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한 대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모른 척하기에 나는 아직 젊고, 선뜻 지갑을 열기에 나는 너무 현실적인 나이가 되어버렸다. 스트리트에 ‘하이엔드’라는 수식어가 붙어버린 이 역설적인 유행에 대해. | 하이엔드

요즘은 베트멍이나 발렌시아가보다 구하기가 힘든 게 슈프림이다. 슈프림 온라인 숍은 매번 솔드아웃. 메일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두면 간간이 재입고 등 업데이트 메일이 오긴 하는데 그나마도 금방 동이 나는 것 같았다. 한 달 전쯤, 그렇게 온라인 숍 오픈 메일을 받았을 때 마침 남편의 도쿄 출장이 있었다. 서울에 없는 슈프림 매장이 도쿄에는 세 개나 있으므로 나는 로고 티셔츠(케이트 모스가 입었던 그레이나 화이트 정도)와 꼭 핑크가 아니라도 파스텔 톤 로고 후디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주문했다. 그 이상은 슈프림에 집착하는 유치하고 격 떨어지는 짓이라는 생각도 좀 있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출시한 아이다스 노마드 러너 중 특정 아이템도 ‘보이면’ 부탁한다고. 남편은 슈프림 매장 세 군데를 다 가본 뒤 모두 솔드아웃이라고 전하며 아오야마에 있는 한 편집숍에서 슈프림을 찾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그런데 1백50만원. 그래도 요즘 이 정도는 입어줘야 쿨한 건가?” 내가 찾던 운동화는 80만원이라고 했다. 서른 중반에 평범한 일상을 사는 나는 그 메시지를 보고 슈프림 로고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는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카라 델레바인이 샤넬 쇼가 끝난 후 백스테이지에서 슈프림 로고 팬티를 드러낸 차림으로 패럴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요컨대 슈프림은 그 이름처럼 지금의 패션 신을 상징하는 ‘최신이자 최상급’의 대명사인 것이다. 참, 80만원이나 한다던 그 운동화는 나중에 보니 미로슬라바 듀마가 신고 있더라.루이 비통의 남자 컬렉션을 이끄는 킴 존스는 쿨하고 젊은 감각으로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이름이었다. 그런 그가 몇 달 전 선보였던 슈프림과의 컬래버레이션 덕분에 단숨에 ‘감각적인 디자이너’로 대중에게까지 이름을 각인시킨 모양이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 등 뉴욕 스트리트 컬처에 집중한 그는 대학 시절 화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슈프림 박스가 마치 팝아트처럼 보였던 걸 기억해냈다고 한다. 결과는 대성공! 정식 출시 전부터 문의가 끊이지 않는 건 물론이고 각종 SNS에 도배되며 킴 존스까지 전에 없던 유명세를 타고 있으니. 심지어 다수의 대중은 루이 비통에 남성복을 전담하는 디렉터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에 관심조차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슈프림이란 이름은 참으로 대단하다. 뿐만 아니다. 뉴욕 철도청과도 컬래버레이션했는데 2017 S/S 컬렉션으로 5~6달러짜리 뉴욕 지하철 티켓을 선보이자 많게는 1백 달러까지 프리미엄이 붙었다.나는 여러 모로 슈프림 현상이 쇼킹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압구정부터 홍대까지 스트리트 키드로 보이는 아이들의 옷차림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허나 재미있는 건 그들에게 가장 어울릴 것 같은 스트리트 시크에 정작 그들은 태연해 보이는 거였다. 슈프림 티셔츠나 구찌 슬리퍼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 흔한 럭셔리 백에서도 자유로운 것 같았다. 그들 나름의 질서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패션 월드에 익숙한 내게 그들은 무정부주의자처럼 보일 정도로 개성 있고 자유롭고 쿨해 보였다. 반면 나와 같은 기성 세대가 자유롭고 쿨하며 적당한 개성까지 챙기는 데는 어마어마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걸 실감했다. 슈프림은 둘째치고 여전히 나는 구찌, 베트멍에서 나온 몇몇 피스의 디자인과 소재 그리고 가격 사이의 간극에 아찔해진다.지금까지 나는 ‘포틀랜드’며 ‘놈코어’며, ‘다운타운 시크’ 등 여러 정거장을 거치며 프리미엄 붙을 대로 붙은 ‘스트리트 시크’라는 종착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달려온 듯하다.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스트리트 시크를 운운하며 매료되었던 때가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그의 마지막 컬렉션까지 본 마당에 이야기하자니 벌써부터 너무 오래된 이야기 같다)가 스웨트셔츠에 밤비를 프린트했을 때, 셀린의 피비 파일로가 그래피티를 가장 동시대적인 예술로 점찍으며 런웨이에 슬립온을 올리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서울에서도 골든구스 운동화가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골든구스는 ‘줘도 신지 않을 만큼 꼬질꼬질’한 주제에 50만원이 넘는 당황스러운 브랜드였다. 벌써 5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포틀랜드’며 ‘놈코어’며, ‘다운타운 시크’ 등 여러 정거장을 거치며 프리미엄 붙을 대로 붙은 ‘스트리트 시크’라는 종착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달려온 듯하다. 그것도 ‘스트리트’라기엔 역설적이게도 너무 비싼, 하이엔드 혹은 프리미엄 시대로 말이다. 이러한 변화를 실감하는 건 청담동 분더샵 매장에서다. 지난달 공개한 분더샵 리뉴얼의 핵심은 마이너하고 독특한 브랜드들과 함께 3층에 있던 운동화 셀렉션을 1층으로 내리고 음악, 스테이셔너리 등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을 더해 스트리트적인 감성을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데 있다. 이어 리뉴얼 오픈한 한남동 콤 데 가르송 매장도 흥미롭다. 레이 가와쿠보의 새로운 디렉션만큼이나 기대되는 건 고샤 루브친스키와 같은 ‘핫’한 디자이너 라벨과 드디어(!) 서울에 소개되는 나이키 랩이다.오프 화이트도 지난달 정식으로 국내에 론칭했다. 당시 나는 오프 화이트의 국내 백화점을 상대로 한 프레젠테이션을 잠깐 도울 일이 있었는데, 스트리트에 ‘하이엔드’라는 수식어가 붙은(물론 가격도!) 이 역설적인 브랜드에 대해 “크롬하츠가 록이면 오프 화이트는 그 힙합 버전”이라고 덧붙였다. 그 어떤 설명보다 명료하게 받아들여졌음은 물론이다.모른 척하기에 아직 너무 젊고 피터팬처럼 트렌드에 줄서기엔 현실적인 나이의 어른이 되어버린 내게, 스트리트 시크란 쿨하게 즐기기엔 너무 비싼 취미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