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 페어 아시안 나우를 소개합니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파리의 대표 아트페어 피악이 10월 중순 열렸다. 그 기간 열리는 또 다른 페어들 가운데 아시안 나우는 아시아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신생 페어로 파리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 아트,페어,아시안 나우

요즘 미술계 인사들은 패션쇼를 따라 철새처럼 대이동을 하는 패션 피플처럼 일 년을 보낸다. 아트페어가 큐레이터, 학예사, 갤러리스트, 컬렉터 등 미술계 구성원을 한자리에 모으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등극한 이후 벌어진 현상이다. 손꼽을 만한 아트페어만 해도, 3월에는 뉴욕의 아모리쇼와 고전미술 전문 페어인 마스트리치, 파리의 파드 디자인 아트페어가 있고, 5월에는 뉴욕의 프리즈 아트페어, 6월과 12월에는 아트바젤, 10월에는 런던의 프리즈와 파리의 피악, 11월에는 파리 포토가 있다. 여기에 더해 수요가 있을 법한 모든 도시, 베이루트, 타이페이, 두바이, 콜로뉴, 제네바, 팜비치, 인디아, 로테르담, 아스펜 등지에서도 신생 아트페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니 페어만 쫓아다녀도 일 년은 순식간이다. 더구나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아트페어들은 소규모 위성을 거느리는 거대 행성처럼 산하에 또 다른 아트페어를 만든다든가, 도시를 옮겨가며 몇 개월에 한 번씩 아트페어를 개최하는 추세다. 바젤 아트페어가 산하에 디자인 페어를 만들고, 바젤을 벗어나 아트바젤 홍콩,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로 확장한 것만 보아도 대세는 자명하다.아시안 나우 아트페어는 이런 바람을 타고 파리의 피악 기간에 맞추어 진행되는 아트페어로, 신설된 지 2년밖에 안 된 신생 페어다. 젊은 아트페어답게 우선 기획이 신선하다. 상하이도 아닌 파리에서 아시아 현대미술 전문 아트페어라니. 이름 그대로 방글라데시, 중국, 캄보디아, 홍콩,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한국, 티베트와 베트남까지 그야말로 아시아라 칭할 수 있는 모든 국가의 컨템퍼러리 현대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피악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가고시안, 페로탱, 데이비드 츠비르너 등 거대 갤러리의 각축장이라면 아시안 나우는 현지에서 끊임없이 젊은 아티스트와 소통하는 중소 갤러리를 위한 플랫폼이다. 그래서 작품들이 참신할 뿐 아니라 가격을 물어보기도 꺼려지는 피악과 달리 접근성도 좋다. 올해 아시안 나우는 34개의 갤러리가 참여했는데, 대부분 자국에서는 알 만한 갤러리이지만 유럽권 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블루 오션 전략이라고 할까.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컨템퍼러리 아트의 흥행주를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그 자리에 오를 새싹을 발굴하는 데 관심이 많은 큐레이터나 갤러리스트, 컬렉터들이 흥미를 느낄 만하다.올해 아시안 나우는 피악이 열리는 곳과 멀지 않은 샹젤리제 근처 로슈 가의 큰 건물 내에서 진행되었다. 파리의 고급 사무실이나 가정용 건물로 흔히 쓰이는 실내 공간을 참여 갤러리에 한 군데씩 할당했기 때문에 복도를 따라 남의 집 구경하듯 둘러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가건물이나 임시 건물을 세워 갤러리 부스를 만드는 여느 아트페어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공간 자체가 사각의 화이트 부스가 아니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질 수 있지만 갤러리 외의 공간, 가정집이나 사무실, 식당 등지에 작품을 전시하는 건 최신 트렌드이기도 하다.피악 기간에 열린 또 다른 아트페어 ‘프라이빗 초이스’가 그와 같은 스타일로 큰 인기를 모았다. 디자인 컬렉터인 나디아 칸데가 직접 선택한 디자인 가구와 컨템퍼러리 작품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판다는 파격적인 컨셉트의 프라이빗 초이스는 전형적인 파리지앵의 주거 공간인 오스만식 아파트에서 진행되었다. 정형화된 갤러리 공간이 아닌 생활 공간에 전시된 작품들은 이 그림을, 이 작품을 우리 집에 가져다 놓으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는 컬렉터들의 고민을 속 시원히 해소해준다. ‘아 이런 느낌이겠구나’를 직관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구매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아시안 나우에서도 공간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전시 방식이 돋보였다. 파리, 상하이, 런던에 지부를 둔 마그다 단츠 갤러리는 아예 전시 컨셉트를 중국인 컬렉터의 파리 아파트로 잡았다. 컬렉터의 은밀한 공간을 엿보는 것처럼 중국 아티스트 리홍보의 종이로 만든 작은 조각상부터 어윈 올라프와 리우 볼린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는 컬렉터의 거실을 연출한 것. 지나가다 소파에 앉아 쉬면서 찬찬히 전시된 작품을 훑어보는 관객들이 눈에 띄었다. 3~4일 동안 무려 7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초대형 아트페어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실제로 끝없이 늘어선 부스, 많은 관객으로 인해 탁해진 공기, 참여 갤러리 수가 늘어날수록 미로처럼 늘어지는 통행 공간 등 대형 아트페어에 진저리를 치는 관객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게 아트페어 업체들의 공통된 고민거리다. 아트페어가 특성화된 작은 페어로 분화하는 추세에는 보다 작품을 가까이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아시안 나우’라는 이름 그대로 아시아 출신 아티스트들이 살아가는 아시아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현대미술 안에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유럽권에서는 드문 경험이다. 