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가 빛나는 이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절망적인 어두움 속에서도 조용히 빛나는 리틀, 블랙, 샤이론. | 문라이트

민망한 사건이 터졌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잘못 호명한 것이다. 의 모든 팀이 무대에 올라 수상소감까지 읊었는데, 진짜 주인공은 였다. 혼란과 혼돈과 민망함과 미안함이 교차하며 오스카 트로피는 에게 전달됐고, 소란스러운 사이 허둥지둥 의 감독 베리 젠킨스가 수상 소감을 밝혔지만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결국 뉴스는 온통 ‘작품상은 가 아닌 ’라는 문구로 도배됐다.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 전 대부분의 언론과 평론가들은 가 아닌 가 작품상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가 더 훌륭해서라기 보다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가진 성격과 훨씬 더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 수상은 사람들의 예측을 빗나간 흑인 영화, 독립 영화의 큰 수확이었다. 호명 실수만 없었다면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는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에 살아가는 소심한 소년 샤이론이 어떻게 정체성을 찾아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마이애미에서 싱글맘인 엄마와 함께 사는 어린 샤이론은 친구들에 비해 성격도 소심하고 체격도 왜소해 ‘리틀’로 불린다. 이 가난한 동네에서 공격 당하기 좋은 먹잇감인 것이다. 친구들에게 쫓기다가 빈 건물 안으로 도망 들어온 샤이론은 한 아저씨 후안의 도움을 받게 되고 어느새 그와 친구가 된다. 마약 중독에 빠져가는 엄마 대신 후안과 그의 여자 친구 테레사를 부모처럼 생각하게 된다. 후안은 샤이론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호모새끼(faggot)’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수영을 하는지, 앞으로 그 누구에 의한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살라는 조언까지. 하지만 어른인 후안의 삶 역시 그리 완벽하지 않다. 실제로는 마약을 팔고, 낯선 이가 벨을 누르면 총을 더듬는다. 시간이 훌쩍 흘러 청소년이 된 샤이론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친구들의 괴롭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엄마의 마약중독 증상은 점점 더 끔찍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바닷가에서 학교 친구 케빈을 만나게 되고, 그는 샤이론에게 ‘블랙’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러나 그 동안 억눌린 감정과 분노가 한번에 폭발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휩쓸려 간다. 성인이 된 샤이론은 후안의 말대로 자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 걸까? 애틀란타에 살고 있는 그는 케빈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은 후 차를 몰고 마이애미로 향한다.감독 베리 젠킨스는 소설 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한 흑인 소년이 성장하는 궤적을 따라간다. 미국의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의 마약문제, 폭력문제, 교육문제가 그 사이사이 고스란히 스며 들어있다. 폭력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보호받지 못한 채 방치 된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체성을 찾아나가기엔 많은 장애물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특히 후안이 샤이론에게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기까지 하다. 과거 흑인들은 수영장에 아예 입장조차 할 수 없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까지도 많은 수의 흑인이 수영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 장면은 샤이론에게 주어진 매우 특별한 경험인 것이다. 샤이론이 후안에게 수영을 배우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매우 아름답다.그렇지만 이 영화는 결코 사회적인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베리 젠킨스는 대신 아이들의 얼굴과, 뒷모습과, 흔들리는 눈빛을 담담한 영상미로 표현하기로 한다. 핸드 헬드로 뛰어가는 아이들을 따라간다든지, 슬로 모션으로 핑크빛 방 안으로 들어가는 위태로운 엄마의 모습을 표현한다든지,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무음으로 처리해 그녀를 바라보는 샤이론의 심리를 담아 낸다. 단 한 번의 큰 사건을 제외하고는, 영화는 그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결코 감정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심지어 후안의 죽음까지도, 관객은 목격하지 못한다.그리고 이 아름다운 장면들을 감상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 새 그의 영상미가 왕가위가 가진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슬로 모션의 사람들, 양조위의 어깨에 기대는 장만옥, 양조위의 어깨에 기대는 장만옥, 외롭게 걸어가는 장국영의 뒷모습이 바닷가에서 천천히 어깨에 기대어 오는 샤이론의 머리, 바닷가로, 레스토랑으로 걸어가는 샤이론의 뒷모습과 많은 부분에서 겹쳐진다. 그리고 물론 까지, 이 영화에서 우리를 흥분시킨 왕가위의 아름다운 신들이 보이는 건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그의 촬영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영화를 준비하기 위한 자신의 드롭박스에는 왕가위의 다양한 영화의 장면들과, 허우 샤오시엔, 끌레르 드니 감독의 영화 장면들이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베리 젠킨스는 자신의 영화 인생에 영향을 준 감독으로 왕가위를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 학교를 들어가 거의 처음으로 만난 영화 을 본 후 큰 감동을 받았다고, 에서 장만옥이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장면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캐릭터의 심리를 담아내는 기술이기도 하며, 이 장면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플롯 그 자체로 보자면, 는 여타 성장영화가 가진 이야기와 크게 다를바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과장하지 않는 감정선과 각 캐릭터의 불안하고 외로운 심리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영상,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에 빛나는 후안 역의 마허샬라 알리 뿐만 아니라 폭발하지 않고 꼭꼭 담아내는 연기를 펼친 세 명의 샤이론(너무 어린 나이 일찍 세상을 알아버린 리틀, 어머니와 친구들 속에서 최대한 스스로를 방어하면서도 사춘기를 겪고 있는 블랙, 그리고 너무나 달라져버렸지만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샤이론), 엄마 역의 나오미 해리스, 그리고 테레사 역의 자넬 모네의 연기는 이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한다. 시간과 환경 등 많은 것이 변했지만 내면 속에 감춰진 샤이론의 변하지 않은 순수한 정체성이 마지막에 이르러 슬며시 오픈 되는 순간, 베리 젠킨스가 켜켜이 쌓아둔 감정들이 한 번에 쏟아진다. 당신도 기꺼이 샤이론, 블랙에게 어깨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https://instagram.com/p/BRCihfwj3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