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소리가 들려온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지난 20년 동안 대중적 감수성을 날 선 사회의식과 결합해 미술의 옷을 입혀온 설치미술가 배영환. 이제 그의 예술은 먼 북소리처럼 삶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며 더 깊은 곳을 건드리고 있다. | 배영환,PKM갤러리

배영환 작가는 조각, 회화, 설치, 영상작품 등을 넘나들며 대중적인 감수성을 사회의식과 결합하여 사회참여적인 미술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왔다. 1997년 첫 개인전 이후 몇년간 이어져온 ‘유행가’ 시리즈는 배영환 작가의 초기작품 세계를 대표한다. 흰 캔버스 위에 알약, 약솜, 병뚜껑 등을 노란 본드로 붙여 유행가 가사를 적어 내려가는 등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그 작품들은 모노크롬 회화 전통을 패러디하거나 민중미술의 권위주의와 한계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 누구에게나 현대미술에 정서적 몰입이 가능한 경험을 선사해주었다.이후 그는 ‘유행가’의 정서를 버려진 자개경대로 만든 기타에 투영해 한국 사회에서 가장이 짊어져야 했던 의무와 낭만 사이의 갈등을 표현했다.(‘남자의 길’, 2005) 2012년, 지난 15년을 돌아보는 전시 에서는 화려한 대도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공허함과 치열함을 깨진 술병 조각들을 이어 붙인 샹들리에(‘불면증-디오니소스의 노래’)와 황금빛 텅 빈 링(‘황금의 링-아름다운 지옥’)에 비유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쓰레기나 재활용품에 수공예적인 터치를 가미해 보잘것 없는 재료에도 불구하고 소장하고 싶은 아름다운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영화 에서 전도연이 최후에 매달렸던 아찔한 샹들리에를 떠올려보시라.)2010년 작가는 전시 를 기점으로 사회를 향하던 불온한 시선을 내면으로 가져왔다. 풍부한 내러티브 대신 자기 안으로 침잠해 그가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루이까또즈가 설립한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개관전 에서 선보인 배영환의 근작에서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 8월 7일 막을 내린 이 전시의 인상적인 작품들은 오는 8월 말부터 두 달간 이어지는 PKM 갤러리 개인전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광주·부산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이 잇따라 개막하는 9월, 주요 갤러리에서는 한국을 찾는 세계 미술계 인사들에게 의미심장하게 소개하고 싶은 작가들의 개인전으로 F/W 시즌을 장식한다. 설치미술가 배영환의 최신작을 가장 탁월하게 선보이기 위해 갤러리는 7월부터 휴지기에 들어갔고, 지금 닫힌 문 안에서 작품들은 제자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폐막을 앞둔 어느 오후 배영환 작가와 함께 플랫폼-엘을 찾았다. 동일한 작품들이 어떻게 다른 뉘앙스로 설치될지 상상하고 또 질문하면서 함께 전시를 관람하는 행운을 누렸다.# 눈 가린 새의 침묵4채널 영상으로 이루어진 작품 ‘추상동사-Can You Remember?’가 싱글 채널로 재생되고 그 아래 전시 타이틀 이 적혀 있는 인스톨레이션을 지나면 두 작품이 관객을 맞는다. 먼저 전시장 한쪽에 매달아 놓은 확성기 다발 ‘바벨-I’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이 귀를 잡아끈다. 그 맞은편에는 이 소리를 무시하겠다는 듯 모자로 눈을 가린 커다란 새가 눈금이 촘촘히 표시된 횟대 위에 올라앉아 널브러진 사각의 지구본들을 관조하듯 내려다보고 있다.(‘말, 생각, 뜻’, 2016)새들의 나라’라는 제목 옆에 ‘파구스 아비윰(Pagus Avium)’이란 생경한 단어가 붙어 있다. 무슨 뜻인가?파구스는 라틴어로 영토, 아비윰은 새라는 뜻이다. 뜻글자인 라틴어에는 여러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는데 아비윰은 (불길한) 징후, 파구스는 커뮤니티를 의미하기도 해서 타이틀을 좀 더 풍부한 뉘앙스로 전달해주기에 플랫폼-엘에서 제안했을 때 선뜻 동의했다. 산스크리트어, 라틴어, 한자 이런 고어들은 인간 사고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여러 뉘앙스를 품고 있는 특성은 미술과도 유사하다.