얼마 전 서울에도 지부를 마련한 최앤라거 갤러리의 부스에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노랫가락이 인상적인 김아영 작가의 비디오작품과 오형근 작가의 아줌마 초상사진 시리즈를 만날 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아줌마들의 모습과 끊임없이 달리는 마라토너가 등장해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우선 이질적인 비주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그 관심은 곧 한국의 역사와 정서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여느 아트페어보다 갤러리스트와 작가의 열정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아시안 나우의 특성이다. 그 나라의 문화와 사회 현상에 대한 간단한 브리핑만으로도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걸 경험할 수 있다. 당장 작품을 파는 것보다 자국의 현대미술이 반영하는 시대와 정서, 가치관을 알리고자 하는 흐름은 전시장 곳곳에서 포착되었다.홍콩에 적을 두고 있는 레오 슈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출품한 중국 아티스트 리우 청의 설치작품은 중국의 오늘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Buy Everything on You’라는 제목의 작품은 홍콩 근처의 산업도시인 신천의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인생 그 자체다. 가짜 프라다 가방부터 중국에서 유행하는 스티커 사진 시리즈, 각종 마트의 할인 카드까지 가방 내부의 모든 소지품을 하나 하나 늘어놓은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오늘의 중국을 내 친구의 일상처럼 느낄 수 있다.미술품에는 국적이 없다고 하지만 아시아만의 특성을 볼 수 있는 작품에 더 시선이 가는 이유는 그 작품이 가진 고유성 때문일 것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아시아 미술의 전통적인 코드에 충실했던 과거의 작품보다 정교하고 은밀하게 아시아적인 특징을 어필한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슬기 작가의 ‘Blanket Project U’ 시리즈는 도형으로 이루어진 조형미, 철저한 대칭, 직선과 곡선의 엄정함 때문에 얼핏 보면 대형 추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뜯어볼수록 그 안에 숨은 작가의 뿌리, 즉 동양의 미에 대한 작가의 현대적인 시선을 포착할 수 있다. 우선 ‘넝쿨째 굴러온 호박’처럼 우리나라의 속담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작품 가운데 둥근 노란색이 호박이라는 작가의 설명을 듣고 보면 과연 그렇다 싶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리의 속담이지만 외국인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파랑, 빨강, 노랑, 하양과 검정이라는 오방 색채는 작품에 생생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더구나 통영의 누비 장인인 조승연 씨가 전통 누빔 기술로 만든 텍스타일 누비 작품들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빔 기술 특유의 스티치 선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러나 민화적이고 토속적이지 않다.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한 작가의 현대적인 감각을 통해 해석된 우리 속담은 세련된 균형과 절제미의 세계다. 피악에서도 포착되었지만 패브릭은 현재 현대미술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재다.서양의 전통미술 기법인 템페라를 써서 화면을 구성한 중국 작가 시아오 구오 휘의 ‘Hunting’이라는 작품 역시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시아적인 특성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원근법을 무시하고 입체감 없이 표현된 인물들은 동양화의 화면 구성 그대로지만 부드러운 컬러와 명암을 구현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 기법인 템페라로 강렬함을 중화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총을 든 군인들과 살해 당한 인물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가의 사회고발적인 시선이 템페라 속에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자국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작가들이 많았던 한 세대 전에 비해 현재 아시아 컨템퍼러리 작가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작업을 하거나 공부했던 경험을 가진 신세대이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인 아시아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무조건 서양미술을 추종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우리 것이 최고라는 신토불이 정신에 천착하지도 않는다. 서양미술의 기법과 미학적인 가치관이 작가가 가진 동양적인 뿌리와 절묘하게 크로스오버된 작품, 아시아라는 지역적 문화적 한계성을 가뿐히 뛰어넘으며 그 한계성을 고유성으로 승화시킨 작품이 현 아시아 컨템퍼러리 아트의 큰 흐름임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와 갤러리스트들은 한결같이 뉴스보다 생생한 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그리고 오늘 안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에 대해 열성을 다해 말했다. 국제판 뉴스를 보는 것보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더욱더 오늘의 아시아가 피부로 와닿았다. 혼란스럽지만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대륙, 아시아의 에너지가 유럽 미술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름 그대로 ‘아시안 나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