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힘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상상하는 것에는 제약도 한계도 없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 현실이 될 때, 비로소 창의적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 | NOHANT,DESIGNER,상상

머릿속이 간절하게 생각을 원하고 요구해서 ‘옛다, 생각하자.’ 하며 침대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본다. 컬렉션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뭐든지 닥치는 대로 생각해야만 한다. 옷을 만드는 일은 누워서(나는 대부분 누워서 생각을 하는 편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우길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보니 며칠 전 한 인터뷰에서 “영감은 어디서 얻죠?”라는 단골 질문에 그럴싸한 허세식 궤변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누워서 생각하는 것이요!”라고 담백하게 답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든다.사실 얼마 전만 해도 다음 시즌 컬렉션 컨셉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때가 있었다. 이때는 생각이 아닌 상상의 구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늘 내가 사용한 것보다 더 나온 듯하지만 결국은 지불해야만 하는 관리비처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생각들에 목덜미가 뻐근하게 굳어간다. 지난여름, 늘어난 뱃살에 동네라도 한 바퀴 돌지 않으면 두어 살은 더 늙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10분쯤 거리의 버스정류장까지 보잘것없는 산책을 다녀온 적이 있다.(종종 그 어처구니없는 거리를 운동이라고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직장인들 아니면, 학생들로 보였다. 적어도 내가 어쩌다 산책하는 저녁 시간에는 그랬다. 백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이어폰을 낀 채 흥얼거리거나 끊임없이 휴대폰만 응시하는 쪽이 학생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내가 상상하던 대학생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한들 거침이 없고 머스터드나 딥그린처럼 짙은 농도의 원색을 띠고 있으며 청춘이란 수식어만으로 설렘을 주는 거창한 존재라 부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그 피사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차! 오늘은 너무 더운 날이야.’라며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간단히 저녁을 배달해 먹고 또 드러누워 좀 전에 버스정류장에서 보았던 대학생들처럼 나의 지난 대학생활은 어땠나 하는 생각이 허무맹랑한 공상으로 연결된다. 만약 내가 지금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런 상황에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렇게 쓸데없을 상상(가령 댄스 동아리에 들었으면 어땠을까, 가려고 하지 않았던 MT를 줄기차게 갔다면 어땠을까, 무작정 배낭여행을 떠났으면 등등)을 하다 이번 컬렉션 컨셉트는 ‘University’가 좋을 것 같아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영감은 이렇게 누워서 하는 게으른 상상에서 오는 것이었다.물론 이 즐겁던 상상이 구체적인 생각으로 다가오면 영 즐겁지만은 않아진다. 스쳐 지나가듯 흘려버리면 되는 생각들을 부여잡고 그것을 현실화해야 하는, 특히나 상상 속의 철수나 영희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야 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 철수와 영희는 내가 처음 만난 사람 같기도 한데, 게으르고 낯을 가리는 나에게는 이 과정이 무척 고된 스트레스로 다가오곤 한다. 올가을엔 요 며칠 머릿속에서만 그려왔던 맘에 쏙 드는 가방을 하나 장만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몇 년째 친구가 만들었던(지금은 없어진 브랜드이지만) 그린 계열의 토트백을 들고 다녔는데 손잡이 부분이 많이 헐어 가죽이 종이처럼 변했고 얼마 전 길을 가다 그 가방을 쏟았는데 몇 년 전 영수증부터 애타게 찾던 선글라스까지를 발견하곤(가방의 깊이가 그렇게까지 깊지도 않다) ‘아! 당장 바꿔야 해.’라는 생각을 들었다. 새로 장만하고 싶은 가방은 블랙에 가까운 네이비나 브라운 톤이었으면 좋겠고 스트랩도 달려 있어 크로스로도 변형이 가능한 그런 토트백이었으면 좋겠다. 스트랩을 달아 크로스로 메려면 가방은 적당한 사이즈에 적당히 부드러운 가죽이어야 할 것이다. 한번씩 넘어지거나 차에서 쏟아지는 것을 감안하면 지퍼 장식이 있어 안과 밖을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어야 하고 겉면은 지퍼 장식이나 로고 없이 가죽 냄새만이 풍길 것 같은 말간 디자인이었으면 좋겠다.상상하지 않는 것은 창의적이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하지만 보통 이렇게 머릿속의 구체적인 디자인을 정확하게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확률은 아주 낮으니 결국 상상 속에 남겨야 한다. 디자이너나 되는 직업을 가졌으니 만들면 그만이지 할 수도 있지만, 늘 상상 속에 있던 것을 끄집어내기란 또 어지간히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불끈 “만들어보자!”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나는 그것을 ‘의지’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런 순간을 몹시나 환영해야 한다. 상상하는 것을 실행에 옮기고 그것을 배우고 깨우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 자는 계몽도서를 논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메일로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학생들(아직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 일일이 답변한 적은 없다), 혹은 상상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누군가에게 “그것은 매우 생산적인 것이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상상하는 것에는 제약도 없고 한계도 없다. 조금의 멍한 시간만 있으면 될 뿐.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선 반가운 의지와 부지런함이 수반되면 된다.이 글을 통해서라도 내가 일일이 답변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맘껏 상상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시작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라는 허황된 답변을 해본다. 그리고 상상하지 않는 것은 창의적이지 않은 것과 동일하다는 말도 함께. 원래 공상하길 좋아했던 내가 혼자만 ‘피식’대던 생각들을 어느 순간 제품으로 끄집어내고, 머릿속에 있던 온전치 못한 것들을 현실과 조금씩 끼워맞추다 보니 컬렉션이란 결과물이 완성된 걸 보면 상상은 단지 허황된 것만은 아닐 거다. 물론 상상이 현실적인 생각이 되는 순간 찾아온 스트레스 때문에 정작 코앞으로 다가온 컬렉션을 시간에 맞춰 다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지만, 십수 년 지난 과거 대학생 시절까지 상상 여행을 다녀왔으니 이쯤은 양보(?)할 수 있겠다. 오늘 먹은 점심 메뉴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 경우도 가끔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