 줄리언 오피나 에드 루샤 같은 작가들이요. 데이비드 호크니는 색의 톤을 너무 잘 써서 가끔 그게 무슨 색에 가까운지 포토샵 스포이트로 찍어볼 때도 있어요.(웃음) 어렵고 심각한 얘기를 하는 작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대학교 1학년 시절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 오라는 수업에서 이정민이 떠올린 건 물병이었다. “평소에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사람이란 말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진짜로 여러 개의 물병에 술이랑 물을 교묘하게 섞어서 담아갔더니 교수님이 웃기다고 좋아하시더군요. (웃음) 제가 딱 그런 사람이에요. 복잡한 거 싫어하는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 * 이정민과 곽철안의 듀오 전시는 지갤러리에서 4월 19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