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에게 보내는 편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우리를 두렵게 하는 건 작은 일이에요. 우리를 죽일 수도 있는 거대한 일은, 오히려 우리를 용감하게 만들어주죠.” 그의 말을 기억하며,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존 버거에게 보내는 편지. | 존버거,편지

"내가 만일 스토리텔러라면, 그것은 내가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에서 버거 씨의 말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지난달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았지요. 1972년에 쓴 는 고전이 되었는데, 저는 여전히 버거 씨의 신간이 한국어로 출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생각하다가, 한국어판 의 첫 대목을 읽고 쓰게 웃었습니다.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처음엔 편지였고, 그 다음엔 시와 연설, 나중엔 이야기와 기사, 그리고 책이었으며, 이젠 짧은 글을 쓴다.”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나이 드는 법에 대한 퀴즈가 있다면, 이것은 그에 대한 답처럼 들립니다. 아마 당신이 듣고 보는 방식 역시 변화해왔겠지요.네 명의 감독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한 에서, 60살 이후 프랑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당신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사회비평가, 다큐멘터리 작가, 소설가, 그리고 때때로 화가인 당신의 모습 또한 보여줍니다. 당신은 두 번의 세계전쟁을 겪었고, 한 세기를 살았습니다. ‘보는 방법’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는 전 세계가 귀 기울여 들었다고, 저는 감히 말하겠습니다. 미디어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교실이 되어주었고, 당신이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책은 그렇게 이미지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백발의 당신은, 오랜 친구이자 배우인 틸다 스윈턴을 맞이합니다. 그것이 를 여는 방식이었지요. 사과파이가 두 사람 앞에 놓이고 대화가 시작되었을 때, 느릿한 리듬의 말이 당신이 살고 있는 주변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더군요.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을 엿보게 하는 편안한 대화 사이 사이에 금융자본에 대해, 세계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잊지 않는 버거 씨가 떠오릅니다.저를 놀라게 한 것은 중에서 세 번째 에피소드, 존 버거의 모든 저작물 중 하나만을 남긴다는 가정하에 선택한 책이었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것은 이었지요. 당신이 글을 쓰고 장 모르가 사진을 찍은 이 책은 1970년대 터키와 포르투갈을 비롯한 나라의 이민노동자들이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이른바 선진국으로 떠나 일하다가 귀국하기까지의 삶을 따라잡은 내용을 담았습니다. 더 나은 미래는 결코 그들 앞에 도착하는 법이 없었고, 미숙련 노동 이상의 일자리가 주어지는 법도 없었습니다. 이민노동이라는 개념은 한때 ‘노마드’라는 멋진 단어로 대표되었던 낙관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버거 씨의 대표작으로 이 책을 꼽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라 생각합니다.에 실린 글 중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로자를 위한 선물’도 저는 그 맥락에서 읽었습니다. 당신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쓰는 서간문 형식의 이 글에서, 그녀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인간답게 지내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합니다. 그건 확고하고, 분명하며, 활기찬 것을 의미하죠. 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일 앞에서도 활기차게 지내는 것이요. 흐느끼는 건 약한 자들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입니다.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인간다움을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 아마도 버거 씨가 한평생 글로 써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인간답다는 말이 단 한 가지로 고정될 리 없다고 믿는 저는, 버거 씨의 20년 경력 독자입니다. 제가 최근 주목하는 버거 씨의 저술 활동은, 나이듦과 시간을 반영한 것들입니다. 역시 한국 출간을 앞두고 있는 장 모르가 찍은 존 버거 사진집 (한국어판 제목 미정)의 부제는 ‘50년의 우정’이더군요. 1960년대부터의 버거 씨가 이 안에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거주 중인 퀸시의 풍경이 등장합니다. 많은 사진에서 버거 씨는 사람들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 안에서 시간은 흘러 황혼을 향합니다.2013년 7월 30일 버거 씨의 아내 베벌리 밴크로프트 버거 씨가 세상을 떠났죠. 는 가족이 그녀를 추억하는 책인 동시에, 당신이 그녀와 함께한 사십 년을 담아낸 기록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끊임없이 당신의 반응을 기다렸던 거요.”라는 말의 묵직함이라니. 최근 당신의 저술에서 저는 늘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한 언급을 찾게 됩니다. 백내장 제거 수술 이후의 단상을 모은 은 또 어떤가요. “어둠은 종종 사람들이 주장하듯 최후가 아니라 시작에 앞선 전주곡이다. 이것이 여전히 윤곽조차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내 왼쪽 눈이 나에게 말해주는 바다.” 흡연자들이 더 좋아할 법한, 흡연과 배기가스에 대한 주장이 강하게 섞인 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에 대해서도 적고 싶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아 멈춥니다.죽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당신의 글이 지닌 힘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에 생각이 미칩니다. 에서 유럽 회화의 누드화 속에 존재하는 남성의 시선을 지적하며, 젠더 이슈를 풀어냈던 것처럼요. 당신은 1972년에 이미 남성들의 요구가 여성들에게 내재화되는 과정을, 예술 형식을 통해 말했죠. 언제나 귀 기울여야 할 세상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도 당신의 글이 필요할 것입니다. 탐욕스러운 독자가 버거 씨의 명복을 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