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카텔란이 돌아왔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나는 새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라고 선언하며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돌아왔다. 2011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회고전과 함께 돌연 은퇴를 선언한 카텔란의 블랙 코미디는 5년 만에 다시 새로운 버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카텔란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이 문제적 작가의 ‘리부트’의 변을 들어봤다. | 마우리치오 카텔란,카텔란

카텔란이 미술계를 떠난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가 은퇴하기 2년 전인 2009년,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한 인터뷰에서 카텔란은 “마치 모든 세상이 백악관 밖에서 빵과 생선을 들고 줄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9년 9월)면서 자신 또한 미래를 기대한다고 했었다. 은퇴했다가 돌아온 2016년 카텔란은 트럼프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이탈리아는 이미 베를루스코니를 경험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훨씬 위험하다. 트럼프는 사디스트적인 각본가의 개발품이자 B급 영화의 악당 같다.” (artnet.com, 2016년 6월 9일)지난해, 카텔란은 5년 만에 컴백하면서 두 개의 이벤트를 준비했다. 먼저 6월에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리는 마니페스타 11에서 전직 패럴림픽 챔피언인 에디트 볼프-훈켈러가 휠체어를 타고 호수 위를 굴러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안 얀콥스키가 총괄 큐레이팅을 맡은 이 비엔날레의 주제는 ‘사람들이 돈을 위해 하는 일’이었고, 종종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곤 했던 카텔란은 “한계와 한계를 극복하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보다 인상적인 이벤트는 같은 해 10월부터 프랑스 모네 드 파리에서 열린 전시 였다. 외관상 소박해 보이는 19세기 건물이지만 내부는 대리석과 신전식 기둥, 거대한 돔과 청동 조명 등으로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그 공간에 놓인 카텔란의 대표작들은 마치 이번 전시를 위해 한 번에 만들어진 듯 섬세하게 어우러졌다. 스스로 ‘포스트 레퀴엠 쇼’라고 칭하고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을 골라 전시장 구석구석 아주 알맞은 위치에 자리하게 한 이번 전시는 모든 작품을 ‘편집하지 않은 민주적 방식’(, 사라 손튼)으로 공중에 매달아놓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마지막 전시 과는 상반되는 느낌이었다.“회고전은 항상 결혼만큼 공식적으로 들린다: 어떻게든 피해야 할 훌륭한 제도인 것이다.(웃음) 이번 전시를 ‘포스트 레퀴엠 쇼’라고 정의한 이유는, 내가 죽음을 가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치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처럼 나는 여전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할 일이란 그대로 가만히 있는 채로, 나 없이도 작품들이 살아갈 가능성을 남겨두는 것이었다. 모네 드 파리에서의 전시는 구겐하임 전시 이후 처음으로 나의 작품 세 점 이상이 한데 모인 전시였다. 은퇴 전의 작품들이 키아라 파리시(전 모네 드 파리 디렉터) 같은 특별한 큐레이터의 손을 거쳐 특별하게 편집됐다. 이 ‘편집하지 않은 방식’이라면 는 ‘리부트(Reboot)’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내 안의 믿음들을 재점검해야만 했다. 그곳에 전시되었던 모든 작품은 서로 새로운 관계를 맺고 맥락을 만들어내면서 이전에 있었던 것들과는 매우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관람객에게 이번 전시가 카텔란의 화려한 컴백 쇼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는 자리였다면 그 자신에게는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악동(Prankster)’ 이미지를 지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나 개인을 둘러싼 모든 풍문이 잠잠해지면서 그 고요함 덕에 지금까지는 거의 제대로 해석되지 못했던 작품들의 이면 속으로 더 깊게 빠져들게 한 전시였다고 확신한다.”그 말대로 이번 전시를 보면서 나는 새삼 악동 이미지, 기성 체제를 풍자하는 위트와 역설적 유머, 부조리 희극 등의 키워드로 수렴되는 카텔란의 작품에서 뭔가 뭉클한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전시장 곳곳에는 카텔란으로 가득하다. 바닥 밑 터널을 통해 전시장에 몰래 잠입한 듯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는 카텔란(‘무제’, 2001), 쌍둥이의 장례식인 것처럼 짙은 색 정장을 입고 나란히 누워 있는 두 명의 카텔란(‘We’, 2010), 벽걸이에 옷처럼 걸려 있는 카텔란(‘Mini-me’, 1999)....