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의 낭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2017년 새해, 새 노트에 적게 될 올 한 해의 기록들. | 남노아,메모

새해다. 1월 1일은 미세먼지 가득한 이 서울에서 가장 청명하게 맑은 하루가 아닐까 한다. 온 세상이 경건하고 활기차고 새롭고, 바람은 싸늘하지만 춥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 듯하다. 이날만큼은 어떤 날씨나 계절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1월 1일이라는 시간이다. 새로운 것들도 많이 생긴다. 한 해 동안 수도 없이 대답해야 할 새 나이, 익숙지 않은 연도가 박힌 새 달력, 새로이 다짐한 마음가짐, 굳이 바꾸어야 할 새 노트까지. 특히 새해가 되면 새로운 노트 첫 장에 메모를 할 수 있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지난해 틈틈이 사 모아둔 노트와 연필을 이제 드디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깨끗한 그 첫 장에 새로운 연필로(물론 며칠이 지나면 어디로 나뒹굴지 모를 것들이겠지만) 첫 자를 적으려니 설레기도 하고 망설여지기도 한다.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어서일까. 나는 매해 그런 반복되는 다짐을 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해야 할 일에 대해 적는 이 메모의 핵심은 우선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라는 안심을 준다는 것에 있다. 중요한 것에 컬러 표시를 해둔 메모나 혹은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아 빼곡히 적힌 장을 보면 오늘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지 않았구나 하는 안심이 든다. 그중에 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을지언정 그저 빼곡했다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찾는다. 그리고 적어두면 자꾸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것에 자책할 필요가 없다.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해야 할 것 같았었던 일에 대한 표시다. 기억이 나지 않을 때 결정적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그려놓았던 기록, 끄적였던 아이디어가 쓸모 있게 다가오는 순간이 꼭 온다. 메모는 참 건실한 친구라는 생각을 한다.나는 그런 두 개의 친구(두 권의 노트)를 지니고 다니는데 한 권은 업무에 관한 내용이며 한 권은 아이디어용 노트이다. 사실 두어 권을 정확한 상황마다 번갈아 사용하지는 않았는데 새해 들어 이것들을 분류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성가신 일임엔 틀림없다. 그렇다고 우후죽순 알아볼 수 없게 글과 그림이 섞여 버리는 것도 질색이다. 업무에 관한 노트는 반듯하게 줄이 있는 노트인데 이 노트에는 매월 내야 하는 보험금 날짜나 관리비가 빠져나가는 계좌번호 등등 쉽사리 외워지지 않는 정보들을 첫 장에 옮겨 적고 나머지 장에는 날짜를 표기하고 그 날짜에 해야 하는 실무에 관한 내용들(샘플실 작업 현황, 오늘 해야 할일 등)을 기입한다. 그것을 꼭 글자나 숫자로 써놔야 머릿속으로 인식했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오늘 해야 할 일을 기입하고 한 일은 그어나간다. 무척이나 구식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빠트린 일이 없도록 체크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하루를 보낸 것 같다. 또 다른 노트는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을 메모하는 낙서장 같은 것인데 대략적으로 나의 메모는 이런 식이다. 지나가던 누군가의 옷차림을 보거나 혹은 SNS에서 그림이나 사진을 본다거나 전시를 본 후 등 어떤 부분을 적는 것인데 예를 들어 스카이블루와 그레이, 카키와 베이지의 만남, 부스스한 브라운 헤어에 레드 팬츠 식의 각인된 것들을 연상되는 단어로 나열한다. 메모의 장점은 기억의 한계를 보완해준다는 것에 있다. 적절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메모장을 뒤적여보면 그 상황을 떠올리기도 하고 혹은 새로운 형태의 무언가가 머리에 그려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것을 메모의 가장 큰 힘이라고 믿는다. 활자의 힘이라고도 의역할 수 있다. 순간의 생각을 확장시키는, 보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려볼 수 있는 장치. 또한 저장된 경험은 다른 경험으로 연결될 확률이 높아진다. 창의성은 대부분 경험의 연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메모를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고 한다. 존 레넌의 명곡 ‘Imagine’도 그가 뉴욕 힐튼 호텔에 머무른 뒤 비행기를 타고 가다 갑자기 떠오른 글을 호텔 메모지에 옮겨 적은 것이 탄생비화라고 밝혔으며 링컨은 모자 속에 항상 필기도구를 넣어 다녔고 에디슨은 3백~4백 권의 메모 노트를 남겼다고 한다. 불현듯 더 열심히 메모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 생기지 않는가?하지만 요즘 들어 달라진 메모 환경 탓에 영 이 두 노트의 쓸모가 줄어들었다. 지금도 종이에 적지 않고 타자를 치고 있는 이 노트북의 메모장처럼 대개 지우고 다시 써야 하는 것을 반복해야 하는 일에는 필기도구가 불필요해진 요즘이다. 휴대폰의 메모장이나 노트북의 메모 화면에도 자판를 쳐서 기록하고 원하는 이미지는 저장할 수도 있고 음악 파일이나 녹음 파일 등으로 순간순간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SNS에 올리는 그날의 콘텐츠가 일기가 될 수도 있다.(물론 나는 내 일기를 모두가 공유하게 할 수 있는 개방적인 사람은 아니다.) 늘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이 있기에 노트나 필기구가 필요 없어진 것이 간편하기도 하다.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휴대폰 스케줄러도 그렇다. 그때그때 입력해 놓으면 ‘아 오늘 할 게 있었는데’라는 걱정을 아침 알람이 말끔히 씻어준다. 이렇게 바보가 되어가나 싶다가도 약속 개념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해주니 참 고마운 기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메모의 새로운 도구들 때문에 몇 년 동안 함께했던 이 노트들과 소원해지고 있다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편리하건, 내가 그 두 노트를 변심하듯 내팽개쳤건 변하지 않는 것은 기록하는 것의 필요성(우리의 뇌가 그만큼 커지진 않았기 때문에), 즉 메모의 중요성이다.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보고, 행하고, 소중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을 놓치며 살고 있을까?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유의미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정보와 우리의 인식과 잠재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메모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며 그것이 오래된 노트에 적는 습관이든 새로운 디지털 기록이든 새해에는 뭐든 메모하는 습관을 가져보자는 다짐을 한다.하지만 아무리 편리한 디지털 시대라 한들, 새로운 노트에 1월 1일이라는 날짜를 기입하는 것은 여전히 설레는 일이다. 그리고 지난 날들이 기록되어 있는 겹겹이 쌓인 노트의 손글씨 메모들을 돌아보면, 마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그 시절 유행가와도 같아서 그 순간으로 나를 옮겨놓는 듯하다. 새삼 이 아날로그식 메모의 경계 없는 시간에 감탄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메모와 낙서들을 너저분하게 남겨놓은 노트에 담긴 찰나의 기록들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꾸 소원해지는 두 메모 노트에게 올 한 해 의리를 지켜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