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er's TALK 남노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언제나 미리 해두자는 다짐을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남노아

더 이상 넘길 달력의 장이 없어지고야 말았다. 새 달력에 한 해의 주요 행사(부모님 생일이라든지 부푼 여름휴가 등)를 동그라미 쳐놓거나 내년의 공휴일이 주말과 겹치지 않는지 빠르게 스캔하다 보면 이내 천천히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했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올 한 해 나의 토픽은 무엇이었을까’라는 나름의 연말 시상식 같은 순위를 정해본다. 올 한 해 두 번의 컬렉션을 치렀고 몇 가지 콜라보레이션, 그리고 벌써 6개월째 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칭찬 들을 만큼 많은 일을 한 듯한데도 달력을 보며 올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초조하고 찜찜하다. 결국은 알면서도 게으름 피우느라 하지 않았던 부수적인 연초 계획 때문이겠지. 가령 올봄 정도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만둔 필라테스나 올해는 꼭 가족여행을 가겠다던 약속, 혹은 금연 계획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결국 지키지 못하고 지나친 다짐들을 잊고 지냈던 건 아니다. 아니 늘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에는 결심이 따랐다. 그리고 그 결심을 하려면 결심하기까지의 시간도 필요했다. ‘터널시야’라는 것이 있다. 특정한 것만을 바라보고 나머지를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주변의 대부분을 놓쳐버리는 현상인데 이처럼 터널시야가 발생하여 한 곳에 집중하게 된다는 의미는 ‘다른’ 부분을 의식적 혹은 인지적 관점에서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결핍을 느낄 때 이러한 터널시야에 빠지기도 하는데, 심리적 불안감이 부정적인 판단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오히려 적정한 수준의 결핍은 창의성을 높여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준다고 한다. 예를 들면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더라도 딱 하루만 더 주어진다면 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며칠 동안의 성과가 훨씬 더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창의성이 발휘되기에 긍정적인 시간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실제로 많은 것들이 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날 긴박하게 완성되곤 하는데 나는 컬렉션이나 룩북 촬영을 앞두고는 늘 그렇다. 지난 몇 달 전부터 시즌 컨셉트를 정하고 틈틈이 의상을 만들었다곤 했지만 막상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짧은 기간에 대부분의 것을 해버리는 듯하다. 한참 전 정해놓은 많은 룩들이 대거 바뀌기도 하고 보드판에 채워져 있던 모델 리스트가 체스판 옮기듯 움직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간 고민했던 시간과 본격적이지 않았던 일들이 허무한 시간 낭비라는 것은 아니다. 빨리 끝내버리자 했던 다짐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언제나 마감이라는 건 두려운 일이고이 두려운 일과 마주하려면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심을 끝내기까지는 많은부담감과 죄책감이 계속된다. 반성해봤자이미 지나간 일이다.왜 이렇게 우리는 어떤 일을 미리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긴박한 시간을 쪼개 해치우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것일까. 결국 나는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일을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벼락치기 식으로 해치우기 일쑤이니, 차라리 그럴 바엔 막바지쯤 계획을 세워 생각을 시작하고 집중하여 완성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물론 미루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선의 능률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타임에 혼신의 힘을 쏟아보자는 것은 연말을 앞둔 지금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로서 위안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이 현재 무수히 세워둔 계획만 무성했던 올해의 남은 한 달을 잘 보낼 수 있는 자세가 될 테니까. 올 한 해 이것만은 이루리라 했던 것들을 이제 남은 마지막 한 달에 몰두해 해보는 것은 어떨지. 물론 솔로들의 연애는 그렇게 급작스럽게는 힘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