그런데 유독 마음이 쓰이는 카텔란은 텅 빈 하얀 책장을 마주하고 양 손등에 연필이 못처럼 박혀 옴짝달싹 못하는 작은 카텔란이다.(‘Charlie Don’t Surf’, 1997) 학교와 어른들의 억압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학창 시절 동급생의 손을 볼펜으로 내리찍었고 그때의 경험이 그대로 이 작품에 녹아 있다. 카텔란에게 유년기는 극복되지 못한 채 거듭 작품으로 승화되며 전 생애에 걸쳐 치유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나와 가장 가까운 엄마를 누구보다 사랑하면서도 느닷없이 증오해본 경험이 있나? 어릴 때 우리 집은 아주 가난했고, 말을 잘 듣지 않는 나를 엄마는 매일 때렸다. ‘마우리치오, 네가 이랬지? 넌 매일 이 모양이잖아. 내일 또 그럴 거지?’ 하면서 말이다. 작은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고, 부모님은 물론 나 역시 디킨스처럼 일찍부터 돈을 벌어야만 했다. 15살 때부터 매년 여름 서너 달씩 꽃을 배달하고 거리에서 엽서를 팔았고 시장에서 짐을 날랐다. 17살 때부터는 학교 수업이 끝나고 공장으로가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 돌아보면 내 어린 시절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물론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었다면 작업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을 되돌린다면 난 그냥 평범하고 유쾌한 어린 시절을 택하겠다. 예술작품이 아무리 훌륭해도 어린아이가 겪어야 하는 슬픔과 상처는 그 자체로 너무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2009년 6월)누군가의 기도하는 손이 땅 위로 솟아 있는 흑백사진 작품 ‘Mother’(1999)는 스물세 살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비밀 장례식”이었다고 카텔란은 에서 말했고 그 후로 나는 그 작품을 볼 때마다 사랑하면서도 느닷없이 증오하게 되는 나의 엄마를 떠올렸다.독특한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디자인해서 입고 다닌다는 카텔란은(그가 이메일에 친히 적어주기를 요즘 애용하는 티셔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술 취한 기독교인보다는 맨 정신의 식인종과 자는 게 낫다(Better to sleep with a sober cannibal than a drunken Christian).”)지난해 9월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황금 변기 작품인 ‘America’를 선보였는데 갤러리에 갈 때마다 끊임없이 “Don’t Touch”라는 말을 듣는 관객들에게 미술관 5층 유니섹스 화장실에 설치된 카텔란의 변기는 아티스트의 작품과 완벽히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심지어 터치도 가능한)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나는 사람들이 볼일을 보면서 셀카를 찍는 방식으로 ‘America’와 함께하길 바란다.(웃음) 솔직하게 말해서 처음부터 진지한 감상을 하기를 바라고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유머는 다른 방식으로는 생각하기 어렵거나 심지어 벗어나기 힘든 것들을 용인될 만한 것으로 변형시킨다. ‘America’의 경우는 특히 그렇다.”사실 황금 변기 정도는 놀랄 일도 아니다. 카텔란이 미술계의 악동으로 불리게 된 데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너무나 유명한 해프닝들이지만 다시 열거해보아도 무슨 현대미술의 전설처럼 아득하게 황당하다. 1996년에는 전시를 2주 앞두고서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근처 갤러리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그 안의 작품들은 물론 팩스와 테이블까지 훔쳐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다.(‘Another Fucking Readymade’, “다행히 네덜란드는 관대한 나라라 나를 감옥에 보내진 않았다.”)2000년에는 제6회 카리브해 비엔날레를 기획해 광고도 내고 후원도 받았지만 개막 행사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은 행사장에서 원하지 않는 휴가를 보내다 돌아갔다.(“‘Another Fucking Readymade’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미술관 강연회에 친구인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지아니를 자기인 것처럼 대신 내보내기도 했고(자화상 작품들이 유명해지자 이 속임수는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됐다), 밀라노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오래된 나무에 아이들 모형을 매달아놓거나(‘Untitled’, 2004)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밀라노 현대미술관 테러 사건의 잔해를 가방에 담기도 했다.