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김중업박물관 마당에 공장의 일부였던 돌기둥 24개를 활용한 ‘사라져가는 문자들의 정원(2014)’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 돌기둥에 수메르설형문자, 고대그림문자, 훈민정음같이 현재에는 거의 쓰이지 않아 사라져가는 문자를 새겨놓았다. 몇 세기가 지나면 지구에는 영어와 중국어만 남을 거라는 농담을 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높다. 하나의 언어, 문자가 없어지는 건 하나의 사유 체계가 사라지는 건데 말이다.사운드 설치작품 ‘바벨-I’에서 나오고 있는 말소리는 아예 알아듣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언어다. 여러 나라의 뉴스를 섞었다는 그 소리를 침묵하는 새는 그저 덤덤하게 마주하고 있다. 이미 너무 많은 말이 있는데 내가 무슨 더 말을 보태리오, 하는 것 같다.과잉과 소음의 시대에 말을 잃어버린 앵무새랄까. 작가인 나를 대입시켜보면 미술가로서 이제는 좀 더 ‘미술’을 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다. 모차르트가,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음악이 시작된다고 했는데, 미술도 그렇겠구나,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작품에서 문학을 즐기고 간다. 작품 속 내러티브라든가, 작가의 인생사라든가.... 그런데 이제는 모차르트가 말한 것 같은 미술을 해보자, 그런 마음이 있었다. 작가를 둘러싼 환경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20~30여 년 전에는 사회적인 발언을 위한 출구로서 미술이 용이했다면 지금은 미술 말고도 더 구체적이고 심도 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매체들이 많아졌다. 그렇다면 미술만이 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볼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그런 변화는 전시장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런데 지구본은 왜 네모난 건가?사회학적으로 우리는 지금 사각의 지구에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북한처럼 금지된 땅이 많다. 실제로 그곳에 갈 수 있고 없고를 떠나 생각 자체가 그렇게 한계 지어져 있다. 살아 있고 변화하는 생각이 아닌 고정되고 죽어 있는 생각들. 그럼에도 이렇게 한정된 땅에서 또 다들 예쁘게 살아간다. 그게 사각 지구본으로 묘사하려는 것의 핵심이다. 이 스퀘어를 벗어날 필요를 느끼지도, 생각을 확장할 이유도 없는, 그럼에도 충분히 즐길 만한 삶. 빠삐용이나 다름없는....그럼에도 지구본에 수작업으로 그려 넣은 디테일이 너무 예쁘다.(웃음) 수공작업으로 그린 눈금도 눈에 띄는데, 이전 작품들(‘알바트로스’ ‘상사초’ ‘바보들의 배’)에서도 눈금은 종종 등장했다. 일반인에게 눈금은 편리함의 도구, 정확함의 표식이라면 당신에게는 다른 의미인 것 같다.눈금은 정확한 룰이어야 하고 기준이 돼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을 떠올려보라. 눈금은 우리가 독창적이고자 하는 노력을 제한하는 데에만 사용된다. 눈금은 포지션별로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가장, 교사, 예술가, 며느리, 남자, 여자.... 그들에게 지워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을 정당화시켜주는 게 보이지 않는 자, 눈금이다. 이 눈금이 그려진 자를 횟대 삼아 앉아 있는 앵무새는 틀린 생각들이 상식이 된 세상 속에 있다. 저마다 자기들만의 스퀘어를 딛고서 ‘이게 상식이야!’ 고집하며 살고 있는 세상. 그걸 조금만 깨부수면 타인들과의 대화가 시작되고 더 나은 변화를 꾀해볼 수도 있는데 그걸 안 하는 거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얘기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할 필요를 느낀다. 결국 사회과학이 대한민국 사회를 바꾸지 못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생각을 체크해봐야 하는 게 아닐까?# 본능의 춤둥둥, 심장박동에 조응하는 북소리가 관람객을 유인한다. 어두운 전시실 안에 네 대의 스크린 속에서 검은 깃털의 형체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세포의 분열처럼 꼼지락거리던 형체는 흐릿하게 지워진 마스크를 인식할 즈음 빨라진 박자에 맞춰 탈춤과 힙합을 오가는 춤사위를 펼친다. 