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게 모라스의 시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촬영장에서 포착한 사진을 포함해 사진가 잉게 모라스의 카메라가 패션 혹은 사교계의 유명인들에게 향했을 때 스타일리시한 겉모습 아래 숨겨져 있던 잊을 수 없는 진실이 드러난다. 저스틴피카디의 새로운 책에 담긴 그녀의 삶과 유산들. | 마릴린 먼로,잉게 모라스,사진가,저스틴 피카디,inge morath

1998년 잉게 모라스는 자신의 75주년 생일을 기념하고자 연 회고 전시회와 관련해 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서 잉게 모라스는 베를린에서 한창 벌어졌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히틀러 유겐트의 가입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의 전쟁 포로들과 함께 비행기 공장에 끌려가 노동력을 착취 당할 때였다. 그 비행기 공장은 연합군 공격의 잦은 표적이 되곤 했고, 그곳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그녀는 계속해서 위험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말했다. “폭탄 속에서 누군가가 저에게 라일락 한 다발을 주었는데 그걸 머리 위로 들고 폭격 맞은 도시를 도망쳤어요.” 이 인상적인 기억이 사진이 아닌 글로 표현되었지만, 이는 모라스의 사진이 지닌 심오한 깊이와 미묘함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대해 논할 때조차 말이다. 위트와 가벼움을 지닌 그녀의 프레임 너머에는 어떠한 어둠이 종종 존재하는데, 그녀가 전쟁 동안 목격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잉게보르그 모라스의 부모는 자유로운 신교도로서 과학연구원이었다. 가족은 전쟁 발발 당시 독일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 이후 그녀가 목격한 공포와 고통은 그녀 삶에 깊고 끈질긴 영향을 주었다. 와의 인터뷰에서(2002년 그녀가 사망하기 4년 전이다) 잉게 모라스는 전쟁 중 독일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생생하게 전달해줬다. “모든 이들이 죽었거나 거의 죽다시피 했어요. 저는 죽은 말들과 죽은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들 옆을 걸어갔죠. 이런 이유 탓인지 전쟁 사진은 찍을 수 없었어요.”전쟁이 끝난 후 잉게 모라스는 탁월한 언어 능력 덕분에 뮌헨과 비엔나에서 통역사와 기자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모국어인 독일어부터 대학에서 공부한 불어, 영어 그리고 루마니아어까지 능숙했다. 이후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그리고 만주어까지 추가하게 된다.) 1949년 그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젊은 사진기자 에른스트 하스(Ernst Haas)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전설의 종군 사진가이자 매그넘 에이전시(1947년에 세워졌다)의 공동 설립자인 로버트 카파의 이목을 끌어 파리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카파의 전기문을 위한 알렉스 커쇼와의 인터뷰에서 잉게 모라스는 파리에 도착한 1949년 7월 프랑스 혁명 기념일에, 생토노레 거리의 매그넘 사무실로 곧장 찾아갔다고 회상했다. 그날 밤 모라스를 저녁식사에 초대한 카파는 그녀에게 스타일리시한 옷들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파티에서 스페인 출신의 쿠튀리에 크리스토벌 발렌시아가를 만나고 난 후 순탄하게 해결되었다.그는 제가 위험한 일들을 하는 사람이라 좋아한 것 같았어요. 제게 카메라와 필름들을 넣을 수 있는 포켓이 여기저기 달린 수트 두 벌을 주었거든요. 무척 우아했죠.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어쨌거나 그 이후 발렌시아가는 오랫동안 제게 옷을 만들어주었어요.”이 이야기에 관해선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 성차별주의(마초 스타일의 종군기자는 용감한 젊은 여성에게 좀 더 여성스러운 자세를 지닌 옷을입으라고 말한다) 혹은 실용적인 필요성(스마트한 수트는 잉게 모라스로하여금 전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하지만 1913년 부다페스트에서 엔드레 프리에드먼으로 태어난 로버트 카파는 부모가 모두 양재사였기 때문에 스타일에 대한 이해는 타고났을 가능성이 크다.한편 놀라운 것은 수줍음 많기로 유명한 발렌시아가가 모라스에게 옷을 만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1959년 파리에서 가까운 라 렌네리(La Reinerie)에 위치한 그의 별장에서 자신의 사진을 찍게 허락했을 정도로 잉게 모라스에게 매료 당했다는 것이다. 파리에 온 지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녀는 유명한 사진가가 되었고 매그넘에서 당당히 인정받고 있었다.