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너리와 아트가 만날 때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토스카나에서 가장 중요한 와이너리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카스텔로 디 아마(Castello di Ama)에서 격정적인 오감의 향연을 경험했다. 와이너리 곳곳에 설치된 현대미술 작품이 선사한 오가닉한 감각이었다. | 아니쉬 카푸어,아트,와이너리,카스텔로 디 아마,이우환

피렌체 역에 도착하자 이미 한밤중이었다. ‘슈퍼 키안티’라는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와이너리이자 아주 특별한 현대미술 컬렉션을 소장한 카스텔로 디 아마(Castello di Ama)에 닿으려면 60km를 더 가야 했다. 산을 휘감으며 펼쳐진 흙길을 이탈리아 운전사는 유려하고 스피디하게 운전했고 두 시간쯤 지나자 산중에 중세 도시의 모습을 간직한 작은 마을이 나왔다. 밤길을 달려온 손님을 위해 와이너리를 이끌고 있는 마르코 팔란티(Marco Pallanti)와 로렌차 세바스티(Lorenza Sebasti) 부부가 늦은 저녁식사를 마련해두었다. 몇 가지 파스타와 석회질로 이루어진 테루아의 독특한 개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싱글 빈야드 키안티 클라시코를 곁들인 식탁은 소박하면서도 최고의 맛을 선사했다.1982년부터 카스텔로 디 아마에서 일하기 시작한 와인 메이커 마르코는 10년 뒤 와이너리의 2세대인 로렌차와 결혼해 와이너리를 이끌게 되었고, 당시에는 품질로 인정받지 못하던 토스카나 와인의 명성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저는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 테루아를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토스카나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싱글 빈야드의 개념을 활용한 이유도 이 곳의 지역성을 듬뿍 머금은 와인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테루아의 개념은 단지 토양이나 기후와 같은 자연환경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지역 사회를 이루고 있는 문화와 전통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이다. 와인과 예술 모두 지역성을 진하게 드러낼 때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것. 그렇기에 광활한 영토 안에 유명한 예술작품들을 가져다 놓은 와이너리들은 많지만 두 사람이 직접 예술가와 긴밀한 소통을 나누며 장소특정적 작품을 영구 소장해 와이너리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이곳의 예술 프로젝트는 단연 특별하다. “우리는 1999년부터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해왔고 작가들은 여기에 와서 풍경, 음식, 와인, 건축에서 영감 받아 장소특정적 작품을 창작합니다. 우리는 장소와 작품이 소통하기를 원해요. 드넓은 와이너리 어느 곳에 작품을 설치하든 상관없지만 카스텔로 디 아마와 특별한 연관성을 갖기를 바라죠. 어떻게 보면 와인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와인이 이곳의 토양, 기후 등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 독특한 맛과 향을 내듯이 이곳의 예술도 마치 이 장소에서 자라난 것 같았으면 해요.”(로렌차) 2009년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설치하면서 부부와 연을 맺게 된 뉴욕 베이스의 작가이자 큐레이터인 필립 라레트-스미스(Philip Larratt-Smith)는 이곳의 현대미술 컬렉션에 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두 사람은 문화가 시민의 기본적인 가치였던 세대의 이탈리아인이다. 두 사람에게 초대된 아티스트들은 프레스코화나 제단화를 위임 받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처럼 카스텔로 디 아마의 공간 안에서 작업해야 한다.” 이곳에 자리한 작품들은 그 어떤 기념비적인 것도 없고 경이롭거나 과장된 것도 없다. 풍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없고 전체적으로 절제, 균형, 조화로운 휴식으로 가득하다. 1999년부터 현대미술 프로젝트는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계획이나 의제 없이 시간이 흐르면서 새롭게 조정되며 확장되고 풍부해졌고 정체성은 수정되고 동시에 강화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구글 맵에서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게 됐다. 토스카나의 주도 피렌체에서 조금 떨어진 시에나 현의 ‘가이올레 인 키안티’라는 자치도시 내 높은 언덕 위에 나는 파란 점으로 위치해 있었다. 이른 아침, 해발 4백80미터 고도에 설립된 와이너리의 창밖 너머로 포도밭과 올리브나무 숲의 경계에 안개가 서리고 몇 세기 전의 석조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돌길 곳곳에 컬러풀한 색채를 덧입힌 카메룬 작가 파스칼 마르틴 테이유(Pascale Marthine Tayou)의 ‘행복을 위한 길(Le Chemin du Bonheur)’을 지나 2000년 카스텔로 디 아마에 가장 처음으로 설치된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아마의 나무, 나눔 그리고 다양한 거울(L’albero di Ama, Divisione e Moltiplicazione dello Specchio)’을 보기 위해 지하 저장고로 내려갔다. 계단 끝에 일말의 이질감 없이 거대한 나무 토막의 길게 갈린 틈 안에 다양한 각도로 잘린 거울이 삽입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중요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인 피스톨레토는 이 근처에서 구한 나무로 작품을 만들었다.