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할 수 있는 일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샌프란시스코의 컬렉터들은 유행에 따르기보다는 평생 동안 옆에 두고 볼 수 있는 예술품을 소장한다. 그리고 미술관은 컬렉터들과 예술가의 작품 활동에 대한 책임감을 공유한다. 새롭게 단장한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을 걷다 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로 예술을 진보시키는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

21세기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지만,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Bay Area)의 실리콘 밸리는 현재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구글, 야후, 애플, 인텔, HP, 오라클, 아도비 등의 거대 IT 기업과 수많은 스타트업 회사로 인해 세계 자본이 모여들고, 모두의 관심과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도시는 예술의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려 한다.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적인 뮤지엄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SFMOMA)이 3년간의 리뉴얼을 끝내고 올해 마침내 재개장했다.샌프란시스코는 언제나 부유한 도시였다. 터무니없이 비싼 부동산 비용과 공간 부족으로 인해 예술가 커뮤니티나 소규모 갤러리 신이 조성되기 어려운 지역이기도 하다. 이 도시의 예술을 움직이는 것은 예술에 대한 애정과 부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컬렉터와 후원자들이다. 샌프란시스코에는 부호들이 예술에 후원과 지지를 보내온 오랜 역사가 있다. SFMOMA가 재개장하기까지, 2백40명이 넘는 수집가들이 6백10만 달러에 육박하는 돈을 후원했고 4천여 점의 작품을 기증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갭(Gap)의 창업자인 도리스와 도널드 피셔(Doris and Donald Fisher) 부부의 방대한 컬렉션이 있다. 이제 SFMOMA에 가면 1백85명 아티스트들의 1천1백여 개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피셔 컬렉션’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컬렉션은 SFMOMA를 증축하는 계기가 됐다.1996년 건축계의 거장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했던 SFMOMA는 자연과 맞닿은 설계로 유명한 노르웨이 건축회사 스노헤타(Snøhetta)에 의해 새단장되었다. 1층에 들어서면 기존 로비이자 멤버십 라운지였던 자리가 보다 넓은 라운지로 변했고,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베누의 오너 셰프이자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한국계 스타 셰프, 코리 리(Corey Lee)의 새로운 레스토랑 인 시추(In Situ)가 들어섰다. 프렌치 런더리의 토마스 켈러, 셰 파니스의 앨리스 워터스,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 등 전 세계 80명 셰프들이 아이디어를 낸 메뉴 구성으로 주목 받고 있는 레스토랑이다. 그리고 칼더의 거대한 화이트 모빌을 바라보며 계단을 올라가면 새로운 SFMOMA가 시작된다. 멤버십 부스 위로는 새파란 수영장이 넘실거리는 듯한, 미니멀 아트 작가 솔 르윗(Sol Le Witt)의 작품이 1층과 2층 사이를 뒤덮고 있다. 피셔 부부의 컬렉션에서 솔 르윗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SFMOMA에서는 솔 르윗의 초기 작품부터 시작해서 ‘형태’가 아닌 ‘디렉션’으로 변화하는 후기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다. 피셔 부부는 솔 르윗에게 몇 가지 커미션 작품도 의뢰했는데, 거대한 파란 물결의 작품 ‘Wall Drawing 895: Loopy Doopy’도 그중 하나다. SFMOMA에서 펼쳐지는 피셔 컬렉션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인 셈이다. 피셔 부부는 갭 사옥에 놓을 작품을 사기 시작하면서부터 컬렉터의 길을 걸었다. 둘 다 동의하는 작품만을 구입하기로 룰을 정한 부부는 큐레이터나 에이전시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두 사람의 취향과 예술에 대한 관심에 의거해 작품을 모았다. 세계에서 개인의 소장 컬렉션으로는 최대 규모인 피셔 컬렉션은 SFMOMA 세 개의 층에 집중되어 있다. 3층부터 6층까지 연이어지는 어마어마한 양의 현대미술 거장의 작품들에 계속해서 놀라게 된다.아늑하면서도 세련된 카페 사이트글래스의 박력 있는 스팀 소리를 지나쳐 3층에 마련된 방에 들어서면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전시 이 시작된다. 피셔 부부는 칼더의 작품을 40여 점 소장하고 있었다. 칼더의 초기 작품인 ‘Aquarium’부터 모빌이 아닌 스틸 조각 작품까지. 발코니로 연결되는 문을 열고 나가면 칼더 및 다른 작가들의 조각 작품이 있는 작은 정원이 나온다. 정원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멋진 월 가든의 녹색으로 눈을 적신 뒤 4층으로 올라가면 이라는 주제전이 열리고 있다. 피셔 컬렉션 중 추상작품들 위주로 전시되어 있는 이곳에는 오묘한 색이 조화를 이루는 조안 미첼(Joan Mitchell)의 작품부터 리처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 사이 톰블리(Cy Twombly), 브라이슨 마든(Brice Marden), 리 크래스너(Lee Krasner),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등 미국 컨템퍼러리 추상의 대표 작가 작품이 다량 전시되어 있다.