(공동 설립자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을 보조하면서 매그넘 에이전시에 작가와 연구원으로 처음 합류했으며 1955년 정식 회원이 되었다.) 멘토인 로버트 카파(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던 중 지뢰를 밟아 1954년 사망했다)와 달리 잉게 모라스는 전쟁 사진을 계속해서 기피했다. 하지만 그녀의 용기와 모험 정신이 부족했던 건 아니었다. 외국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프로젝트, 특히 1950년대 중반 이란 여행에서는 전통 차도르 의상을 입고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잉게 모라스는 익숙한 장소들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1951년 영국으로 건너가 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그곳의 기자이자 에디터였던 라이오넬 버치와 잠시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의 여섯 번째 부인이었다. 그들의 결혼이 오래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했던 라이오넬 버치는 일곱 번째 부인을맞이했다.1950년대 초 런던의 분위기를 담은 그녀의 사진은 궁정에서 열리는 모임의 데뷰탕트(사교계에 첫받을 내딛는 아가씨를 지칭하는 말)들이나 사교 행사로 가득한 시즌의 관례적인 의식같이 지금은 사라진 과거의 흔적들을 잠깐이나마 들여다보게 한다. 잉게 모라스가 찍은 가장 유명한 포트레이트 사진들 중 하나로 존경스러운 이블리 내시(Eveleigh Nash, 에드워디안 시대의 미녀였으며 이후 사교계의 미망인이 되었다) 부인을 꼽을 수 있다. 이는 메이페어의 재단사, 양재사, 칵테일 파티와 무도회 등 그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잉게 모라스의 초창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에디터 마리-루이즈 부스케"/>눈에 띄는 또 다른 이야기는 1945년 말보로 공작부인의 초대로 블렌하임성에서 패션쇼를 연 크리스찬 디올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적십자의 도움도 받았다.) 잉게 모라스는 우리를 무대 뒤의 빳빳한 흰색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들과 블랙 쿠튀르 드레스에 진주를 걸친 디올 모델들에게 데려다준다. 일하는 복장을 한 두 부류의 여성들 모두 우아해 보이는 반면 테이블에 앉아 있는 위대한 디자이너는 편안하고 겸손해 보인다.(친구인 세실 비튼이 관찰하길 “그의 달걀 같은 머리가 양옆으로 흔들릴지는 몰라도 성공을 향해 움직일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라고 했다.) 1957년 디올이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 후 잉게 모라스는 그의 재능 있는 젊은 조수인 이브 생 로랑의 데뷔를 기록하게 된다. 그는 21세의 나이로 총괄 디자이너에 임명되었다. 잉게 모라스가 찍은 생 로랑의 포트레이트는 의 부탁으로 진행되었으며 그의 첫 디올 컬렉션을 선보이기 하루 전날 촬영되었다. 그는 수줍은 학구파 학생처럼 셔츠와 타이 차림을 하고 있으며 자기 앞에 주어진 임무에 열중하는 듯 보였다.내 짐작으로 잉게 모라스가 처음으로 와 연락을 하게 된 것은 영향력 있는 파리의 에디터 마리 루이즈 부스케(코코 샤넬의 오랜 친구이자 디올의 초창기 옹호자로 사진가 세실 비튼은 그녀를 ‘패션계의 재능 있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 표현했다)를 통해서인 것 같다. 1955년 잉게 모라스는 마리 루이즈 부스케를 생동감 있게 사진에 담았는데 한 손에는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담배를 들고, 다른 한 손은 펼쳐진 한 권을 향해 손짓하고 있다. 그녀의 손은 이듬해 발렌시아가의 동료인 라몽 에스파르자가 그녀의 손금을 읽어주면서 다시 등장한다. 그녀의 모습은 옆에 놓인 크리스털 공을 통해서만 비스듬하게 반사되어 비춰졌다. 이는 아마도 패션이 과거를 회상하면서도 미래를 지속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틸 컷"/> 스틸 컷"/> 스틸 컷"/>이때는 잉게 모라스가 처음으로 존 휴스턴 감독과 함께 작업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초기 작품 중 하나는 1952년 런던에서 촬영한 그의 영화 의 스틸 컷을 촬영한 것이다. 여기서 이들의 평생 우정이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에 위치한 휴스턴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날 춤을 추는 그의 멋진 연속 사진을 담을 수 있었다고 거의 확신하는데, 이 중 하나가 그녀가 시크한 발렌시아가 드레스를 입고 그와 함께 춤을 추는 사진이다. 휴스턴은 이후 그녀를 ‘사진의 교주’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녀에겐 피사체가 지닌 매력을 들춰내고 표면을 파고드는 희귀한 능력이 있어요.” 하지만 그녀의 카메라는 숨겨진 진실을 단순히 들춰내는 도구가 아니다. 잘 포장된 겉모습과 그 안에 내재된 것, 어둠과 빛, 자유와 억압, 관습과 반란의 관계를 탐험하는 미묘한 사진이다.