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심오한 감각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관객과 소통하기 위해 수백 시간에 달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낯선 이들이 응시하는 가운데, 그는 소통의 심오한 감각을 구축했다. 이 시대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 아티스트를 <바자 아트>가 만났다. |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아브라모비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마치 비밀스러운 죄의식을 고백하는 양 웃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지 않으며 여러 면에서 자신을 매우 잘 관리한다. 뉴욕에 머무를 때는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유명 트레이너 마크 젠킨스와 복싱, 역도, TRX 트레이닝 등 다양한 운동을 하고, 일 년에 한 번 ‘완전히 비워내기’ 위해 인도에 간다. 스스로 ‘요양원과 감옥과 수도원의 중간쯤’이라고 일컫는 공간 말이다. 그러나 마리나에게도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순간이 있다.“초콜릿!”이라고 외치는 목소리에는 웃음은 물론 황홀함이 섞여 있었다. “저는 초콜릿을 좋아해요.” 이 단순한 세 단어로는 그가 표현한 황홀함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 “72퍼센트 카카오 같은 쓰레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크림이 잔뜩 들어간 초콜릿이 좋아요. 버터와 캐러멜이 함께 들어간 것 말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항상 ‘애프터 에이츠’를 좋아했어요. 한 박스를 얻었다고 하면 한 알만 먹을 수 있을까요? 말도 안 돼요. 전부 다 먹어버려야죠!(웃음)”나는 아브라모비치가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몹시 경이로운 사람이라는 걸 발견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눠야 할 필요는 없다. 그의 작품은 엄격하고, 그 자신과 관객 모두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작품 안에 진지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검은 머리카락과 매부리코가 이러한 인상을 더욱 강화했을 것이다.저는 초콜릿을 좋아해요. 72퍼센트 카카오 같은 쓰레기에는 관심이 없어요. 나는 크림이 잔뜩 들어간 초콜릿이 좋아요. 버터와 캐러멜이 함께 들어간 것 말이에요.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예상 밖의 면모로 가득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2차 대전이 막 끝났을 무렵 벨그레이드에서 태어났다.(현재는 세르비아에 속해 있지만 이 지역에 대해 아브라모비치는 언제나 유고슬라비아라고 말한다.) 아브라모비치의 목소리는 풍부하지만 여전히 강한 억양이 남아 있다. 그가 사용하는 영어에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독창적인 도치와 압축이 섞여 있다.아브라모비치는 올해 70살이 되었다. 그는 스스로 ‘비물질적인 퍼포먼스 아트’라고 부르는 것에 인생을 바쳐왔다. 자신의 육신을 재료로 감정과 인간 관계의 본질, 그리고 경험의 본질을 탐구해왔다.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2010년, 모마에서 연 라는 전시였는데, 거의 75만 명에 이르는 관객이 줄을 서서 기다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회고전의 성격을 띠고 있던 그 전시에서 그가 지금까지 해온 작품의 기록을 볼 수 있었다. 반복해서 자기 자신을 칼로 찌르며 녹음한 작품에서는 종종 테이블과 옷에 피가 튀었다. 그러나 아브라모비치는 오디오를 재생시키고 그 소리에 맞춰 찌르는 행위를 반복했다.‘리듬 0(Rhythm 0)’이라는 작품은 그 다음 해에 만들었는데, 양초, 장미, 칼, 가위 등의 사물을 주위에 둘러놓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연출했다. 방문객들이 그 사물을 이용해서 그에게 뭔가 할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어떤 관객들은 가위로 옷을 자르고 어떤 관객은 그의 목을 칼로 베기도 했으며, 심지어 어떤 참가자는 피를 마셨다. 전시에서 그는 미술관에 설치된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길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의자에 앉으면 그는 조용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관객도 그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과정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만일 이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녹화한 비디오를 계속해서 본다면, 사람들이 흐느끼거나 마음을 완전히 오픈한 후 감정을 극복하려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미술가만이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역시 실존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아브라모비치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을 공연하기 전까지 그는 이 작품의 의미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우리 자신을 완전히 비워내야 해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아비뇽 페스티벌에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조사와 퍼포먼스가 반복되는 스케줄을 멈추고 잠시 쉬던 참이었다. 겨우 며칠 동안이지만 그는 관객이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관객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런데 미술계의 첨단을 걷고 있는 아브라모비치의 또다른 의외의 면모는 기술의 첨단에는 무지하다는 것이다.