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쿠, 아티스트, MR.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구겨진 종이와 물감이 흩뿌려진 폐허 속에 사랑스러운 소녀들의 얼굴이 나뒹굴고 있다. 이토록 참혹하고 깜찍한 세계를 만든 장본인 Mr.는 말한다. “나는 오타쿠이고 아티스트입니다. 당신은 모에를 알고 있나요?” | 아티스트,Mr.,미스터,오타쿠

지난 12월 12일 페로탱 갤러리, 일본 아티스트 Mr.의 개인전 오프닝을 3일 앞두고 준비가 한창이었다. 벽면을 감싼 종이는 갈기갈기 찢겨 있고 바닥엔 구겨진 비닐, 나무판자가 나뒹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2011년의 쓰나미와 지진 등 수차례의 재난을 겪은 일본의 상황을 표현한 풍경. 곧 이 폐허 같은 공간엔 Mr.의 신작 여섯 점이 전시될 것이다. 방 안 여기저기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소녀들의 얼굴이 나뒹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니 문득 전쟁과 지구 멸망을 소재로 한 아니메(일본 애니메이션) 가 떠올랐다.Mr.는 그 설치 현장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있었다. 우동 사진에 물감을 흩뿌리다가 새로운 색을 만들어 천장 구석구석을 가리켰다. “시뮬레이션 해보았을 때는 페로탱 갤러리 천장에 저렇게 도드라진 기둥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마 천장 부분은 조금 바꾸어야 할 것 같아요.” 결국 하얀 갤러리 천장은 분홍과 초록으로 칠해졌다. “작업하면서 ‘이대로 좋은가’ 하고 계속 자문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바꾸어야 합니다.” 이번엔 한참 동안 벽을 바라보고 있더니 갑자기 벽에 붙은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입술을 쭉 내민 채로 꽤 많은 양을, 사정없이 벅벅!Mr.라는 미스터리한 이름은 야구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 선수의 닉네임 ‘Mr. 자이언츠’에서 따온 것이다. 괴상한 인터뷰를 즐기는 ‘Mr. 자이언츠’와 Mr.의 기행에서 비슷한 인상을 받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저의 코스프레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잠이 안 올 때면 코스프레를 합니다.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스커트를 입으면 굉장히 상쾌해지는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코스프레를 할 생각입니다. 돌아다닐 수 없게 되면 집에서 혼자라도 괜찮아요.”Mr.의 인스타그램 계정 @misteryanen을 방문하면 세일러복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든지, 스커트를 입고 얼굴을 파랗게 칠한 Mr.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시 오프닝마다 코스프레를 하기로 유명한 그가 이번엔 어떤 복장을 준비했을까? 물감이 잔뜩 묻은 손으로 후드 티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던 Mr.가 수줍은 듯 아이폰 사진첩을 켰다. “가발도 안 쓰고 화장도 안 한 사진이라 부끄럽지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붉은 리본이 달린 하얀 세일러복을 입은 Mr.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아니메의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은 진짜다! 그의 스승인 무라카미 다카시가 ‘오타쿠 문화의 연구자’를 자처한다면 Mr.는 오타쿠 그 자체다. “고수 위에는 언제나 더한 고수가 있는 법입니다. 때문에 마음에 드는 피겨를 볼 때마다 구입하고 있어요. 아니메 잡지와 동인지(팬들이 만든 2차 창작물)를 보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런 것들이 내겐 공부가 됩니다. 하지만 내 작품이 오타쿠 문화를 대변한다고는 볼 수 없어요. 오히려 개인적인 판타지에 가깝습니다.”물론 Mr.의 판타지는 소녀들의 세계다. 그가 제작한 퍼렐 윌리엄스의 ‘It Girl’ 뮤직비디오, 비키니 차림의 소녀들이 해변을 뛰노는 장면을 생각해보자.(이에 대해서 역시 “퍼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일본적인, 나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는 코멘트를 남긴 바 있다.) 그처럼 Mr. 작품에선 깜찍한 고양이, 초밥 혹은 도쿄의 거리 등 지극히 일본적인 소재를 조연 삼아 각종 캔디 컬러 머리를 한 소녀들이 등장한다. 환상과 현실 사이 어딘가로 모험을 떠나는 듯한 사랑스러운 소녀들. Mr.의 작품을 두고 아티스트 폴 매카시는 이런 평을 남겼다. “그의 작업에 나타난 롤리타 콤플렉스와 오타쿠 문화, 그 작고 순수한 세계는 참을 수 없이 매력적이다.”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작업을 일삼는 폴 매카시가 Mr.의 작품에 끌린 건 아마 소녀들의 행복한 외모 이면에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일 거다. 일단 오타쿠 문화의 태생 자체가 그렇다. 2005년 Mr.가 참여하고 무라카미 다카시가 큐레이팅한 그룹전 에 따르면 오타쿠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력감과 혼란의 반작용으로 발생한 것이다. 더불어 Mr.는 자유롭고 밝은 소녀들의 이미지가 “심각한 상실과 무기력함 속의 삶에 대처하기 위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나 SF135 와 같은 종류의 내러티브”라고 말했다. 결국 Mr.의 소녀들은 평화로워 보이는 일본에 잠재된 불안과 혼돈을 상징하는 동시에 상처를 치유해주는 모에(대상에 대한 애정, 또는 열광하는 대상의 매력을 뜻하는 오타쿠 용어. 