(이 모든 것들이 1954년 파리에서 진행된 ‘미녀와 야수’라는 패션 콘테스트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에서 드러난다. 쿠튀르를 입은 모델들과 함께 많은 개들과 다른 동물들을 담았는데 몇몇은 순종적이지 못한 모습이다.) 잉게 모라스와 존 휴스턴의 우정은 그녀의 직업은 물론 사적인 인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7년 그녀는 휴스턴의 영화 를 촬영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멕시코로 여행을 떠났다. 버트 랜캐스터, 오드리 헵번 그리고 영화배우로 전향한, 너무나도 잘 알려진 미국의 전쟁 영웅 오디 머피가 주연이었다. 그녀의 용감함은 머피가 휴스턴과 오리 사냥을 탐험하기 위해 올라탔던 배에서 떨어졌을 때 발동했다. 자신의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모습을 목격한 후 정신을 잃고 익사의 위험에 빠진 그를 위해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고 자신의 브라 끈을 이용해 간신히 구출했다. 촬영장에서 만난 마릴린 먼로"/> 촬영장에서 마릴린 먼로"/> 촬영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러"/>이듬해 잉게 모라스는 존 휴스턴의 또 다른 영화 의 촬영장에 매그넘 동료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함께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 될 남자인 아서 밀러를 처음으로 만난 곳이 여기 네바다 사막이었다. 아서 밀러는 당시 부인이었던 마릴린 먼로를 위해 각본을 썼다. 상대역은 클라크 게이블이였는데 두 배우 모두에게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촬영이 끝나고 이틀 뒤 클라크 게이블은 심장 마비로 고통 받다 이후 2주 만에 사망했으며 마릴린 먼로도 1962년 세상을 떠났다. 이는 영화가 개봉한 지 일 년 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아서 밀러는 마릴린 먼로와의 결혼생활에서 이미 심각한 중압감에 시달렸으며 촬영장에서도 역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그녀는 약물과 알코올에 의존했으며 종종 지각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제작기간 동안 2주간 입원하기도 했다. 그 이후 휴스턴은 인터뷰에서 “그녀가 끝났다고 확신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6년 아서 밀러는 한 에세이를 통해 잉게 모라스가 찍은 마릴린 먼로의 포트레이트에 대해 말한다. “부드럽고 아름답다.” 이 사진들 속에는 일말의 착취나 공격적인 호색이 담겨 있지 않다. 대신 피사체를 존경하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잉게는 비교적 적은 분량의 사진을 찍었어요.” 그는 회상한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었을 때 자신이 포착하고 있는 무언가에 관해 어떤 책임감을 느꼈어요. 그녀가 찍은 마릴린의 사진들은 유명세 아래 숨겨진 괴로움과 상처는 물론 인생의 기쁨까지 포착한 듯 무척 감동스럽죠.” 가 나중에 잉게 모라스에게 마릴린 먼로의 사진을 찍은 경험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는 일종의 ‘희미한 불빛’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슬픔이 가려져 있어요.불행한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죠. 기쁨과 화려함 뒤에 항상 불행이 존재하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그런 아름다운 존재였어요.” 같은 인터뷰에서 잉게 모라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한 번은 마릴린과 제가 함께 춤추는 꿈을 꿨어요.무척 아름다웠죠.”마릴린 먼로와 이혼한 후 아서 밀러는 뉴욕에서 잉게 모라스를 다시 만났다. 1962년 2월 그들은 결혼식을 올렸고 첫 아이인 레베카가 같은 해 9월에 태어났다. 그 후 1967년 아들 다니엘을 낳았다. 잉게 모라스는 남편과 가깝게 일했으며 극찬을 받은 책 시리즈를 함께 작업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났다.(사진가로서의 재능만큼 능숙한 외국어 실력이 무척 유용했다.) 또한 유명한 작가, 기자, 연기자, 아티스트부터 가족과 친구들의 포트레이트를 포함한 개인 프로젝트도 틈틈이 작업했다.그녀는 반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과 함께 시를 창조해냈어요.”그녀가 사망했을 때 그녀의 남편은 말했다. 그리고 그 시는 사진이 창조되었을 때처럼 오늘날에도 통찰력과 미묘함, 그리고 황홀함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이상한 현상이에요.” 모라스 스스로가 관찰했다. “스스로의 눈을 믿고 자신의 영혼을 드러낼 수밖에 없어요.” 잉게 모라스의 영혼은 여전히 그녀의 눈부신 이미지의 중심에 있는 듯하며 그녀의 믿음은 기적적으로 무너지지 않은 채 남았다. 어둠이 닥칠 때조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