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에서 여성으로 일한다는 것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각 기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미술계 또한 마찬가지다. | 페미니즘,여성들의 행진,게릴라 걸스

모든 것은 평소에 팔로하는 전 세계 미술관, 큐레이터, 갤러리 디렉터 등 다양한 미술계 인사들이 지난 1월 21일 워싱턴 DC, 뉴욕, 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전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 행사에 참여하며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여성인권에 대한 포스트를 올린 것을 확인하면서 시작됐다.루링 어거스틴 갤러리의 선임 디렉터인 나탈리아 사카사는 워싱턴 DC 내셔널몰에 있는 모뉴먼트 앞에서 불끈 쥔 주먹을 올린 사진을 올렸다. 부스스한 머리, 마돈나처럼 벌어진 앞니, 꽉 쥔 주먹, 비장한 표정.... 사진 속 모든 요소가 너무 강렬해서 ‘여성 파워!’라는 단어가 바로 떠오를 정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어요. 사실 나도 그런 행진이라든지 시위에는 처음 참가해본 것이었거든요. 떨리고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죠. 루링 어거스틴의 공동대표인 로렌스 루링과 롤랜드 어거스틴은 관대하게도 갤러리 직원, 큐레이터, 예술비평가, 예술가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친구들을 뉴욕에서부터 워싱턴 DC로 향하는 여행에 초대하기 위해 버스를 대절하고 모든 경비를 지원했어요. 우리 갤러리뿐 아니라 폴라 쿠퍼스, 데이비드 즈워너 같은 많은 뉴욕 갤러리들이 버스 행렬에 동참했어요. 아트 핸들러인 직원은 버스를 운전했고, 남자 디렉터도 동행했죠. 우리 남편은 집에서 아이들을 돌봤구요. 다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여성들의 행진’에 참가한 셈이에요.”예술계는 겉에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개방적으로 보이며 특히 많은 여성들이 일하는 업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들여다보았을 때도 그들이 다루는 작품들만큼이나 아름답고 평등할까?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워 보이는 뉴욕도 상대적으로 조금 더 나을 수는 있을지언정 예외가 아닌 듯하다. 1980년대부터 파격적으로 미술계 성 불평등 문제를 강도 높게 비판한 아티스트 그룹 게릴라 걸스는 고릴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유명 여성 작가들의 가명으로 활동하는데 불평등 현실을 숫자를 통해 직설적으로 제시한다.“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성들은 발가벗어야만 하는가?: 현대미술 부분에 여성 작가는 4%도 되지 않지만 누드 작품의 76%는 여성이다.” 그들이 1989년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뉴욕 공공예술기금을 위해 전광판에 디자인한 내용을 20여 년이 지난 2012년 업데이트한 내용이다. 수치에는 큰 변화가 없다. 그들은 2014년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서 퍼렐 윌리엄스가 기획했던 전시에 초대 받았는데 음악 업계와 페로탱 여성 작가들에 대한 포스터 두 개를 전시하는 조건으로 참여했다.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려면 여성들은 발가벗어야만 하는가? 뮤직비디오의 남성 99%는 옷을 입었다!”라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오늘날에도 성 평등에 있어 별 차이가 없는 현실을 냉소적으로 비꼰 것이다.나에게는 게릴라 걸스의 1990년대 초 작품이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미안 자기. 자기는 취직하지 못할거야. 왜냐면 대부분의 예술 부서는 여자를 채용하지 않거든.(Sorry Sweetie, You Won’t Get a Job. Because Most Art Departments Don’t Hire Women.)” 그들은 미국 유명 대학교들의 여교수 비율을 제시하였다. 나는 나의 대학교 미술사 전공 강의실로 돌아가보았다. 미술사 전공자들은 남자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았다. 하지만 교수님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수많은 여학우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많은 갤러리들의 오너, 아트 딜러, 미술관 관장, 아트페어 디렉터, 경매사 등 각 기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남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디 셔면은 2003년에 데이비드 프랑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적어도 1990년까지는 돈을 벌지 못했다 - 나는 금전적으로 자급자족하였다. 그러나 소위 남자 화가들(Guy Painters)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나는 그 사실에 화가 났었다.” 한 외국 갤러리의 여성 디렉터는 최근 수년간 일한 갤러리와 좋지 않은 관계로 계약을 끝내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내가 여자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걸 거야. 그들은 여성 작가와 항상 좋게 끝나는 법이 없었어. 현재 남아 있는 디렉터들을 봐. 다 남자잖아!” 너무 일반화한 주장이 아닐까도 싶었지만 많은 미술계 여성 동지들은 암묵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술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분야이지만 돈이라는 권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철저한 ‘비즈니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미술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새로운 여성형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해온 ‘미술계의 페미니스트’ 스푸루스 마거스 갤러리가 있다. 갤러리의 역사는 1980년대 초 쾰른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던 모니카 스프루스와 1990년대 뮌헨에서 활동하던 필로미네 마거스가 같이 일하면서 시작된다. “여성으로서 성공적인 아트 비즈니스를 갖는 것은 매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 현대미술계는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세계적인 브랜드를 유지하기 위해서 365일 여행길에 올라야 합니다.” 