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무해함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폭력과 혐오가 만연한 시대, 모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방어적인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해칠 생각도, 해칠 능력도 없는 무해한 남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매기스 플랜,신비한 동물사전,에단 호크,에디 레드메인,저승이

얼마 전에 본 영화 에서 나를 괴롭힌 인물은 의외로 에단 호크였다. 물론 그는 매력적인 인간이다. ‘~인 것 같다(~like)’라는 말은 사실 언어적인 콘돔이라는 둥의 섹시한 농담을 나눌 수 있는 남자가 어디 흔한가. 그러나 부탁인데 같이 자도 되겠냐며 무릎팍을 파고들던 그는 몇 년 후, 발로 걷어차버리고 싶은 남자가 되어 있다.이런 종류의 남자를 한 다스쯤 안다. 밖에서는 지적인 페미니스트이지만 집에서는 게으른 무위도식남. 언뜻 보면 옆에 있는 여자를 존중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저밖에 모르는 이기적 유전자.따라서 이 영화에 등장하는 ‘피클맨’이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자는 물론 남자에게도 인기가 없을 만큼 어정쩡한 매력의 소유자로 묘사되는 그는 인공수정을 한답시고 자신의 정액만을 뽑아간 여자에게 피클 한 통을 선물할 줄 아는 남자다. 수학을 ‘아름다워서’ 사랑하지만 수학자가 되기는 싫어서 피클맨이 된 그가 만든 싱싱한 피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였다.그러나 나 역시 피클맨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평온함과 선량함과 무해함 같은 것들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항목은 아니었다. 오히려 초식남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달까?(인터넷에 떠도는 이상형 심리 테스트에서 남몰래 ‘Slightly Bad Guy’를 선택한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고백하겠다.)잠시도 지겨울 틈이 없이 재밌거나 전투적이거나 자극적인 남자들과 웃고 울고 싸우는 동안 그 남자가 술을 마시면 난폭해지고, 콘돔을 사용하기 싫어하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그러니까, 그것들은 과거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는 사실을 지금은 안다.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조금 다른 유형의 남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표적인 예가 배우 에디 레드메인. 영화 을 보고 개미 한 마리 밟아본 적 없을 것 같은 유약한 외형의 그에게 몹시 빠져버렸다. 동물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이 만들어놓은 신비한 동물들의 세계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는 관객석에 앉아 있는 나까지 진정한 ‘이너 피스(Inner Peace)’를 느꼈다.사람들 속에서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지만 할 말이 있을 때 똑바로 눈을 쳐다보고 말하는 남자가 가진 눈빛은 기묘하고 아름다우며 섹시하기까지 했다.(그리하여 탐구하게 된 에디 레드메인의 본체는 더욱 매력적이더라.)한국에서는 최근에 우리가 열광했던 드라마 의 ‘저승이’가 있다. 시종일관 울적한 표정도 밉지 않은 투덜거림도 귀여웠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빨래를 단정하게 개거나 얌전히 앉아서 콩나물을 다듬고 있는 저승이의 모습이었다. 그런 저승이가 마지막 회인가에서 ‘Slightly Bad Guy’로 환생했을 때는 슬쩍 화가 났다. 각기 가진 결은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윤균상, 박보검, 강하늘, 안재현 같은 배우들이 있다. 귀엽고, 선량하고, 포근한 강아지 같은 남자들. 이 남자들이 요즘 누리고 있는 인기를 생각해보면, 이 변화는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문제는 아닌 것 같다.나와 을 같이 본 패션 에디터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여자들이 영화에 별로 나오지도 않은 피클맨을 지지하고 있다. 옆 자리 선배는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고양이 사진과 함께 “나는 조용히 그루밍하는 고양이 같은 남자가 좋음”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최근에 내가 호감을 느꼈던 서로 다른 인간들의 공통점을 추출해보니, 그것은 결국 무해함이었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으며 위악을 부리는 남자보다 평범함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남자가 신선하다.번쩍거리는 광채보다 안심할 수 있는 인간성에 끌린다. 뭔가 있어 보여서 위험을 무릎쓰고 들어갔다가 텅 빈 속을 발견하고 허무해지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가 가진 귀여운 면모들을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것을 택하겠다.이 매력적인 인종은 기존에 있던 개념인 초식남이나 너드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개인적이고 유약한 면이 주로 부각 되었던 초식남, 그리고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가 가장 중요한 너드보다 상위 개념이다. 그러니까 결국 ‘무해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이들에게 끌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아직 강아지를 입양하지 못해서? 둘 다 맞다. 그러나 폭력과 혐오가 허용되는 시대의 분위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소개팅에서 만난 멀쩡해 보이는 남자가 집에서는 여성 혐오 댓글을 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세상. 헤어지자고 말했다가 문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세상. 페미니즘은 암을 유발한다고 말하고, 여성의 생물학적 열등함에 대한 대담을 하며, 자신의 생일을 세계 가부장제의 날로 선포한 남자 마일로 이아노풀로스의 생각이 책으로 출판되는 세상. ‘해치지 않아요’라는 의미를 가진 옷핀을 가슴에 달고 다녀야 안심이 되는 세상에 살면서 매우 본능적으로 체득하게 된 생존 감각은 아닐까?얼마 전 뉴욕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여성들의 행진, ‘우먼스 마치(Women’s March)’에 다녀온 선배는 그것이 남편의 선물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트럼프 시대에 살아가야 하는 여자들의 행진에 함께 참여하자는 것, 이보다 로맨틱한 선물은 들어본 적이 없다.우먼스 마치의 현장에서, “My Body, My Choice”라는 구호를 외치는 여자들에게 “Your Body, Your Choice”라고 화답하는 남자들은 진정으로 근사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옳고 도덕적으로 무결해서가 아니다. 놀라운 속도로 유해 물질이 퍼져 나가고 있는 세계를 함께 돌파할 수 있는 멋진 동료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해한 인간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