(‘Lullay’, 1994)그리고 마우리치오 카텔란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기억할 이미지, 붉은 카펫 위 커다란 운석을 맞고 쓰러져 있는 교황의 모습(‘La Nona Ora’, 1999)은 2001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카텔란의 이름을 떠들썩하게 알렸다.단순한 도발은 하루이틀이면 잊히지만 성공한 예술작품은 훨씬 오래간다. 카텔란은 잊히는 예술과 오래 기억되는 예술을 가르는 지점을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시각예술뿐만 아니라 모든 좋은 창작물은 그저 작가의 삶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싶다. 만약 당신의 삶이 불타고 있다면 당신의 작품은 재가 될 것이고 그것들은 모두 당신이 떠난 후에도 남아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인대도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멀리서 본 관점이 유일한 척도이다.”밀라노 아파리 광장, 증권거래소 건물 앞에 가운데손가락을 제외하고 나머지 손가락이 모두 잘린 회백색 대리석 조각 ‘L.O.V.E’(2010)를 세워놓은 카텔란은 꾸준히 정치적인 이슈를 작품으로 다뤄왔지만 되도록이면 “말로 떠드는 대신 힘 센 이미지로 자신의 생각을 전파하고 싶다”고 했다.카텔란만큼 힘이 센 이미지를 만드는 데 능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퇴한 후에도 사실상 카텔란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다양한 작업을 해왔다. 2002년에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알리 수보트닉과 함께 롱 갤러리를 열었던 것처럼 2012년에는 지오니와 함께 뉴욕 첼시에 패밀리 비즈니스라는 미술 공간을 열었고, 패션, 광고계에서 독보적인 활동을 해온 사진가 피에르파올로 페라리와 꾸준히 라는 잡지를 만들어오고 있다.그 전에도 카텔란은 라는 잡지를 만들었는데, ‘갑부들이 축구팀을 소유하는 것처럼 자신만의 잡지를 갖고 싶었던 그는 1995년 아티스트 도미니크 곤잘레스-포에스터와 함께 미술사의 ‘전유’라는 방법론을 잡지 제작에 그대로 적용, 직접 고르거나 친구와 동료들이 보내준 전 세계 수많은 잡지의 지면들을 이어 붙여 단행본의 형태로 만들어놓고는, 이를 잡지라 우겼다.’이후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등과 함께 만든 역시 ‘저작권 개념이 매우 까다로운 미술계에 엿을 먹이는 태도로, 작가나 갤러리, 기관, 사진가 등의 사전 동의 없이 아주 호기롭게 작품 이미지와 텍스트를 가져다 제멋대로 재맥락화’했다.(시청각 문서 , 김재석)는 텍스트 없이 2페이지에 스프레드 이미지를 수록한 ‘화장실에 동행하기 좋은 가벼운 출판물’을 컨셉트로 한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 오프라인 종이 매체 편집자로서 시대와 불화한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매달 잡지를 만들고 있다고 투정하자 그는 말했다.”오늘날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쇄물이든 블로그든 콘텐츠를 생산해내고 이와 동시에 또한 독자라는 점이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오늘날이든 수백 년 전이든 상관없이 두 가지로 구분되고 있다. 바로 인쇄된 것과 가상현실에 존재하는 것. 리블로깅(Reblogging) 시스템은 신성모독만큼이나 도착적이고 매혹적이다. 신에게 무례해 보일 수도 있으나 동시에 그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이다.(웃음)” 잡지 작업들"/> 잡지 작업들"/> 잡지 작업들"/> 이번 코리아를 위해 카텔란이 직접 만들어 보내준 커버 아트가 첨부된 이메일을 열자마자 어이쿠, 주먹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듯했다. 그는 이 강력한 이미지를 통해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잡지 표지를 디자인하는 작업은 꽤 도전적인 과제이다.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8×11인치라는 매우 엄격한 제한 속에 강력하고 매력적이며 가능하다면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이미지를 골라야 한다. One Shot One Kill, 서부시대 결투처럼 말이다. 표지의 주먹은 ‘La Nona Ora’의 운석을 맞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한 부분이다. 조각 전체에서 독립적으로 주먹만 보여주면서 특정 사실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닌 대안 현실을 탐구하는 방법이랄까? 에서 그러했듯 같은 대상(또는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봄으로써 이야기의 내용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종교적 힘의 약점은 냉혹하면서도 순수한, 완전한 ‘팝 파워(Pop Power)’로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종교적인 동물로서 인간 활동의 특징적인 모습은 무시되거나 사라질 수 없다던 카텔란은 나의 인생 모토가 ‘희망 없이 즐겁게’라면서 좌우명 같은 게 있으면 알려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우리 모두는 행하지 못한 선에 대한 죄가 있다(Everyone is guilty of all the good they did not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