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Body, Our Choice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여성들이 “My Body, My Choice”라고 외치자, 남성들은 “Your Body, Your Choice”라고 화답했다. 트럼프 취임 직후,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일어 난 우먼스 마치(Women's Mach)의 생생한 현장, 그리고 여성들의 목소리. | BAZAAR,바자

힐러리를 지지했던 나의 미국인 남편은 최근까지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하지 못했다. 뉴스피드에 올라오는 트럼프 뉴스 뿐 아니라 친구들의 분노, 그들 나름의 패인 분석조차 대면할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종차별주의자, 호모포비아, 성폭력범, 여성혐오자, 이민혐오자, 반환경주의자인 리얼리티쇼 출신 부동산 업자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운영할 것이고, 그는 당장 원자폭탄 버튼을 누를 수 있는 권력을 얻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활동을 저지하는 목소리를 내며 투쟁하는 것 뿐이다.대통령 취임식이 다가오기 몇 주 전, 남편이 트럼프 시대에 살아가야 할 여성들을 위한 행진인 우먼스 마치(Women’s March)에 함께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우먼스 마치가 이렇게 대규모 시위가 될지 몰랐다. 날짜는 취임식 바로 다음날, 뉴욕의 행진은 5th 애비뉴 트럼프타워 앞까지(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로 유명한 5th 애비뉴 한 가운데 있는 트럼프 타워가 백악관만큼이나 경비가 삼엄해지면서 뉴요커들은 훨씬 더 끔찍한 교통정체에 시달리고 있다. 버스나 택시가 안오면 트럼프 탓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페이스북에 우리의 계획을 포스팅하자 친구들의 댓글이 달렸다. “난 시카고에서 참여!” “같이 가자.” “나는 워싱턴으로 가려고.” 우리는 워싱턴 D.C.에서 행진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것은 남편의 로맨틱한 선물이기도 했다. 이미 워싱턴 행 버스와 기차표, 호텔이 대부분 매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취임식이 있던 금요일, 우리는 남편 회사 동료 니키의 밴을 타고 아침부터 서둘렀다. 고속도로 휴게소 스크린에는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이 생중계되고 있었고, 남편과 니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폭우나 내려라.” 니키가 중얼거렸다. 트럼프의 취임식 인파 사진을 2009년 오바마 취임식 당시의 사진과 비교하는 뉴스가 첫날부터 화제였다. 이를두고 백악관 대변인은 언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는 워싱턴 D.C.의 외곽, 버지니아 주에 있는 니키 동생의 친구집에 머무르게 됐다. 우리를 맞는 동네 주민의 환대는 놀라울 정도였다. 니키 동생과 동네 주민들은 우먼스 마치에 참가하기 위해 다양한 주와 도시에서 워싱턴 D.C로 찾아오는 가족 및 그의 친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하철 노선도와 당일 행진과 관련한 주의사항 및 광장 곳곳의 공공화장실 장소까지 적어둔 문서, 슬로건을 적어 넣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포스터용 종이와 펜까지 준비했다. 우리 이외에도 스무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들이 준비한 저녁식사를 먹었다. 물론 나는 한국의 촛불집회 영상을 보여주며,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자랑하기도 했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모인 행진이었는데도, 낯 모르는 분들의 지원이 이어졌다. 누군가는 우리들에게 지하철 티켓을 지원했고, 누군가는 점심 식사를, 누군가는 직접 뜨개질한 푸시햇(핑크색 고양이 모자로, 이번 여성행진의 드레스 코드가 되었다)을 나누어 주었다. 무엇보다 동네 주민들이 돌아가며 자동차 서비스를 제공했으니, 마을 버스나 우버가 부럽지 않았을 정도였다.당일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 지하철로 향했다. 지하철 종점이었는데도, 아침 7시부터 핑크색 모자를 쓰고, 피켓을 든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친절은 계속됐다. 옆에서 함께 줄서 있던 아주머니가 나에게 그래놀라 바를 나누어주었다. 한 아주머니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하철 카드를 선물했다. 지하철은 발디딜틈이 없었지만 투덜대거나 짜증내는 이들이 없었고, 오히려 내 앞에 나란히 앉은 60대 아주머니 두 분은 나를 불러 함께 끼어 앉자고 하셨다. 뉴저지에서 온 아주머니 네 분, 오하이오에서 온 흑인 모녀와 아들, 하와이에서 온 ‘언니’도 있었다. 처음 만나는 여자들끼리의 대화와 웃음이 뒤섞인 작은 지하철칸은 어떤 흥분감을 머금고 있었다.물론 즐거운 날만은 아니다. 우리는 성기(Pussy) 옆을 꼬집으면 여자를 꼬일 수 있다는 대통령과 싸워야 한다. 대선 토론회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자신의 라이벌을 ‘더러운 여자(Nasty Woman)’라고 불렀던 대통령, 무슬림은 테러리스트와 동의어라고 생각하는 대통령, 나와 같은 이민자들을 비웃고, 오바마 케어를 비롯한 서민을 위한 정책을 싸그리 없애려는 대통령과 싸워야 하니, 이건 파티도 페스티벌도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흥분됐다. 오늘의 이벤트는 여성들이 주도한 행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남자 친구, 남편, 친구들이 합세한 것이다. 앞으로 4년간 지속될 싸움의 오프닝을 ‘여자’들이 시작한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이미 워싱턴 몰 광장 앞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번 행진은 여성 인권 문제를 기반으로 트럼프 정권이 상징하는 반이민, 반LGBT, 인종차별, 오바마케어 철폐 등의 반인권적 이슈를 아우른다. 