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의 작품이 특히 많아, 켈리에 대한 피셔 부부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전시 전경 "/> 5층에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피셔 부부의 컨템퍼러리 아트 컬렉션의 수준을 체감할 수 있는 전시장이기도 하다. 입구부터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대작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피셔 부부가 처음 예술작품을 모으기 시작할 때 구입한 기록적인 작품이다. 피셔 컬렉션에는 미니멀아트와 팝아트도 많다. 1970년에서 1990년 사이에 부흥한 미국 팝아트, 미니멀아트 작품들이 같은 시기에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은 미국의 의류 기업 갭 사옥에 전시되어 있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이 외에도 척 클로스(Chuck Close), 앤디 워홀(Andy Warhol), 필립 구스통(Philip Guston), 칼 안드레(Carl Andre), 솔 르윗 등의 대작들이 5층 전시장에 모여 있다.6층 전시장에는 1960년대 이후 성장한 독일 작가들의 작품들이 있다. 독일을 대표하는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 베허 부부(Bernd and Hilla Becher),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등의 작품들이 독일 아트의 저력을 보여준다. 5층 한쪽으로는 SFMOMA를 상징하는 천장의 동그란 채광창 밑을 지나는 하얀색 브리지를 건널 수 있는데, 채광창 밑에서 기념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이 가득하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맞은편 계단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창이 있다. 창가에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들을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면 그조차 전시같이 느껴지며 묘한 기분이 든다. 출구로 나가면 상설 전시되어 있는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거대 조형물 ‘Sequence’를 만나게 된다. 겉에서 보기에는 고급 디저트 위에 올려져 있는 초콜릿 장식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조형물 안으로 들어가면 어쩐지 도시의 절벽 속에 갇힌 듯한, 신비로운 기분이 든다. 이 시퀀스를 마지막으로 재개관한 SFMOMA를 나오는 길, 뒤를 돌아보니 안개에 갇힌 샌프란시스코처럼 회색 물결로 이루어진 미술관 외관이 보인다. 오랫동안 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진보 시키고 있는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한 건축물이다.INTERVIEWSFMOMA의 리뉴얼을 맡은 스노헤타의 건축가, 존 맥닐(JonMcNeal)과 짧지만 핵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SFMOMA의 메인 컨셉트는 무엇이었나? 원래의 공간과 확장된 공간, 두 건물이 댄스 파트너처럼 다르게 움직이면서도 결국 하나가 되는 모습을 구현하려고 했다. ‘뮤지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사람들을 위한 곳에 예술품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예술품을 위한 곳에 사람들이 있는 것인지 말이다. 이에 대한 생각이 곳곳에 스며들었다. 1996년 마리오 보타가 SFMOMA를 세운 후 샌프란시스코는 눈에 띄게 변했다. 문화적 장소들이 생겼고, 거리에 활기가 더해졌고, 도시의 확장이 일어났다.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확장을 야기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프로젝트를 하는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는? 준비 과정에서 다양한 생각들을 구현해보기 위해 실제의 것과 완전히 똑같은 크기의 가짜 미술관을 지었는데, SFMOMA에서 그곳에 모작이 아닌 진짜 예술품을 걸었다. 이런 일은 흔치 않은 경우다. 관람객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술관의 자신감이 엿보였다.근사한 미술관은 건축물 자체가 전시의 일부로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하길 바랐나? 확장된 건물에서의 경험이 너무 유난스럽지도 않고 이해하기 쉬운 쪽이기를 바랐다. 한 번에 집중해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볼 것이 많은 미술관은 자칫 지루한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중간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었다. 6층을 제외하고는 모든 층에 테라스 공간이 있다. 거의 모든 전시 공간에, 유리창 밖으로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계단의 구조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다음 층으로 움직이는 동안 다음 작품들을 대면할 마음의 준비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전시 전경"/>SFMOMA에서 가장 아끼는 장소는? 개인적으로 사진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3층과 6층에 있는 포토그래피 갤러리들을 아낀다. 3층의 조각 정원도 좋아하는 공간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는 곳이다.피셔 컬렉션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무엇인가? 피셔 컬렉션은 질과 양적인 측면 모두 멋진 컬렉션이다. 좋아하는 작품은 많지만, 미술관에 갈 때마다 윌리엄 켄트리지, 게르하르트 리히터,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장에는 꼭 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