그 자리에 못박힌 듯한 첫 번째 작품을 지나쳐 축축하고 어두운 셀러로 더 들어가자 현재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룬 책을 집필 중이기도 한 필립이 구멍에 나 있는 쇠살대를 가리키며 아래를 내려다보라고 했다. 거기에는 꽃무늬 왕관을 쓴 연한 핑크빛 여성상이 웅덩이 가장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대 감옥에 갇힌 것 같아 보였다. ‘Topiary(자연 그대로의 식물을 여러 가지 동물 모양으로 자르고 다듬어 보기 좋게 만드는 기술 또는 작품)’라는 제목의 조각은 이곳에서 난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몸은 어린 소녀의 형상을 하고 있고, 꽃봉오리에서는 물이 살살 뿜어져 나왔다. “루이스 부르주아가 98세의 나이로 죽기 일 년 전에 만든 거예요. 루이스는 이곳이 오래전 분수였다는 사실을 좋아했어요.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 유기학와 기하학, 건축과 인간의 신체와 같이 상반되는 것들을 하나의 형태 안에 얽어맵니다. 이 소녀상은 분열된 정체성을 가진 복합적 존재로 무한함, 생산력 그리고 변신의 상징이죠. 지하의 샘에서 그녀는 죄수 혹은 동화 속 공주처럼 갇혀 있는 동시에 보호 받고 있어요. 무릎 꿇은 형상은 애원, 기도 혹은 속죄를 암시하고 표면이 거친 돌 벽은 비유적으로 자궁 혹은 어머니 육체의 원시적 컨테이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각의 꽃무늬 왕관에서 흐르는 물은....” 나는 필립의 설명을 뒤로하고 녹슨 사다리를 아슬아슬하게 부여잡고 3m 아래로 내려가 2평도 채 안 되는 웅덩이에서 닿을 듯한 거리의 작품을 마주했다. 쇠살대 아래로 내려다봤을 때보다 훨씬 커 보였고 내가 본 가장 심오하고 아름다운 형상이었다.우리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2001년 이곳에 두 번째 프로젝트로 설치된 다니엘 뷔렌의 ‘포도원에서:관점(Sulle Vigne:Punti di Vista)’으로 향했다. 언덕 끝에 풍경을 가로막는 가로 25미터, 높이 2미터의 거대한 거울 벽이 버티고 있었다. 거울에 동그랗게 솟은 나무 한 그루와 17세기에 지어진 집과 어리둥절한 표정의 내가 비쳤다. 그리고 동시에 같은 간격으로 난 5개의 창문을 통해 골짜기 너머에 이어져 있는 포도밭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치 자연 속에 창을 내 전망 좋은 방의 정수가 완성된 듯했다. “뷔렌은 자연과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 프레임에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아무리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본다고 해도 결국 자연에 속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해요.”(필립) 뷔렌 작품 옆에는 쿠바 아티스트 카를로스 가라이코아(Carlos Garaicoa)의 ‘내 이웃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아(Yo No Quiero Ver Mas a Mis Vecinos)’가 언덕배기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 한때 탄압받기도 했던 가라이코아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베를린 장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벽을 모형으로 얼기설기 설치해놓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분리시키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벽을 마치 장난감같이 만들어 놓아 풍자적인 느낌이 났다. “저는 카를로스의 작품이 좋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풍자하면서 결코 우울한 비관론으로 빠지지 않거든요.”(로렌차)중세시대의 돌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카스텔로 디 아마의 영토 안에는 그때 주민들이 이용하던 아담한 예배당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중 한 곳에서 “거대한 사이즈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 중 하나”라고 말했던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의 가장 작고 사적인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6평 남짓한 17세기 예배당 바닥에 일출 때의 태양 같은 붉은 원이 빛나고 있었다. 그리스어로 피라는 뜻의 작품 ‘Aima’는 예수의 피를 의미하기도 하고 와인을 떠올릴 수도 있는 제목이었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에서 이번에는 친밀하고도 따뜻한 경외감이 밀려왔다. 신비롭고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내 안의 무언가가 고개를 들었고 어느 신에게라도 기도를 드리고 싶어 잠시 눈을 감았다.또 다른 예배당에는 2년 전에 히로시 스기모토(Hiroshi Sugimoto)의 작품 ‘0의 고백(Confession of Zero)’이 설치됐다. 세계적인 사진작가인 스기모토는 예배당 뒤쪽의 숨어 있는 공간에 카메라 옵스큐라의 고전적인 사진술을 설치작으로 재현했다. “해가 좋은 날엔 이 작품의 그림자가 사진기에서 형상이 맺히는 장면을 그대로 보여줘요.” 닿을 듯 말 듯한 두 개의 뾰족한 조각은 0을 수학적 모형으로 만든 것으로 결코 서로 만나지는 않지만 수렴되는 상태를 형상화한 것이다. “이 장소는 목사님이 예배를 준비할 때 이용하던 공간이었는데 스기모토가 보자마자 여기에 작품을 설치하겠다고 결정했어요. 모든 작업이 끝난 후에는 티 소믈리에와 함께 티 파티를 열면서 노래도 불렀답니다. 