런던에 있는 나와 프랑스 아비뇽에 있는 마리나의 인터뷰는 스카이프를 통해 시도됐는데, 10분 동안 서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난 후에도 검은 화면만 나오자 결국 영상 통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런 걸 정말 몰라요!” 수화기에서 그가 손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팩스나 제록스가 낫겠어요.” 그리하여 결국 우리의 인터뷰는 팩스를 통해 이루어졌고 다행히도 둘 다 돋보기 안경을 가지고 있었다.“비워진 마음의 상태를 얻기 위해, 당신은 시간이 필요해요.” 그는 운을 띄웠다. “우리는 항상 더 많이 모으고 얻으려고 해요. 하지만 줄여야 해요. 더 적게 가져야 해요. 단지 관객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술가 자신에게도요. 그 전시가 정말 감정적인 공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관객들은 단 한 번도 일상생활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한 적이 없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들에게 도구를 주었죠. 내가 상황을 만들어주면 그들이 참여하는 거예요. 그러면 관객들은 정말로 뭔가를 경험하기 시작해요. 에는 12번도 넘게 미술관에 와서 저와 마주 앉아 있었던 관객이 72명이나 되었어요. 이제 그들은 저를 만나서 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죠. 이런 일은 우리 사회가 뭔가 단순한 것을 원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어요. 더 어릴 때에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어요. 그럴 수 있을 만큼 알맞은 시간이 아니었던 거죠. 관객들도 지금처럼 이런 경험을 많이 원하지는 않았을 거예요.”3년 전, 아브라모비치는 런던에 있는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이라는 전시를 열었다. 영국에서 첫 번째로 선보이는 오리지널 퍼포먼스가 포함된 그 전시는 보다 훨씬 더 긴장감이 넘쳤다. 6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매일, 그는 전시 제목에 명시된 시간 동안 갤러리에 설치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관객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게끔 시계나 전자기기를 맡기고 입장해야 했다. 그들은 빈 벽을 바라보거나, 쌀이나 렌틸콩의 수를 세거나, 검은 옷을 입은 아브라모비치 조수 등의 낯선 자들과 손을 잡고 있도록 유도되었다.이 퍼포먼스에는 한 번에 1백60명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모마에서처럼 긴 줄이 몇 시간이고 이어졌다. 전시가 끝난 시점에는 거의 13만 명의 영혼이 그가 만들어낸 대립의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의 로라 커밍은 이 전시를 단순히 “마음을 챙기는 정교한 운동”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는 관객이 깊이를 형용할 수 없는 종교적인 경험을 했다고 보도했다.아브라모비치는 비평가의 의견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비평가를 예리하게 구별한다.(활동 초기에 그는 갤러리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있을 때 비판에 대해 귀를 닫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관객과는 소통하기를 원한다. 영국에서의 전시가 매우 특별한 도전이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여기는 미술의 가장 명백한 성취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의 가격을 매기는 갤러리예요. 이 나라의 모든 것은 상품과 판매, 그리고 마케팅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이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가져오고 싶었어요. 빈 갤러리, 흰 벽. 저는 기본적으로 돈이 많이 드는 전시를 하지 않아요. 단지 몇 개의 의자만 필요할 뿐이죠. 굉장히 위험한 일이에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게 통해요.”나는 미술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길 원했어요. 미술은 장식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미술은 인간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예요.그리고 그는 계속 작품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매진해온 작품의 형식은 아주 오랜 시간 지속되는 것이다. 작품 활동 전반, 인생 모두 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요.”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1970년대 말에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이 우르르 작품 활동을 포기하던 순간이 있었어요. 미술시장에 큰 압박이 있었거든요.” 미술이 순수하게 실험적이라면 판매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게다가 이건 굉장히 지치는 작업이에요. 쉽지 않죠.”물론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이미 확립된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존 케이지의 작품인 ‘4분 33초’나 미국 미술가 로버트 어윈의 설치작품, 오노 요코의 개념미술을 생각해보면 그렇다.“그 시절에 나는 10명의 관객을 놓고 공연했어요. 지금은 수백만, 수천만에 이르죠. 이건 굉장히 큰 발전이에요. 그렇지만 이 발전은 내가 미술에 대해 비물질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의 아이디어는 바로 우리가 이토록 물질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완벽히 비물질적인 것을 다룰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어요. 