에로스보다 플라토닉에 가까운 감정)의 아이콘인 셈이다. 실제 그의 인스타그램엔 이런 소개말이 적혀 있다. ‘I am Mr. I am Artist. You Know MOE’.Mr.의 예술 세계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슈퍼플랫(하위문화로 취급되었던 오타쿠 문화를 순수예술의 범주로 승격시킨 것)’과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가난한 예술)로 설명할 수 있다. 2015년 시애틀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에서 선보인 ‘Give Me Your Wings: Think Different’는 망가진 컴퓨터와 의자, 박스 등 온갖 잡동사니로 이루어진 이상한 성을 연상시켰다. 작품의 재료는 Mr.가 수집한 ‘쓰레기’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수거한 쓰레기를 비닐봉지에 넣어 날짜를 적어두었다고 한다. 마치 인생을 기록하는 것처럼 말이다.“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 전시에는 쓰레기가 없다는 겁니다. 이전엔 사람들이 내다 버린 캔, 다다미, 망가 같은 잡동사니를 열심히 모아서 작품을 만들었으니까요.” 이번 전시에서는 직접 아이폰으로 촬영한 이미지들과 라디오를 듣다가 생각난 문구들이 쓰레기를 대신한다. 지하철의 풍경, 노을 녘 도쿄의 도로 사진이나 ‘Stay with me’ 같은 말들이 혼잡한 상황 곳곳에 깨알같이 박혀 있다. “‘본래 하이엔드보다는 서민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보면 하위문화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 진품보다는 모조품에 더욱 편안함을 느낍니다.”서울에서 보낸 일주일가량의 시간 동안에도 Mr.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찍었다. “이거 정말 많이 팔던데요?”라며 Mr.가 보여준 사진첩엔 핫도그와 번데기, 호두땅콩과자 같은 거리 음식이 가득했다. 작품 이야기를 할 때보다 한결 신난 표정으로 포장마차 사진을 보여주던 그가 대단한 것을 보았다며 영상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개인 인스타그램 계정에도 포스팅한 짧은 영상은 세월호 인양 시위 때문에 팔판동에 위치한 갤러리 페로탱 앞마당까지 경찰이 들어왔던 장면이었다.“촛불 시위 현장에 가보았습니다. 평화로웠고 콘서트 같은 집회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야송’이라는 노래인데 과격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들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처음엔 멜로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중독성이 있어요.” 그러더니 아무래도 후크송이라며 다시 한 번 “하야 하야 하야~” 후렴구를 흥얼거린다.사실 Mr.를 만나기 전 나는 그가 작품 속에 만화 같은 이야기를 숨겨놓았으리라 예상했다.1) 소녀들마다 마음속으로 이름을 붙여놓았을 것 같았고(“좋은 생각입니다만 지금까지는 이름을 붙이진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세 점은 이름을 타이틀로 합니다.”)2) ‘As I close my eyes, I see the distant Arakwa River, the faraway sky(눈을 감을 때마다, 멀리 떨어진 아라카와 강과 하늘이 보인다)’ 같은 서정적인 작품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감춰진 서브 텍스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궁금증을 털어놓자 Mr.가 갑자기 이면지에 쓱쓱 그림을 그렸다. 육각면 각각에 ‘Bird’ ‘Seoul’ ‘Hot’ 같은 단어가 적힌 연필 한 자루. “이 연필을 또르르 굴린 다음에 ‘Bird’ 면이 나오면 ‘아! 새다!’ 하고 새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작업한다고 보시면 좋습니다. 작품 제목을 정하는 방식도 비슷해요. 타이틀이 작업에 많은 설명을 더해주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내러티브가 상당히 없는 편이지요.”자신의 작품이 “일본의 창조성과 장인정신에 영감을 주는 것” 외엔 어떤 바람도 없다는 순도 1백 프로의 오타쿠이자 예술가인 Mr.는 자신만의 우주에서 다양한 실험을 시도 중이다. 일관된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항상 신선한 충격을 주는 건 보다 새로운 방법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이제껏 페인팅,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었던 그는 일 년여 전엔 작업하는 모습을 생중계하는 1인 방송을 하기도 했다.“많이 안 보던데요? 워낙 대단한 BJ들이 많아서.... 요즘엔 VR에 관심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플레이스테이션 VR이 출시되었는데 와아, 굉장합니다. (유튜브에서 오타쿠 VR 콘텐츠를 찾아 보여주면서) 이 소녀와 함께 사는 느낌이라고 해요. 그래서 스커트 밑을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도 많다고 합니다. 난 아직 구입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요.(웃음)”Behind Scene “작업하면서 ‘이대로 좋은가’ 하고 계속 자문합니다. 그리고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바꾸어야 합니다.”라는 아티스트 Mr.의 설치 현장. 그는 갤러리 패로탕의 화이트 큐브를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다!아니메 코스프레를 한 Mr. 그의 전시 오프닝 현장에서 G 드래곤과 함께.https://www.instagram.com/p/BOCfw58DSsp/?taken-by=xxxibgdr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