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북을 읽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박찬욱 감독 X 정서경 작가의 시나리오 북이 출간됐다. 지문과 대사 그리고 여백으로 영화를 읽는 보다 능동적인 즐거움을 전한다.

시나리오 북을 읽다-Harper's BAZAAR Korea 2017년 2월

히치콕의 자서전(「히치콕」, 패트릭 맥길리건, 그 책)을 보면 히치콕은 훌륭한 원작과 이를 각색할 작가를 물색하고,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들면 작가들을 괴롭히고(“이 영화는 실패작이 될 거야. 나는 점심이나 먹으러 가겠네.”) 직접 대사를 쓰고 고치는 일로 인생의 절반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촬영을 했다.

농담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영화감독들 중에는 (자의든 현실적 여건 때문이든) 시나리오 작가의 도움 없이 자신이 쓴 각본으로 영화를 찍어서 망하는 사람이 꽤 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시나리오 작가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스스로 팔자를 망치는 영화감독들은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팔자를 망친다는 말이 심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영화감독의 재기 가능성을 생각하면 큰 과장은 아니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 같은 예외도 있으니 다들 희망을 잃지 마시길.)

그런 측면에서 박찬욱 감독이 2003년 어느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으로서 정서경의 시나리오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함께 해온 것은 안정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그 결과물인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박쥐>, <아가씨>는 흥행 여부를 제쳐 두면 모두 일정 수준의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제외하면 흥행 성적도 나쁘지 않다.) 위의 네 작품이 이렇게 ‘시나리오북’으로 출판이 된 것도 성공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이다.(희곡과 달리 시나리오가 출판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과거,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시나리오 초고는 하루 만에 쓰기도 하는데(아마 <복수는 나의 것>이었을 것이다.) 대사 한줄 고치는 데 몇 주를 쓰기도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이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하는 것을 보면 정서경 작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하나의 하드에 두 대의 모니터와 키보드를 두고 함께 쓴 이 시나리오북은 ‘예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각 영화의 색깔을 드러낸 표지도 매우 아름답다.)

(왼쪽부터) 레트로 무드의 , 신비롭고 음산한 분위기의 , 엉뚱한 상상과 공상이 가득한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할 때 ‘시나리오 베껴 쓰기’라는 것을 하는 경우가 있다.(대부분의 영화 시나리오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무작정 기존의 시나리오를 필사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면서 시나리오를 상상하며 쓰기도 한다. 무작정 필사의 단점은 실제 영화와 시나리오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대사도 장면 순서도 다른 경우가 대다수다. 허나 <아가씨> 시나리오북을 영화와 대조해 본 바 거의 다름없었다. 이 시나리오북은 지금도 필사 중일 예비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 두 사람이 시나리오에서 맡은 부분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되어있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 정도다. 하기야 그것이 가능했다면 두 사람이 이토록 오래 공동작업을 하지도 않았겠지.

박찬욱 감독 X 정서경 작가의 시나리오 북이 출간됐다. 지문과 대사 그리고 여백으로 영화를 읽는 보다 능동적인 즐거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