검은색에서 오렌지색 깃털 형체의 춤으로 이어지는 4채널 영상작품 ‘추상동사-Can You Remember?’는 조금씩 다른 움직임으로 6분 37초 동안 사방에서 피고 진다.‘추상동사’ 연작은 추상동사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데서 시작됐을 것 같다. ‘댄스 포 고스트 댄스’(2012)에서는 흔들리는 화이트 셔츠가 살풀이 춤을 추고, ‘노크’(2012)에서는 장구를 연주하는 고수가 사라지고 날렵한 장구채의 움직임과 소리만이 남는다.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는 검은 새와 오렌지 새의 강렬한 움직임의 주체가 하얀 마스크로 지워져버렸다.명사는 오늘도 한 2억 개쯤 생기고 그중에서 일부는 살아남고 나머지는 그대로 잊힌다. 정보에 가까운 단어인 명사와 달리 동사는 인간이 생긴 이래 크게 변화가 없을 거다. 인간의 행위라는 게 많이 달라진 게 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사고, 사유란 것도 그렇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ing’인 거고, 육신으로서의 행위가 아닐까? 기존의 추상명사가 정신적인 가치들을 나타내는 용어로 쓰이지만 명사가 지칭하는 개념보다는 동작, 수행 등이 개념의 가치를 얻어낸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작품들이고, 가장 대표적인 추상동사는 춤이라고 생각했다.개인적으로 이번 작품에서 영화 이 생각나기도 하는 음악이 너무 좋다. ‘추상동사’의 연작에는 각각 부제가 붙어 있는 데 ‘Can You Remember?’는 무슨 의미인가?리듬은 시베리아 샤먼의 8비트 북소리와 몽골지방의 대북, 장구의 사운드가 혼합돼 있고, 북소리에 약간 가려지긴 하지만 총소리가 믹싱돼 있다. 그 영화는 아직 못 봤는데 지역을 막론하고 샤미니즘 음악의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들렸을 거다. 앵무새의 두 자아(검은색과 주황색)는 주인의 말을 그대로 잘 따라 했을 때 사랑 받는다. 그 건 애완동물로서 최선을 다한 결과인데 현대인이라고 다를 바 없지 않나? 우리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에 필요한 페르소나를 뒤집어 쓰고 사회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니까. ‘새가 상징하는 자유 같은 메타포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세상인 거다. ‘Can You Remember?’가 네 안의 신성을 기억하냐고 묻는 것이라면 총소리는 자기 본성에 대한 갈구를 사회는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사회가 제시한 틀 밖의 생각을 한다는 건 얼마나 모험적인가?‘댄스 포 고스트 댄스’라는 부제가 붙은 ‘추상동사’ 작품에서는 살풀이 춤을 선보였는데 어떤 연결고리가 있나? ‘고스트 댄스’는 19세기, 청교도인들이 아메리칸 원주민 즉, 인디언을 멸종시키다시피 살해하고 억압할 때 했던 일종의 의식이다. 더 이상 희망이 남지 않은 인디언들은 떼를 지어 환각 약초를 복용하고 몇 주 동안 쉬지 않고 춤을 췄다. 그들은 환각 상태에서 침략 당하기 전의 영토와 조상들을 만났다.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서 백인들이 쏜 총에 맞으면서도 쓰러져 죽기 직전까지 계속해서 고스트 댄스를 춘다. 고스트 댄스에 살풀이 춤을 연결한 건 어느 문화권에서도 죽은 사람을 위한 춤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춘다거나 대중을 위한 춤을 추는 데 바쁘지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한 춤은 없다. 사라진 무엇을 위해서 추는 춤을 연결해보고 싶었다. 네 대의 모니터를 사방에 설치했는데 각각 다른 춤을 담은 영상인 건지 똑같은 춤의 재생 시간을 서로 달리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어느 자리에서 봐야 할지 심히 고민되는데 명당을 알려달라.(웃음) 각각 다른 버전의 춤을 담은 영상을 네 개의 채널로 설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서로의 잔상 같은 건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사람이 그렇다. 우리 의식의 다면체적인 특성을 네 대의 채널로 표현해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대의 스크린 안에서 한쪽 벽에 자리한 채 작품을 본다. 무의식적으로 안전이 확보됐다고 여겨지는 상태에서. 한가운데 서서 끝까지 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봤다. 