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금사빠의 고백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나는 왜 금방 사랑에 빠지는 걸까? 어떻게 사랑의 순간은 이토록 자주 찾아올 수 있나? 어느 ‘금사빠’의 수줍은 고백. | 연애,사랑,금사빠

지난 한 달 간 미션이 주어졌다. 그러니까 이건 나 스스로에게도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넷플릭스 로맨스 영화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심드렁하게 넘기면서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생각해봤다. ‘나는 왜 금방 사랑에 빠지는 걸까?’ 답이 없는 이 질문을 위해 나는 시간을 순차적으로 돌려야 했다. 5년, 10년, 15년 전으로. 누군가 좋아졌던 순간의 포인트를 찾아 떠난 여행이랄까? 안경이 잘 어울려서, 다리가 길어서, 좋은 향기가 나서,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 톤이 좋아서, 내가 지난주에 본 연극을 봐서, 입고 있는 후드 티가 귀여워서, 기타를 칠 때 손가락이 예뻐서. 이상형에 대한 열거가 아니다. 단순히 호감 가는 스타일을 나열한 것도 아니다. 사랑의 감정을 느낀 순간을 차근차근 회상해봤을 뿐이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이토록 사소하고도 보잘 것 없다.솔직히 말해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쉽다. 그리고 팍팍한 삶을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꼭 누군가를 사귀지 않아도 상관없다. 좋아진 순간을 회상하고 그 사람의 아주 작은 행동에 큰 의미를 부여해서 생각해보고 혼자 킥킥 거리며 웃다가 ‘뭐 좋은 일 있냐’는 주변의 말에 볼이 발그레한 채로 몇 달이고 ‘하이’ 상태가 되는 일은 상상 그 이상으로 즐겁다. 금방 사랑에 빠지는 건 ‘썸’보다 에너지 소모는 덜 하고 진짜 ‘연애’보다 더 설레는 일이다. ‘금사빠’의 사랑은 ‘피니시’가 짧고 깔끔하다. 사랑했던 순간으로부터 금세 빠져나오니까 여운도 오래가지 않는다. 상처받을 구실도 없고 미련 가질 필요도 없다. 엄청나게 ‘아스트랄’하고 믿을 수 없게 ‘괴랄한’한 사랑법이다.소설가 이승우의 새 장편 소설을 읽다가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힌 구절이 있다. 129페이지엔 ‘금사빠’의 마음을 대변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겨냥한다. 더욱 겨냥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사람이지만 하는 사람은 하면서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하면서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