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아의 맛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서울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작은 사치의 결정체, 캐비아의 어제와 오늘. | 레스토랑,캐비아,맛집

알이 터진다. 녹진한 액이 녹아내린다. 짭짤하고 진하다. 바다를 절여놓은 맛이랄까? 농밀한 생선 한 마리를 마이크로 단위로 줄여놓은 맛에 가깝겠다. 캐비아 맛에 대한 단상이다. 이 작은 낱알은 원래 철갑상어가 품고 있던 것이다. 고대 시인 오비디우스는 말했다. “철갑상어, 가장 눈부신 물결을 타는 순례자.” 세상엔 21종류의 철갑상어가 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벨루가, 오세트라, 세브루가다. 이름부터 호화롭다. 혹자는 캐비아 생산 과정을 돔페리뇽이나 페트뤼스처럼 프랑스 고급 와인 양조 과정에 비유한다. 포도처럼 좋은 알을 선별하고 어떤 숙성 과정을 거치는지에 따라 그 맛과 향, 텍스처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희소성의 가치에 의해 캐비아는 언제나 황제의 ‘미식 수첩’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귀하고 비싸다. 검은 알갱이가 왕의 식탁에 오르는 순간 팡파르까지 울려댔다고 하니,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과거 러시아에선 전쟁이 발발하면 도망갈 때 캐비아부터 챙겼다는 일화가 있다. 캐비아에 대한 흥미로운 야화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한때 잡지를 만들다 쫄딱 망했다. 빚과 가난에 시달리며 소설을 썼다. 모두 그때 쓴 작품. 당시 그의 놀라운 집중력과 원동력은 캐비아와 섹스였다는 설이 있다. 의 한 챕터를 완성할 때마다 그의 아내는 그 두 가지로 남편을 북돋았다. 당시 캐비아는 오늘날의 비아그라나 다름없었던 것.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개 발에 편자’ 격의 의미로 에 이런 문장을 썼다. “Caviar to the general.”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을 캐비아에 빗대어 비꼬았다. 속인은 알 길 없는 캐비아의 맛. 그런데 최근 서울 미식 판도에 캐비아의 허물이 벗겨지는 태동이 감지되고 있다. 더 이상 그들만의 캐비아가 아닌 것이다. 작년 가을 JW 메리어트 동대문 스퀘어 서울의 ‘더 라운지’가 캐비아 부티크를 론칭했다. 셰프가 이탈리아 현지에서 직접 수입한 4가지 캐비아로 요리를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캐비아에 열광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스테파노 디 살보 셰프의 포부가 단단하다. 특히 셰프가 소개하는 캐비아 가운데 다빈치(Da Vinci)는 이탈리아 철갑상어 품종으로 아드리아 해에 서식한다. 호텔에선 다빈치를 육회 스타일의 소고기 타르타르, 통보리 링귀네, 바닷가재와 함께 곁들여 낸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먹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모든 재료의 특성을 배가시키는 방법이다.” 파로(Farro, 통보리의 일종) 링귀네와 시칠리아 유기농 올리브 오일, 데친 바닷가재 찹으로 만든 파스타 위에 신선한 다빈치를 올린 ‘캐비아 파스타’는 스테파노 셰프의 시그너처 메뉴다. 가을 시즌 메뉴로 캐비아와 사프란 아이스크림이라는 색다른 조합을 구상 중이다.사실 캐비아는 어떤 방식으로 즐겨도 맛이 없을 수 없는 재료다. 캐비아와 안 어울리는 재료가 별로 없다. “캐비아 그 자체가 염장되어 짠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알의 농밀함을 표현할 수 있는 서브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면 대부분 잘 어울린다. 잘게 다진 양파와 감자전과 함께 먹는 것이 가장 클래식한 방법이다.” 스와니예 이준 셰프의 캐비아 사용법이다.캐비아와 좋은 궁합을 이루는 재료로 블리니(Blini) 역시 클래식한 조합이다. 블리니는 뜨거운 팬 위에 얇고 평평하게 구운 팬케이크의 일종이다. 한남동에 생긴 캐비아 전문 레스토랑 코로비아에서 지극히 클래식한 조합을 즐길 수 있다. 이곳은 입구에서부터 캐비아를 모티프로 한 박선기 작가의 설치작품으로 레스토랑의 정체성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러시아어로 왕을 뜻하는 ‘코로’와 ‘캐비아’가 결합된 그 이름처럼 메뉴 곳곳에 캐비아가 재미있는 요소로 사용된다. 여러 가지 식감으로 변주를 주기 위해 파프리카, 참외, 멜론, 저온으로 익힌 한치, 훈제한 연어 등 갖가지 재료를 블리니, 캐비아와 함께 즐기도록 세트 메뉴를 구성했다. 레시피를 구상한 안경석 셰프는 “캐비아를 요리 곳곳에 이유 있게 넣고 싶었다”고 했다. 안 셰프는 모차렐라 치즈로 바삭한 칩, 부드러운 거품, 크림 등 5가지 버전의 다른 식감을 만들어 그 위에 캐비아를 얹어 먹는 방식과 참치, 리코타 치즈, 캐비아로 속을 채운 라비올리를 개발했다. 짠맛의 캐비아를 일종의 소금처럼 맛의 포인트로 사용한다. 캐비아와 샴페인은 불변의 공식이지만 그는 보드카를 권했다. “캐비아는 보드카랑 먹으면 훨씬 맛있다. 강렬한 두 가지 맛이 입안에 오래도록 맴돈다”고 추천했다.해외에는 캐비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레스토랑 체인이 이미 여럿 있다. 그 가운데 뉴욕과 마이애미에 지점이 있는 캐비아 뤼스(Caviar Russe)는 주류 리스트 가운데 보드카만 무려 20종이 넘는다. 이런 체인 레스토랑은 대부분 직접 캐비아를 수입하고 생산에도 관여하는 모기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내에도 지난 7월 캐비아를 직접 수입하는 레스토랑 쌩 메종이 롯데타워 에비뉴엘에 들어섰다. 쌩 메종은 캐비아, 트러플, 푸아그라, 세계 3대 진미를 코스 요리 곳곳에 녹여냈다. 유럽 수산물 박람회를 통해 고급 식재료에 대한 수요를 한 발짝 먼저 내다보고 벨기에 브랜드인 로열 벨지언 캐비아를 직수입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유난히 좋아했고 지금도 영국 왕실에 제공되고 있는 브랜드다. 3백 유로의 코스 메뉴를 주문하면 오세트라 캐비아를 원하는 만큼 즐길 수 있다. 작은 자개 스푼(캐비아의 산화를 막기 위해 철제나 은보다는 유리, 자개, 나무 재질의 커틀러리를 사용하는 게 이상적이다.)으로 캐비아를 떠서 블리스 위에 달걀, 쪽파, 적양파, 사워크림을 올려 클래식한 타입으로 서브한다. 열쇠로 문을 열 듯 반짝거리는 전용 키로 캐비아 케이스를 오픈하는 장면은 스몰 럭셔리 그 자체다. 값비싼 캐비아를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한때 미식가들 사이에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쌩 메종은 스시 오마카세도 함께 운영하는데, 광어나 도미 같은 흰살생선 위에도 캐비아를 올려준다. 얼마 전 메뉴를 새롭게 리뉴얼한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의 양식당 나인스 게이트 그릴 역시 금가루가 뿌려진 참돔 카르파치오 위에 성게알과 함께 캐비아를 올린 애피타이저를 선보였다. 높은 문턱처럼 느껴지던 궁극의 식재료, 캐비아로 연출하는 서울의 미식 신은 이토록 다채로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