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수 잘 알지도 못하면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탄산수의 다채로운 맛과 향을 찾아 이리저리 유영해본 어느 여름날의 단상. | 레스토랑,음식,탄산수

어린 시절 강박관념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식사 도중엔 가능한 물을 자주 마시지 말라는 것. 의 저자 마이클 마스카 박사를 그때도 알았더라면, 세상의 부모들에게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음식마다 어울리는 물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마이클 박사가 개발한 ‘75%, 25%, 5%’ 규칙에 따르면 생수에 함유된 탄산가스의 유무와 기포의 정도에 따라 음식의 식감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100을 기준으로 75%의 탄산화 정도, 25%의 미네랄 함량, 5%의 pH 지수를 적용하여 음식과 생수의 조화에 관한 가이드를 만들었다. 그 이론을 적용하면 물의 거품은 커질수록, 미네랄 함유량은 무거울수록 음식의 식감이 살아난다. 생수가 알칼리성인지 산성인지에 따라서도 같은 음식을 두고 식감의 차이가 발생한다.탄산수라면 그저 스트레스 해소제로서 스스로를 자학하듯 벌컥벌컥 들이켜는 습관을 가진 내게 그 이론은 2백m 아래에 있는 해양심층수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세상 모든 음식이 짠맛, 신맛, 단맛, 쓴맛, 감칠맛 중 어느 하나에 걸려든다면 무색무취의 물은 그 모든 것을 씻어내는 물질이라 생각했기에. 파인 다이닝에서 물의 중요한 역할은 식사하는 동안 입안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것이다. 최근 파인 다이닝 테이블 위에는 기포처럼 미세할지라도 음식에 미치는 물의 영향을 조금씩 수면 위로 올리는 장면들이 생겨나고 있다. 영국 5성급 더 머천트 호텔(The Merchant Hotel)은 작년에 대대적으로 워터 메뉴를 론칭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하는 물 브랜드를 큐레이션한 것.와인 리스트처럼 이탈리아, 핀란드, 아이슬란드, 피지 등 10개의 나라별로 물의 원산지를 세분화했다. 가격대도 5유로부터 26유로까지 범위가 넓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라도 물의 다채로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우스 와인처럼 물을 글라스 단위로 판매한다.“물이 생산된 지역은 그 물의 맛과 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어요.개개인의 음식과 음료 경험치에 맞춰 사람들에게 물의 선택과 기회의 폭을 넓혀주자는 거죠.” 호텔 제너럴 매니저의 말이다. 국내에서도 탄산수 계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을 찍은 사건이 있었다. ‘탄산수계의 로마네 콩티’로 불리는 샤텔동(Chateldon)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샤텔동은 한 병당(750ml) 2만원에 육박하는 가격으로 프랑스에서도 고급 레스토랑에서만 주로 유통된다. 국내에서는 정식당, 레스쁘아, 팔레 드 고몽 등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판매되고 있다. 루이 14세가 특히 사랑했던 이 물의 레이블엔 태양왕을 상징하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폐하의 진정제이자 치료제’로 여겨져 일종의 만병통치약으로서 왕에게 총애 받았다는 설이 있다. 샤텔동은 과거 베르샤유 궁전에서만 마실 수 있는 하이엔드 럭셔리 그 자체였다. 이 물을 맛본 어느 와인 전문가는 엷은 미소를 띠며 “섬세한 화이트 와인 한잔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뉘앙스”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맛이 복합적이고 밸런스가 뛰어났다는 것. 특히 물의 질감이 독특한데 입안에 두 개의 둥근 막이 형성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 원의 중심부 안으로 미세하고 촘촘한 기포가 끊임없이 샘솟는 느낌이다. 샤텔동 애호가인 어느 소믈리에는 한남동의 ‘더 부즈’에서만 판매되는 샤텔동으로 만든 하이볼을 예찬했다.국내 탄산수 시장이 8백억원대 규모로 성장하며 양적으로 팽창하는 가운데, 백화점 식품관 워터바에도 프리미엄 탄산수 종류가 조금씩 늘어나며 물의 선택권을 넓혀나가고 있다. 탄산수는 인공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탄산수와 미네랄 워터에 인공탄산을 가미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물 값이 높은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연간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다거나 자연환경으로부터 물을 채취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 그만큼의 기술과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빙하수를 추출해서 천연 상태 그대로 병입한 네이키드(Nakd)는 사람의 혈액과 거의 동일한 약알칼리성을 띠고 있어 한때 뉴질랜드 의학계에서도 주목 받은 물이다. 주로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판매되었으나 최근 국내 일부 편의점에서도 판매를 시작했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에서 나온 루리시아(Lurisia)의 탄산수는 리빙 브랜드 구찌니와 협업한 병 디자인이 독특하다. 마치 레몬과 라임을 넣은 듯한 프레시함과 산도가 두드러지는 맛을 지녔다. 루리시아는 퀴리 부인으로부터 직접 물의 순수함과 의료적 효능에 대해 인정받은 일화로도 유명하다. 물 값이 높아질수록 브랜드들은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 물의 성분을 힘주어 말한다. 서랍과 가방 속에 각종 건강보조식품을 쟁여두듯, 탄산수 이면에 담긴 것에 의미를 부여해서 물을 골라 마시는 날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