사람들이 들고 온 피켓의 구호들은 이렇다. ‘This is what a feminist looks like(이것이 바로 페미니스트의 모습이다)’ ‘I am a nasty woman(나는 더러운 여자다)’ ‘My body, my choice(내 몸은 내 선택)’. 트럼프의 여성혐오적 발언을 비꼬거나, 낙태 방지법안에 대한 항의의 의미가 가득했다. ‘Nasty Woman’은 당당한 여성, 자신의 의견이 있는 여성이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고, ‘Pussy(성기)’라는 말도 거침없이 쓰였다.무대 위에서는 미국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연설과 공연이 이루어졌다. 마치 불 끈 영화관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50만명의 사람들은 조용히 연사들의 말을 경청했다. 로도 유명한 히스패닉 배우 아메리카 페레라(이름이 아메리카라니! 이 얼마나 시적인 이름인지)는 “트럼프는 아메리카가 아닙니다. 아메리카는 우리들입니다.”라고 외쳤다. 캘리포니아의 첫 비백인 여자 상원위원으로도 유명한 카말라 해리스의 연설도 인상적이었다. “제게는 항상 ‘첫번째 여성’ 혹은 ‘첫번째 비백인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그리고 제게 이렇게 말하죠. ‘자, 이제 여성 문제에 대해 말해보세요.’ 여성 문제요? 그거 멋지네요. 그럼 의료 보험에 대해 이야기합시다. 경제 문제, 교육문제, 사회문제, 환경문제를 얘기합시다!” 스칼렛 요한슨, 마돈나 같은 셀리브리티의 연설부터 이 행진의 공동의장을 맡고 있는 무슬림 린다 사수르, 성폭력 생존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했다.최근 다시 주목을 받으며 이슈를 몰고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가 연단에 섰다. 사람들의 환호도 다른 연사들과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바로 우리가 청문회와 촛불 집회 때 많이 사용했던 전략. 자신의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자는 것. 그렇게 시민의 힘을, 시민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전달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그가 ‘여성’ 행진의 연단을 차지했을 때, 무대 반대편에서 배우 애슐리 저드가 나타났다. 사실 지나치게 긴 마이클 무어의 연설에 끼어드는 모양새였다. 그녀는 단상 앞에 서는 대신, 마치 모놀로그 연극을 하듯이 무대를 휘저으며 테네시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19살의 한 여성의 시 ‘Nasty Woman’을 강렬하게 읊었고, 결코 마이클 무어의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 날의 무대 중, 그녀의 퍼포먼스가 최고였다. 엄청나게 독한 내용의 시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나는 인종차별, 사기, 이해 상충, 호모포비아, 성폭력, 트랜스포비아, 백인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 무시, 백인 특권의식보다 더럽지는(Nasty) 않습니다. 그래요. 나는 더러운 여자(Nasty woman)입니다, 시끄럽고, 천박하고, 자랑스러운 여자.”“말해줘요. 왜 생리대와 탐폰에 택스를 내야 하고 비아그라와 로게인에는 텍스가 붙지 않는 건지. 당신들의 발기가 더 보호해야할 가치인가요? 여성들의 청바지에 묻은 혈흔이 당신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인가요?”“우리들의 성기(pussies)는 누군가에게 잡히기 위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성기는 우리의 쾌락을 위한 것입니다.”“내 인생의 절반 동안 나는 미소를 지퍼로 채우고 살았죠, 혹시라도 당신이 내 미소를 두고 당신의 청바지 지퍼를 열고 싶어하는 것으로 해석할까봐요. 나는 더러워(Nasty)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나는 수잔, 엘리자베스, 엘리노어, 아멜리아, 로자, 글로리아, 콘돌리자, 소니아, 말라라, 미셸, 힐러리만큼이나 더러우니까!”https://m.youtube.com/watch?v=VNXMOxBbt6g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옆에 서있는 여성을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고 싶었다. 갑자기 한국이 생각났다. 조윤선 장관에게 ‘예쁜 여동생’이라고 해 놓고도 무슨 맥락에서 잘못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은 국회의원. 여성 비하의 의미가 가득 담긴 노래를 촛불집회에서 부르는 것에 항의하니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는 몰상식한 페미니스트’로 몰아대는, 소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몇몇 평론가와 기자들. 더 큰 목적을 위해 모인 ‘평화적’ 촛불 집회에서 벌어진 성추행에 대해서 입을 다물라고 말하는 남자들. 올랭피아 문제로 표창원 의원을 감싸겠다고, 미국 극우주의자들이 만든 옐로페이퍼의 저질 힐러리 누드사진도 있다고 예를 드는 일부 남성들. 한국의 진보 시사 매체들과 팟캐스트에서 이러한 여성 혐오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걸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놀라운 시민 집회를 이루어 낸 사회에서 왜 여성인권 문제, 사회적 약자 문제는 간과 되는 걸까?너무 많은 인원 때문에 공식적인 행진은 취소됐지만, 사람들은 백악관을 향해 구호를 외치며 걸었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스트의 모습이다(This is what a feminist looks like)”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그 중 감동적인 구호는 역시나 이것이었다. 여자들이 “My Body, My Choice(내 몸은 내 선택)”을 선창하면, 남자들이 “Your Body, Your Choice(네 몸은 네 선택)”을 외치는 모습. 그러나 월요일이 되자마자, 트럼프는 급하게 몇 개의 법안에 서명을 했다. 그 중 하나는 낙태방지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