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사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만약은 없다>는 하루에도 수차례의 죽음을 경험하는 응급의학과 의사가 필사적으로 기록한 생과 사의 순간들이다. 책 속에서, 죽음 안을 뛰어다니던 저자 남궁인을 만났다. 1시간 11분 분량의 녹취록이 온통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찬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 책,만약은없다,남궁인

응급의학과 의사 남궁인이 쓴 를 펼쳤다. 신체 부위 어딘가를 뻐근하게 조여오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응급실이라는 공간은 3백65일 내내 극단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불행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택배 상자가 도착하듯이’ 연이어 배달된다. 그곳에는 피칠갑을 한 채 실려 오는 환자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오열하는 보호자와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의사가 있다. 누군가는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누군가는 죽여달라고 중얼거린다. 심폐소생술이 이어진다. 누군가의 심장은 다시 작동하고, 누군가의 심장은 영원히 정지한다.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를 읽는 경험은 이 모든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응급실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필력 좋은 저자가 필사적으로 써내려간 현장감 넘치는 글은 어떤 스릴러 소설보다 긴박하게 읽히지만 책장을 가벼이 넘기긴 어렵다. 그 안에서 펄떡이고 있는 고통과 불행, 죽음의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자살을 시도해 실려 왔다가 다시 잘 살아보겠다고 거듭 다짐한 후 퇴원한 남자는 두 시간 만에 목숨을 끊고 시신이 되어 병원으로 돌아온다. 시한부를 선고 받고 단 하루의 자유를 누리러 병원 밖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다른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람도 있다.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에는 무려 3백여 명의 환자와 3백여 개의 불행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책 속에서 남궁인은 응급실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복판은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일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공간. 이곳에 서 있을 때마다 나는 이들에게 벌어진 일들과, 이 공간과 이곳에 서 있는 나까지 통째로 비벼 없애버리는 상상을 한다.”남궁인은 메디컬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그럴싸한 장면 대신 이 모든 비극의 본질, 죽음의 세계로 곧장 뛰어든다. 의사와 철학자야말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철학자가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세계를 사유하며 삶의 이유를 찾는다면 의사는 죽음에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과학자다. 그들은 매일같이 출근하는 일터에서 실질적인 형태의 죽음과 마주친다.이 책은 크게 죽음의 파트와 삶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남궁인은 메디컬 드라마에 나올 법한 그럴싸한 장면 대신 이 모든 비극의 본질, 죽음의 세계로 곧장 뛰어든다. 의사와 철학자야말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직업이 아닐까 싶다. 철학자가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추상적인 세계를 사유하며 삶의 이유를 찾는다면 의사는 죽음에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과학자다. 그들은 매일같이 출근하는 일터에서 실질적인 형태의 죽음과 마주친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이게 직업이거든요. 출근하면 매일같이 볼 수 있는 풍경인 거죠. 전국에 응급학과 전문의는 1천 명 남짓밖에 없어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일상을 일기처럼 적은 글을 웹상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글에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에 제가 오히려 놀랐어요. 기록이라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누군가가 기록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했던 세계가 사라지는 거니까. 그래서 기왕 이야기를 할 거면 문학적으로 치밀하게 접근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남궁인 작가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몰린 사람들이 차고 넘쳐 그들은 매일 나를 찾아왔다. 그 수는 너무 많아 일일이 공감하기엔 벅찼다. 그것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어, 그곳의 분위기를 무감하고 무정하게 만들었다. 슬픔은 그 대상이 하나일 때가 가장 슬프고, 정신적인 공황 또한 원인이 한 가지일 때가 가장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많은 죽음과 슬픔은 때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 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일에 빠르게 적응한다. 죽음을 마주하는 충격을 직업적인 사명감으로 몇 번 견뎌내고 나면, 어느 순간 웬만한 죽음에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중략) 인간의 일이란 자기가 다루고자 하는 대상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이루어지니까.” 누구에게나 직업적인 딜레마는 있다. 의사에게는 의학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과 죽음을 지켜보는 일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을 끊어내야 하는 딜레마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오는 의사의 죄책감과 인간적인 고뇌는 의 곳곳에서 진하게 배어 나온다. 그러나 남궁인 작가의 경우, 그 딜레마가 글을 쓰는 추동력이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죽음 앞에서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환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개인을 바라보기 위해 글을 쓴다.의 책장을 덮을 무렵 알게 되는 게 있다. 작가 남궁인의 표현대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서로 곤죽이 되어 마구 엉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삶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말한다.시인 김경주는 에 대해 ‘의사 남궁인이 자신의 체액을 흘려 써내려간 글’이라고 표현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책이 대형서점 에세이 분야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요즘, 남궁인 작가가 축하 인사와 함께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괜찮냐”는 말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의 문체는 필사적이다. 의사로서의 그는 이성적이고 단호하지만 작가로서의 그는 감정적이며 절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가 글에서 의사의 일을 상징하는 도구로 ‘메스’에 대한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서, 작가의 도구는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빛나는 문장’이라고 답했다. “옛날에는 시를 주로 읽었고, 요새는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에요. 가끔 어떤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어떤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을 허무는 글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글들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떤 예술작품보다 글이 전달하는 감흥이 대단하다고 믿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텍스트의 절박함과, 나아가 작가에게서 느껴지는 절박함으로 인해서 작가의 안위까지 걱정하게 되는 글을 읽으며 언젠가 내가 글을 쓴다면, 책을 낸다면 그런 식의 글쓰기를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리고 책이 나오고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고 있는 지금, 이제는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아요. 제 글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있지만 기본적으로 허구의 일이 아닌, 사실에 기반하고 있잖아요. 왜 적지 않으면 잊힐 수 있는 일을 세상에 가지고 나와야 했는지,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은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듯해요.”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죽음에 관하여’와 ‘삶에 관하여’로 나뉜다. 비참하고 참혹하며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날것의 죽음들을 어떻게든 통과해야 삶의 파트를 읽을 수 있는 구성이다. 왜 읽기 힘든 죽음의 파트를 책의 앞부분에 배치했는지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맨 처음에 응급실에 가서 느꼈던 것은 당연히 희극보다 비극이었거든요. 저는 죽음을 빠져나와야 삶이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죽음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과연 사는 데 도움이 될까? “사는 데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죽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는 건, 그냥 사는 거죠. 예전에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어요.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몇 백억 명의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 사람들은 너무 완벽하게 잘 죽었죠. 그래서 다시 이 세상에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런 걸 생각해 보면 나도 그들 중 하나처럼 잘 죽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의 삶의 파트에 도달하면 어깨에 힘을 풀고 긴장을 조금 내려놓을 수도 있다. 비극 바로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희극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의 책장을 덮을 무렵 알게 되는 게 있다. 작가 남궁인의 표현대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서로 곤죽이 되어 마구 엉켜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모든 삶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