서펜타인 갤러리에 왔을 때 그게 적용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많이 걱정했어요. 하지만 영국 중부에서 온 농부부터 방글라데시의 주부, 비평가, 공원을 지나가는 관광객까지 많은 관객이 방문했고 그들은 모두 전시로부터 뭔가 얻었어요. 나는 단지 미술 엘리트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를 찾길 원했어요. 미술은 장식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미술은 인간의 삶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예요. 그리고 우리는 어떤 사회적 집단이나 종교적 믿음과도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만 해요. 이게 바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작업이에요. 이걸 찾는 데 45년이 걸렸죠. 이 단순한 주제는 제가 만든 많은 작품에서 반복해서 나와요.”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2년 전 가을 발간된 책 를 통해 스스로에게 남아 있는 매혹적인 기억을 고백했다.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걸어온 길을 추적하는 것이다.이 책은 관객에게 그가 가진 감각과 그 역사에 대해 인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공산주의 시절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자랐다고 해서 반드시 힘든 어린 시절을 견뎠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많은 방면에서 그의 어린 시절은 축복 받은 것이었다. 부모는 전쟁 영웅이었고 가족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가난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유복했다.그러나 그러한 유복함에도 틈새는 있었다. 그는 부모의 결혼이 마치 ‘전쟁’ 같았다고 회고했다. 아버지는 잦은 외도를 했고, 폭군이었던 어머니는 치과용 마취를 거부할 정도로 강건한 사람이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어머니에 대한 따스한 기억이 거의 없었는데 그럼에도 자기 수양을 하게 된 계기가 결국 어머니에 대한 공포의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그는 이 책에서 미술가로서의 초창기 경력과 율레이(Ulay)라고 불리는 독일 태생의 미술가 프랭크 유 레이시펜과 나눈 사랑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들의 이별은 다른 사람들의 이별과 달랐다. ‘만리장성 걷기’(1988)라는 작품과 함께였다. 각각 중국 만리장성의 맨 끝에서 출발해서 2천5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 중간에서 만나는 작품이었다.“내 인생은 너무나 복잡해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해요. 행복과 불행으로 가득 차 있어요. 나는 아무도 퍼포먼스가 미술의 종류라고 믿지 않을 때부터 퍼포먼스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지금까지 성공해왔죠.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젊은 세대의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해요. 그들은 모두 지금 당장 자기 자신을 바라봐주길 원해요.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야 해요. 어떤 미술가는 하룻밤 만에 성공하길 원해요.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요즘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 대한 비판의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레이디 가가나 제임스 프랭코 같은 연예인과 교류한다거나, 리카르도 티시의 절친으로 재작년 9월 뉴욕 패션 위크에서 지방시 쇼를 아트 디렉팅한다거나 지나치게 패션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말이다.그에게는 이러한 비판이 꽤 재미있다. “50살이 되어서도 나는 전기세를 내지 못했어요. 차에서 살았고 병에 담은 휘발유를 샀어요.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옷에 돈을 쓴 적이 없었어요. 이제는 사람들이 저에게 옷을 줘요. 그런데 그걸로 비판 당하고 있죠. 명품 옷을 입는 것에 대해 내가 왜 비난 받아야 하죠? 사람들이 공짜로 준 건데? 그런 옷을 입는다고 해서 제가 변하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내 인생에 명예는 아주 늦게 찾아왔거든요. 만약 25살 때 이런 명예를 얻었다면 나는 아마도 약물을 과용하거나 했겠죠. 하지만 이러한 명예는 굉장히 오랜 세월의 작품 활동과 함께 온 거예요. 타당한 거죠.”마리나 아브라모비치에게 미술이란 미술관의 경계 이면 어딘가에 있다. 그의 관심은 정말 단순하게도 그가 정말로 새롭다고 믿는 것에 있다. 오리지널은 항상 놀라운 것이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시작처럼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끝났다.“미술가는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어요. 오리지널이 있고, 오리지널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죠. 나는 오리지널에만 관심이 있어요. 오리지널은 매 세기에 몇 명 나올까 말까 해요. 아마 네다섯 명 정도나 될까? 나머지는 그저 따라가는 거예요. 정말 찾기가 어려워요! 내가 오리지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해줄게요. 내 얘길 들으면 아마 놀랄 걸요?”그녀 말대로 놀라기에 충분한 대답이 따라왔다. “리버라치!(화려한 무대와 현란한 쇼맨십으로 40여 년에 걸쳐 미국 엔터테인먼트의 아이콘으로 군림한 피아니스트로 스티븐 소더버그가 그의 인생을 영화 로 만들기도 했다.) 왜요? 생각해봐요. 전쟁에서, 참혹한 시절의 지옥에서 태어나서, 그는 결국 라스베이거스에 정착했어요. 그리고 키치를 발명했죠. 미국인들의 못된 취향 말이에요. 이후에는 다들 그걸 따라 했죠. 심지어 데이비드 보위도 그를 따라 했어요. 당신은 누가 뿌리인지 찾아봐야 해요.”팩스 너머 저편에서 아브라모비치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