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Go High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문명인답게 살자는 소박한 바람이 번번히 깨진다. 그래도 우리는 절망하는 대신 멋지게 살 거다. 촛불을 높이 들고. | Opinion,미셸 오바마,촛불

미국 대선 레이스에서 누구보다 빛났던 이는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이었다. 원래도 당대 최고의 웅변가 자리를 놓고 남편과 다퉈왔지만, 지난 7월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한 말 한 마디는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저들이 저급하게 굴어도, 우리는 품위를 지킨다(When they go low, we go high).” 트럼프의 음담패설 파문이 일었을 때는 “기본적인 인간 품격의 문제”라고 쏘아붙였다. 며칠 후 도나텔라 베르사체는 갑옷을 연상시키는 드레스를 그녀에게 헌정했다.미셸이 원한 것은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교양인이자 지식인, 민주시민으로서 최저선은 지키자는 얘기였다. 하지만 끝내 백인 중·하류층 앵그리 백인들은 그 호소를 외면하고 말았다.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게 창피한 줄은 아는 ‘샤이 트럼프’들은 막상 투표장에 가서는 그에게 표를 몰아줬다.미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폴 크루그먼은 ‘우리가 모르는 우리나라’라는 칼럼을 통해 절규했다. “우리는 이 나라가 인종적 편견과 여성혐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훨씬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사회가 됐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미국인은 민주적 규범과 법치를 지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틀린 판단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주로 도시 외곽에 사는 백인들은 미국이 어떤 나라여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지 않았다. (...)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미국은 실패한 나라이고 실패한 사회인가?”문명인답게 살자는 소박한 바람이 무산된 이번 ‘사건’은 이성과 지성의 실패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선은 ‘지적 기획’의 실패다.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불만을 해결하고 미래를 열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국 민주당이나 힐러리 캠프에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브렉시트 같은 경고음이 요란하게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쓰지 못한 세계 시민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혐오의 언어와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를 누빈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를 목도하며 이미 마음에 구멍이 뚫린 우리에게, 미국에서 날아오는 우울한 소식들은 더 스산하게 다가왔다.사람들의 마음, 여론의 흐름을 읽어내는 지적 작업도 실패했다. 트럼프의 당선을 예언한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식인이 틀린 예측을 내놨다. 저 이름 높은 언론들도 무릎을 꿇었다. 이성과 계몽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지적 신념도 뺨을 맞았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프리스틀랜드가 에서 간파한 것처럼 지식인이 말발을 세우는 시대는 벌써 끝났는지 모른다.트럼프의 승리에 도취된 듯 ‘벌거벗은 미국’이 백주대로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대학캠퍼스 안에서 히잡을 쓴 여성이 공격을 당했고, 백인 노인은 길에서 본 여성을 향해 “트럼프가 허락하기도 전에 너희를 성폭행 하겠다”는 막말을 퍼부었다. 혐오의 언어와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를 누빈다. 전대미문의 국정농단 사태를 목도하며 이미 마음에 구멍이 뚫린 우리에게, 미국에서 날아오는 우울한 소식들은 더 스산하게 다가왔다. “우리는 이미 트럼프를 겪지 않았냐”는 냉소가 번진다.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왔고 극복하기도 했던 우리이기에 다시 길을 열고 내를 흐르게 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싶다. 희망의 단초가 있냐고? 다행히, 아직은 있다. 많다. 이화여대 입학에서부터 학점 취득까지 갖가지 특혜를 받은 ‘비선실세’의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대자보. “네 덕분에 그동안의 내 노력이 얼마나 빛나는 것인지, 그 노력이 모이고 쌓인 지금의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실감이 나. (...) 너, 그리고 이런 상황을 만든 부당한 사람들에게 그저 굴복하는 게 아니라, 내 벗들과 함께 맞설 수 있어서 더더욱 기쁘고 자랑스러워.”저급한 인간들을 따라 하지는 말자던 미셸의 메시지와 꼭 닮은 이 명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미셸은 비록 절망했지만 이곳에서는 촛불의 물결로 타오르고 있다. 세상을 우습게 알았던 권력 실세 무리와 곳곳에서 서식하는 한국의 ‘트럼프들’은 곧 악몽을 꾸게 될 것이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