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계의 금수저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패션월드’로 가는 급행 티켓을 쥐고 태어난 패션계의 금수저들을 진정한 패션 아이콘이라 할 수 있을까. | 스테파노,소피아 리치,래퍼티 로,시스틴 스탤론,토마스 리

지난 9월, 1백여 명의 소녀 팬들이 운집해 있던 2017 S/S 밀라노 패션 위크의 돌체 앤 가바나 쇼장 앞. ‘I wanna marry you’와 같은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든 채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소녀들을 보고 있노라니 패션쇼가 아니라 콘서트를 보러 온 건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입구에서 만난 브랜드 홍보 담당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디자이너 듀오(특히 스테파노는 요즘 인스타그램에 푹 빠져 있다)가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패션계의 금수저 및 파워 인스타그래머들을 프런트 로에 대거 초대했기 때문이라 귀띔했다. 익숙한 셀러브리티와 프레스가 아닌, 뉴 페이스들이 참석하는 만큼, 인비테이션은 물론 신분증까지 꼼꼼하게 확인을 받은 후 입장이 가능하다는 말도 덧붙이며. 쇼장에 들어서자 영 트렌드세터들의 모습을 담기 위한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건너편을 바라보니 라이오넬 리치의 딸 소피아 리치(Sofia Richie), 주드 로의 아들 래퍼티 로(Rafferty Law), 실베스터 스탤론의 딸 시스틴 스탤론(Sistine Stallone), 파멜라 앤더슨과 토미 리의 두 아들 브랜든 토마스 리(Brandon Thamas Lee)와 딜런 재거 리(Dylan Jagger Lee) 등, 최근 패션계에서 종횡무진 활약 중인 금수저 군단이 일렬로 앉아 플래시 세례를 만끽하고 있었다.최근 몇 년간 패션계에 영향력을 행사한, 또는 패션계가 주목한 신(新) 패션 아이콘이 누가 있었나 돌아보니, 대다수가 아빠 또는 엄마 혹은 조부모가 유명인인 경우가 상당수. 패션계의 금수저라 불리는 이들은 패션쇼의 사운드트랙을 태교음악으로 듣고 자란 이들로, 태어난 후에는 칼 라거펠트와 같은 패션 업계 유명인사들을 삼촌 또는 고모로 부르며 친분을 쌓아왔다. 또 재력 있는 부모님이 입혀준 고급 의상을 입고, 각종 패션 행사를 따라다녔으니 패션 조기교육을 A급으로 받은 셈. 일 년 전 콘서트를 위해 내한한 노엘 갤러거의 인터뷰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 하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우주비행사가 되거나 내 자식들 중 하나가 되고 싶어요. 날 때부터 팔자가 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우스갯소리 같겠으나 최근 주가상승 중인 영 패셔니스타 아나이스 갤러거(Anais Gallagher)가 그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비단 돌체 앤 가바나 쇼를 보고 나서 든 생각이 아니라 이전부터 패션계의 어린 금수저들을 소개하고 칭송하는 수많은 미디어를 접할 때마다 한편으론 씁쓸한 기분이 들곤 했다. 자신의 의지보다는 태어난 환경에 의해 자연스레 그 길을 걷게 된 이들을, 과연 진정한 패션 아이콘이라 부를 수 있을까? 케이트 모스, 나오미 캠벨, 마이클 잭슨, 데이비드 보위, 마돈나와 같은 과거의 패션 아이콘, 2000년을 빛냈던 슈퍼모델들과 여전히 센세이셔널한 레이디 가가와 리한나 같은 뮤지션 등 타고난 재능과 패션에 대한 열정, 독보적인 개성으로 패션계를 뒤흔들었던 이들을 떠올려보라. 특히 지난 10월호에서 다룬 린다 에반젤리스타의 성공 스토리(뉴욕에 상경해 바퀴벌레로 가득한 아파트에 살던 그녀가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모델이 된)를 접하고 난 뒤에는 더더욱 현재의 패션 아이콘들이 속 빈 강정처럼 느껴졌다. 이들의 무기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우월한 비주얼 유전자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진 황금 인맥, 그리고 그들처럼 화려한 인생을 꿈꾸는 수십만 명의 SNS 팔로어에 불과하지 않은가. 여기에 약간의 치맛바람(?)이 더해지면 패션월드행 급행열차를 타고 프런트 로에 안착하게 되는 것이다. 15살인 카이아 거버(Kaia Gerber, 사업가 란드 거버와 신디 크로퍼드의 딸)가 크롬하츠의 2016 S/S의 광고 모델로 발탁된 것, 소피아 리치가 디자이너 스텔라 매카트니와 함께 2015 메트 갈라 레드 카펫을 밟는 영광을 누린 것, 1999년생인 탈리타 폰 퍼스텐버그(Talita von Furstenberg, 다이앤 본 퍼스텐버그의 손녀)가 영국 지의 커버를 장식한 것, 그 유명한 릴리 로즈 뎁(Lily Rose Depp, 조니 뎁과 바네사 파라디의 딸)이 샤넬 ‘넘버5’의 새 얼굴이 된 것은 위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와 같은 시대의 흐름을 따를 것이냐, 혹은 나에게 모티베이션이 되는 패션 아이콘을 능동적으로 찾아 나설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다시 2017 S/S 돌체 앤 가바나 쇼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날 쇼에는 앞서 얘기한 금수저들과 함께 루카 사바트(Luka Sabbat)도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타고난 끼, 슈프림과 하이더 아커만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패션 스타일링, 스타일리스트, 모델, 패션 컨설턴트를 아우르는 전방위적인 활동으로 패션계가 주목하는 영 파워다. 부모님이 모두 디올에서 일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패션계와 별다른 인맥이 없던 그가 10대들의 패션 아이콘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버질 아블로나 카니예 웨스트도 인정한 남다른 시각,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 때문. “모두가 인스타그램으로 유명해지고 싶어하죠. 티셔츠나 후드 티셔츠를 몇 장 내놓고 ‘나도 디자이너야’라고 하는 요즘 시대에 질렸어요. 전 SNS 스타가 아니라 ‘영 크리에이터’로 불리고 싶어요. 언젠간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저만의 것’을 할 거예요.” 물론 남다른 패션계 금수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켄달 제너 옆 예쁜 애’ 정도로 불리던 지지 하디드(Gigi Hadid)다. 절친인 켄달의 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지지의 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중. 11월호에 소개된 지지의 하루 일과만 보아도 그녀가 그저 TV 스타인 엄마의 후광과 인형 같은 얼굴과 몸매만을 무기로 지금의 위치에 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두 쇼에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명성을 얻는 다른 금수저들과는 달리, 성실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 그녀이니, 토미 힐피거와의 콜라보레이션한 컬렉션이 성공을 거둔 것도 단지 그녀의 유리한 배경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옷을 입을 때 우리가 디자인하는 데 소요한 시간을 느낄 수 있길 원했어요. 우리에게는 품질이 정말 중요했거든요.” 나고 자란 배경이 어떻든, 노력의 대가를 아는 지지 하디드, 자신이 가야 할 길, 해야 할 것을 분명이 아는 루카 사바트와 같은 21세기형 패션 아이콘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은’수저, 설령 ‘흙’수저라 할지라도. 린다 에반젤리스타 역시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성에서 자라났어도 똑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거예요. 텐트에서 자라났어도 그랬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