즐거운 애프터 파티였죠.”(마르코)카스텔로 디 아마에서 가장 최근에 이뤄진 아트 프로젝트는 다름 아닌 이우환의 ‘(발굴된) 토포스(Topos(Excavated)’다. 지난 10월 9일 프리뷰를 가진 이 작품은 국제갤러리와 티나 김 갤러리의 도움으로 진행되었으며 필립과의 협업으로 이뤄진 첫 번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그는 와인 저장고를 그 자체로 예술로 변모시킨 이우환의 작품을 소개하기에 앞서 상기된 표정이었다. “저에게 이우환 은 예술작품을 만드는 철학자와도 같습니다. 그의 작업은 인간과 자연, 인간의 시간과 영원이라는 시간, 존재와 무(無)에 대한 강력한 명상을 의미합니다. 그의 작업은 대립된 관계라고 느껴지는 많은 것들이 공존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서양적 관점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들을 말이죠. 그가 했던 말 가운데 ‘예술은 우리가 누구인지 발견하게 해주고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위치를 찾게 해준다’는 말이 있는데, 아티스트에 의해 우리는 풍경과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이 또한 서양에서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릅니다. 자, 이제 그의 작품을 만나러 가볼까요?”계단을 통해 지하 셀러로 내려가자 자갈길로 둘러싸인 바닥에는 와인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색 회화가, 벽에는 대칭되는 형상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텅 빈 듯하면서도 어떤 기운으로 꽉 찬 극적인 미장센에 일행은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리스어로 ‘장소’를 의미하는 제목 ‘토포스’에 ‘발굴된’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회화는 마치 발굴된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는 이 공간이 고고학적 발굴 장소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했어요. 초기 문명시대에 살던 이들이 그려놓은 그림을 후대에 발견하는 것처럼요. 이우환이 저기 가운데 서서 수행하듯 붉은색을 칠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80세에 가까운 작가는 굉장히 능숙한 몸놀림으로 바닥에 물감들을 섞었는데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한 작업이라고 느껴졌어요. 회화를 그리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할까요?” 이우환은 일본의 모노하 사조를 이끈 주창자로서 조각, 회화, 설치 등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고, 자연적인 사물들과 직접 그린 형태들을 결합하며 신체적 제스처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리고 다니엘 뷔렌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관람자를 작품의 일부로 참여시킨다. 작품 사위로 난 자갈길을 걸으며 우리는 작품을 활성화시켰다. “이우환은 걸을 때 소리가 나기 때문에 자갈을 깔았다고 해요. 관람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작품 속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게 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계속 자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죠.” 다시 계단을 오르면서 로렌차는 이우환과 함께한 거대한 테이스팅 사진을 보여줬다. 만약 예술가가 되지 않았다면 와인 메이커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던 이우환은 그녀에 따르면 뛰어난 와인 감정가였다. “해 질 녘에 올리브 오일과 함께 와인을 마셨어요. 많은 작가들이 와인 애호가를 자처하지만 이우환이야말로 진정한 와인 러버였어요. 와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의 말은 그의 글처럼 깊고 철학적인 동시에 간결하고 명확했어요.”이우환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카스텔로 디 아마에서의 순례는 일단락되었다. 싱그러운 올리브나무 향기, 몇 백 년 된 와인 저장고에 배어 있는 시큼한 곰팡이 냄새, 고귀한 자주색, 사랑스러운 하늘색, 까슬까슬한 벽의 감촉, 축축한 바닥의 느낌.... 두 시간여의 투어를 마치고 나자 온갖 감각의 각성으로 모든 작품들이 그 어느 때보다고 깊고 풍부하게 다가왔다. 오직 카스텔로 디 아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오가닉한 감각이었다. 멍한 표정의 나를 보고 필립이 공감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저 역시 이곳에 올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아요. 자연과 예술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죠. 이런 경험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순례해야만 합니다. 굉장히 지역적인 경험이죠. 점점 더 세계화되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는 장소가 남아 있다는 점이 놀랍지 않나요?”※ 카스텔로 디 아마의 아트 투어는 예약 시 한 시간 반가량 진행되며 투어 후에는 와인 테이스팅이 마련된다. 18세기 건물에 자리한 레스토랑과 숙소 역시 방문객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www.castellodiam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