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 버린 물건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사람들이 길에 두고 가는 사랑스러운 물건들에 대하여. | 에세이,버려진물건들

서울 어딘가의 길거리에서, 조금 정신없어 보이는 단발머리의 30대 여자가 주저앉아 휴대폰으로 바닥을 찍고 있는 걸 발견하신다면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이 취미는 일종의 수집이지만 돈도 들지 않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습니다.부유하지 않은 사람에게 최고의 취미입니다. 이 글을 다 읽으실 즈음엔 당신에게도 비슷한 취미가 하나 생기면 좋겠습니다.2012년 5월, 뉴욕 센트럴 파크 한가운데서 비에 젖은 채 녹슨 펜스에 걸쳐진 토끼 인형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어린 산책가가 실수로 두고 간 물건이었겠지요. 그 토끼 인형에 마음을 빼앗겨, 들고 있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워 갈까 하다가 말았습니다. 주인이 다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토끼 인형은 빗속에 한동안 방치되었던 듯했지만 사랑스러웠습니다. 그해 뉴욕에 간 이유는 어떤 분기점, 새로운 시작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이미지를 떠올리면 슬쩍 웃을 수 있고 숨을 돌릴 수 있고 뭐든 쓸 수 있었습니다. 제 취미는 그렇게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길에 두고 간 가지각색의 사랑스러운 물건들을 찍기 시작했어요. 여기엔 두 가지 해석이 필요합니다. 저는 ‘두고 가다’를 흘린 것, 잃어버린 것, 버린 것에 다 적용했어요. 그리고 ‘사랑스러움’은 아주 제멋대로, 주관적으로 해석하기로 했죠. 서울에서도, 여행지에서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저는 그런 물건들을 만났습니다. 기뻐하며 사진을 찍었지요. 이제 2백 장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로 폴더를 만들어두었어요. 자주 열어봅니다.사진을 찍을 때의 원칙은 하나, 절대로 물건에 손대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뻐도 가져오지 않을 뿐 아니라 연출을 위해서 건드리지도 않아요. 꼭 필요한 원칙이라기보단 재미를 위해섭니다. 2백여 장이 모이니,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길에다 무언가를 두고 가는 사람들은 대개 아이이거나 술에 취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온갖 동물 인형들, 스티커, 종이접기 작품, 가제 수건은 아이들 솜씨겠지요. 술에 취한 사람들은 주로 신발 한 짝이나 겉옷, 모자, 장갑과 머플러를 두고 갑니다. 우연히 팔목에서 풀린 것들도 있어요. 시계와 팔찌가 가장 많았습니다. 특히나 좋아하는 건 누군가의 손목에서 풀린 소원 팔찌입니다. 어쩐지 소원이 이루어졌을 것 같거든요. 초콜릿, 젤리, 사탕도 흔히 떨어져 있습니다. 아, 한번은 눈 위에 떨어진 호두과자도 본 적 있네요. 디저트를 땅에 떨어뜨린 사람들의 가벼운 탄식을 생각합니다. 이어폰도 많습니다. 풀숲에, 길가에 현대미술 작품처럼 근사한 형태로 엉켜 있습니다. 장 본 물건을 꺼내다가 차 밑으로 굴러 들어간 양파, 배, 귤도 생각보다 자주 발견합니다.미스터리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두 장의 사진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설명을 찾지 못했어요. 조그만 비너스 조각상과 형광 핑크의 남자 팬티입니다. 비너스 조각상은 인천의 공원에서, 핑크 팬티는 런던 본드 스트리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이르게 된 연유를 도무지 추론할 수 없는 물건들이 매력적입니다. 상상할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니까요. 꼭 길에 떨어진 물건들이 아니어도, 수집할 거리는 많습니다. 아래는 소소한 예시입니다.맨홀 뚜껑 디자인 수집: 의외로 한 지역의 디자인 감각이 멋지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현재 마음속의 1위는 타이베이 구시가지의 맨홀 뚜껑이에요.미술관 인물화에서 마음에 드는 부위 수집: 손, 발, 눈, 이마, 귀, 팔꿈치, 가슴, 배꼽 어느 부위든 평소 좋아하는 부위를 콜라주해봅니다.같은 이름의 가게 간판 수집: 저는 곁가지로 ‘바그다드 카페’ 간판 사진을 모으고 있습니다. 동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도시마다 같은 이름의 카페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몇 장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손잡이, 스위치, 초인종 수집: 세상에 예술적 가치를 가진 손잡이, 스위치, 초인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찾아보시면 놀랄 거예요. 오래된 도시일수록 더 많습니다.카펫처럼 납작 누워 있는 개 사진 수집: 커다란 개가 납작하게, 카펫처럼 누워 있는 모습 너무 좋지 않나요? 막상 걸어다니는 개를 보면 그렇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데 게으른 모습이 좋은 걸까요?창문 장식 수집: 창문에 알전구를 달아놓거나, 그림을 바깥을 향하게 기대어놓은 것을 발견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무척 궁금해집니다.이 리스트는 무한히 써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소한 것, 언뜻 무용해 보이는 것, 스스로에게만 흥미로운 것을 모으는 재미를 아는 사람은 삶을 훨씬 풍부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집가만큼 즐거운 생물이 없지요. 그리고 수집가의 태도는 예술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항상 다니는 길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신이 사는 곳을 매일 여행지처럼 경험하는 사람들 말예요.길에 갑자기 주저앉아 사진을 찍는 게 처음엔 부끄러웠습니다. 이제는 크게 부끄럽지 않아요. 언제나 바쁘고 쫓겼던 마음이 그 순간 평온하고 즐겁게 전환되는 걸 느낍니다. 부디 멋진 취미를 찾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