늑대나 고양이가 낯선 공간에 들어가면 자기를 바라보는 대상의 위치를 계속 확인할 수 있는 동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걸 거다.# 추상동사로 살기 위해서배영환 작가는 2010년 전시 에서 자신의 뇌파를 측정한 그래프와 도자 조각이 산수의 형상과 일치하는 모습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내면에도 예로부터 선함과 완전함의 표상으로 여겨져온 산의 모습과 일치하는 신성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점을 표현했다.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의 ‘누미너스(The Numinous)’ 개념을 차용해 ‘경외를 야기하는 신비’라는 신성의 체험에 ‘오토(Auto)’를 붙여 ‘스스로 성스러운(오토누미나)’이란 없는 단어를 만들어 전시 타이틀로 삼았다.(이쯤 해서 조어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는 배영환 작가가 영화 의 오승욱 감독과 데뷔작 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 인간 내면의 신성을 탐구한 가 ‘배영환 작품 세계의 방향 전환을 예고’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지난 작업들과의 연속과 단절을 시도하며 새로운 차원의 개념적 지평을 모색’했다는 평가다. 그리고 그건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다.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동일하되 표현하는 방식이 많이 달라졌다. 이번 전시를 리셋이라고 볼 수 있을까? 사실상 진짜 리셋은 3채널 영상작품 ‘후쿠시마의 바람’에서 온몸을 던져서 했다. 거기 갈 때 딱 정했다. 무사히 돌아오면 다르게 살리라.(웃음) 일본인 사회학자와 함께 사고 지점의 반경 20km 안에 들어가서 찍었는데 정말 이상한 경험이었다. 거기에선 잡다한 수사들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깨닫게 된다. OX만 남는다.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원자력 할래, 친환경 할래. 사실 어느 날 바뀌는 사람은 없다. 누적된 게 어느 순간 폭발하듯 변화로 나타난다.미술가로서의 작업이 달라졌다면 일상에서도 변화가 있었나? 미술을 시작한 이래로 미술과 나를 분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요새 삶이 분리가 된다. 그동안 어떤 이념에 살았던 건데, 미쳤었던 것 같다.(웃음) 결론은, 인간의 삶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거구나, 하는 단순한 얘기로 귀결된다.예전에는 ‘노숙자 수첩-거리에서’(2001), ‘도서관 프로젝트 내일’(2009) 등의 공공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적극적으로 사회에 시선을 두었다면 이제는 그 시선이 보다 내부로 향하는 것 같다. 세상을 움직이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하나가 근접 원인이고 다른 하나가 궁극 원인이다. 사람도, 사회도 진정으로 바뀌려면 궁극적인 차원에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진정으로 삶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런 궁극적인 고민을 이미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종교고 철학이고 다 그런 요구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근원에 대한 통찰, 그 디테일이 삶일 테니까. 정권도 바뀌고 유행도 변하지만 삶이 여전한 이유는 표층적인 변화만 받아들이기 때문일 거다. 자기 속으로 침잠해 근원적인 성찰을 하는 건 두려워하면서. 그 답을 찾는 일이 요원하겠지만 그래도 내면화의 시도를 해보는 거다.이 작품들이 PKM 갤러리의 천고 높은 공간에서는 어떻게 선보여질지 무척 궁금하다. 폭염 속에 설치가 진행 중일 텐데 어떤 구상을 하고 있나? ‘추상동사’의 경우 여기서는 앞뒤로 볼 수 있는 리어스크린에 했는데 PKM에서는 좀 더 극대화된 효과를 주기 위해 벽 전면에 영상을 쏴서 새의 깃털이 펄럭이는 느낌에 압도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고, 영상 스틸 컷을 가지고 미니멀한 아트북도 만들어볼 생각이다.https://instagram.com/p/BJsYk6Cj2N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