당시 어린 자녀가 있던 모니카에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당일치기가 가능한 도시들만 다녔어요. 집에 와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요. 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나이가 더 어렸던 필로미네는 모니카를 대신해 출장을 가는 등 그녀의 훌륭한 조력자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필로미네에게 아이들이 생겼을 때는 모니카가 대신 해외 출장을 다닐 수 있었다. “저희가 서로를 만나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행운이었죠. 그렇지 않았다면 현재의 스푸르스 마거스 갤러리는 있을 수 없어요” 그들은 현재 필로미네와 모니카가 각각 있는 베를린 갤러리와 쾰른 오피스를 제외하고도 런던, 로스앤젤레스에 갤러리를, 홍콩에 오피스를 가지고 있다.그들은 게릴라 걸스가 울부짖던 1980년대부터 바바라 크루거, 신디 셔먼, 제니 홀처, 로즈마리 트로켈 등의 여성 현대미술 작가들이 커리어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도 재정적인 부분이 예술 사업에 있어서 무시하지 못할 권력인 것을 인정한다. “재정적인 힘이 현실적인 권력이기 때문에 여전히 남성 작가들과 여성 작가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미술시장과 경매 결과를 확인해보더라도 남성 작가들의 작품은 여성 작가의 작품들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며 유명 미술관 컬렉션에도 남성 작가들 작품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죠. 우리는 단순히 수적으로 더 많은 여성을 선보여야겠다거나 몇 퍼센트를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소개하는 여성 작가들은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뿐더러 다음 세대에 훌륭한 롤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녀들의 활동이 가시화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년 로스앤젤레스에 갤러리를 열 때도 캘리포니아에서 작업하는 여성 가구 디자이너들의 작품으로 갤러리를 채우는 등 예술 각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지원한다. 작년 6월 L.A. 갤러리 세 번째 전시로 그들은 1985년 독일 쾰른에서 선보인 이래로 꾸준히 진행한 여성 작가 그룹전 를 열었다. “1980년대 우리는 이전에 독일에는 없었던 문제의식을 독일·미국 여성 아티스트, 글을 쓰는 작가들과 함께한 작업을 통해 제시하였죠. 시간이 지난 오늘날 로스앤젤레스라는 새로운(바바라 크루거의 활동지이기도 한) 곳에서 갤러리의 역사와 발자취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일부는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을 표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미술 및 예술에서 허용되는 가장 좋은 것 중 하나이지만 ‘후기식민주의’같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가 또 다른 권력 또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일례로 미술대학 졸업전을 보면 페미니즘이 정치적이고 피상적인 담론에만 그치고 내용이 부실한 작품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오히려 페미니즘을 다루지 않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더 재미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말이다. 여성이니까 바느질, 옷, 천, 몸 같은 식의 공식에서 벗어나 한 발 더 나아간 논의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매년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되어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지는데 그중 2014년부터 전 세계 미술관, 도서관 등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아트 플러스 페미니즘(Art+Feminism)’ 주관의 ‘에디터톤’ 행사도 주목해볼 만하다. 아트 플러스 페미니즘은 학생, 사서, 교수, 작가, 미술 애호가 등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미술과 페미니즘 아래 함께 모여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의 활동과 삶을 가시화하려는 운동이다. 위키미디어(Wikimedia) 재단은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내 여성 관련 콘텐츠가 현저하게 부족하다는 지적과 인식에 따라 이들과 함께 ‘에디터들의 마라톤’에서 따온 에디터톤(Edit-a- thon)이라는 행사를 후원하고 있다. 이들은 매년 3월 여성의 날 즈음에 미술관, 도서관 등지에 모여 ‘여성 예술’에 관련된 콘텐츠를 위키피디아에 추가하고 있다. 작년 서울시립미술관 역시 이러한 취지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반영하는 적절한 시도라고 판단하였고 에디터톤을 진행한 하루 동안 ‘여성’ ‘아시아’ ‘예술’과 관련한 위키피디아 항목이 42개 모두 신규 등록되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었다고 한다.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전 세계 미술관, 갤러리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 계정에는 다양한 여성 관련 콘텐츠가 올라왔다. 많은 국제적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그들의 컬렉션, 전속 여성 작가, 여성 직원들의 사진을 올리며 응원하는 글을 올렸다. 한국에서는 각 미술 기관 및 종사자들이 SNS를 해외처럼 활발하게 사용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래도 유명한 미술관, 갤러리들이 ‘여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인터넷 투어를 마치며 “어느 날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변하는 것임을 알기 전까지, 나는 문화, 신념, 과거의 방침에 따라 길들여진 대부분의 아시아 여성들과 다름없었다”라고 한 태국 여성 작가 아라야 라스자름레안숙의 말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