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이라는 시공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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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이라는 시공간

“끊임없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 동물원의 시간은 늘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하다. 손오공도 암사자도 자신의 땅을 개발해서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꿈 따위는 갖고 있지 않을 테니. 바로 이 때문에 동물원은 자라나 H&M 매장이 들어선 도심보다 그 도시의 역사적 성격을 더 잘 보존해낸다.” - <동물원 기행> 중에서

BAZAAR BY BAZAAR 201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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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의 동물원 순례에 마음을 빼앗겨본 적이 있는가? 북적대는 도심의 인파에서 벗어나 한나절의 느긋한 산책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세계, 동물원이 없다면 아마 도시에 사는 우리는 한평생 사자나 호랑이, 기린을 한 마리도 실제로 볼 수 없으리라.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을 동물원에서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번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례도 많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뛰어놀든 잡아먹히든, 자연의 질서 그대로 살 수 있던 동물은 좁은 우리를 집으로 제공 받는다. 그리고 인간의 구경하는 시선 아래 놓인다. 대만의 소설가 나디아 허는 <동물원 기행>을 통해 현대 도시에서 손이 닿을 거리에 존재하는 동물원의 존재론을 말한다. 싱가포르 여행자에게 필수 코스로 꼽히는 나이트 사파리 이야기는 <동물원 기행>에서 빠질 수 없는 만찬이다. 우림을 지키고 있는 이들 중에는 동물원 직원들도 있다. 그들은 어둠 속에 서 있다가 방문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경우 길을 알려준 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트램을 타고 본격적인 야간 사파리가 진행되는데, 지정된 장소에 트램이 멈추면 불빛이 꺼진다. 이제 다들 어둠 속에 펼쳐지는 자연 풍광에 취할 차례다. 하늘에서는 별이 쏟아질 듯하다. 글을 읽는 것만으로 유혹적이라 느낀다면, 기대하시라. 나디아 허가 글로 표현한 열대의 밤에 경험하는 사파리 체험은 실제 경험 쪽이 압도적으로 근사하니까.

<동물원 기행>에서  동물에 대한 애호는 한 인물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떤 팬은 패티 스미스의 섹시함이 절대 성적 매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코뿔소가 딱 이렇지 않나? 분명 뿔이 하나뿐인 동물인데도, 적어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니콘 가문의 유일한 종친인데도 코뿔소는 절대 유니콘의 이미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코뿔소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이 대목은 몽펠리에 동물원에 대한 글에서 만날 수 있다. 코뿔소의 매력을 상찬하던 나디아 허는 곧 지구상에서 5천5백만 년을 살아온 이 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로마의 한 동물원에서 새로 들어온 노루가 뿔이 하나 달린 새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한다. 뿔이 하나 모자란 사슴류 동물. 이것은 선천적 장애에서 기인하지만 동물원 측은 ‘유니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생명을 존중하려는 노력과 밀렵꾼의 집요한 사냥 사이에, 위기에 처한 동물들이 있다.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필요한 것은 동물의 생존을 위해 인간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물원의 우리 밖에서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어쩌면 우리 다음 대에는 코뿔소를 동물원은 물론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많은 이들이 페이스북에 로그인해 아름답게 보정된 여성의 사진을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하며 스쳐 지나간다. 나디아 허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대량복제된 섹시함 속에서 당신은 패티 스미스 같은 여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할지 모른다. 아니면 오늘 지구상에서 또 몇 마리의 코뿔소가 풀을 뜯다가 죽어갈지를 생각할지도 모르고.”

만약 이국의 동물원에 가볼 기회가 닿는다면 티어파크 베를린을 택해도 좋다.  소련 점령 시기에 세워졌고, 유럽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시내 동물원이다. 도시라는 감각을 잊게 만드는 티어파크 베를린에서는 인간이 동물의 구경꾼이 되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어느 쪽이 울타리에 갇혀 살고 있는가? 자유를 빼앗긴 것은 동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동물원 기행>의 흥미로운 기착지 중 하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나디아 허는 헤밍웨이를 좋아하는 듯하다. 이 책 곳곳에서 동물원에 대해 생각하는 척하면서 헤밍웨이의 삶을 불러들인다. 파리 다클리마타시옹 공원에서 나디아 허가 떠올리는 것은 ‘피의 스포츠’다. 중세 유럽에서는 숲에서 잡은 여우를 집에서 키우다가 사냥날에 잠시 풀어주었다가 다시 잡아들였다. 1960년대 미국 서해안 도시에서는 문어 레슬링이 유행했는데, 대형 문어를 얕은 물에서 육지까지 끌고 가는 게임이었다. 그녀의 생각은 동물 격투기로, 그리고 투우로 향하고, 스페인 최고의 투우사 중 한 사람이었던 후안 벨몬테, 그리고 그와 친구였던 헤밍웨이의 이야기로 끝맺는다. “총상에 골절까지 온갖 부상을 입었던 그(헤밍웨이)는 피가 흐르는 상처에 너무나 익숙했다.” 투우를 소재로 <오후의 죽음>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어쨌거나 헤밍웨이에 대한 언급은 이후 중국 장춘동식물공원에서, 하얼빈 북방삼림동물원에서도 이어진다. 헤밍웨이가 그곳에 간 적은 없겠지만 우리는 동물과 인간에 대해, 자연의 질서와 잔혹함에 대해서 말하는 헤밍웨이의 문장들을 알고 있다.

만약 이국의 동물원에 가볼 기회가 닿는다면 티어파크 베를린을 택해도 좋다. 이 책에서는 동독에 있던 티어파크 베를린을 소개한다. 소련 점령 시기에 세워졌고, 유럽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시내 동물원이다. “담장과 울타리 등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설비들이 이미 구시대의 상징이 되어버린 20세기 중엽에 기초 설계가 이루어진 덕분에 이 동물원의 동물들은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무언가를 누리고 있다. 바로 공간이다.” 베를린의 구 동독 지역이 보여주는 거대한 건물, 거대한 공장의 스펙터클이 동물원에서도 통용되는 셈이다. 이곳의 명소랄 수 있는 스팟은 바로 공원 중앙에 있는 낙타 초원이다. 낙타 초원 옆 물가에는 홍학들이 함께 살고 있다. 어딜 보아도 공간을 넓게, (한국에 사는 사람 눈에는) 너무하다 싶게 넓게 쓴 게 인상적이다. 내가 그곳을 찾았던 여름날 베를린의 날씨는 유럽 어느 지역보다 서늘하고 청명했다. 도시라는 감각을 잊게 만드는 티어파크 베를린에서는 인간이 동물의 구경꾼이 되는 기분을 맛보게 된다. 어느 쪽이 울타리에 갇혀 살고 있는가? 자유를 빼앗긴 것은 동물인가, 아니면 나 자신인가?

이 책을 읽다 보니 서울대공원이 생각났다. 어른이 되어, 소풍철을 피해 찾은 그곳에는 어딘가에서 멈춰버린 시간이 있었고, 과거의 내가 있었다. 더이상 위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철창, 신기하다기보다 가엾어 보이는 지친 동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렘이 가라앉지 않던 오후의 산책. 우리는 모두 한때 동물원의 아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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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김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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