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의 그림을 만나는 일, 쥘 드 발랭쿠르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쥘 드 발랭쿠르(Jules de Balincourt), 은빛 헤어에 치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몸, 프랑스 이름을 갖고 있고 캘리포니아의 파도를 사랑하는 서퍼. 무엇보다 현재 가장 가파르게 작품 가격이 오르고 있는 페인터. | 쥘 드 발랭쿠르

쥘드 발랭쿠르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2007년 가을 뉴욕에서였다. 9월의 이른 저녁, 첼시에서 약속이 있어 걸어가던 중 전시 오프닝이 있는지 어떤 갤러리 입구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때마침 약속 시간 전에 여유가 있어서 갤러리에 잠시 들어가봤는데 그림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렸다.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 아무런 정보 없이 맞닥뜨린 그의 그림들이 주는 과감한 컬러 매칭과 기법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급히 둘러보고 저녁 약속 장소로 이동한 후 식사하는 내내 머릿속에 그 그림들이 아른거렸다.며칠 후 다시 그 갤러리(Zach Feuer Gallery)를 찾았다. 오프닝 때 보았던 아름다운 그림들은 전부 솔드 아웃이라고 했다. “찰스 사치가 그의 작품을 컬렉팅했어요. 든든한 보험을 든 셈이죠!” 몇 달이 흐른 후 페이스북의 추천 친구에 쥘 드 발랭쿠르라는 이름이 떴다. 핼러윈 파티에서 만나서 페이스북 친구가 된 친구를 통해 연이 닿은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친구 신청을 했고, 전시에서 그림을 보고 인터뷰도 읽고 팬이 되었다고 용기 내어 메시지를 보냈는데 기대하지 않게 친절한 답장이 왔다. 그 이후로 나는 2012년 홍콩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서 열린 개인전, 2014년 파리 타대오 호팍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2016년 런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에서의 열린 개인전을 챙겨 보면서 오프닝 파티에서 그와 인사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쥘 드 발랭쿠르라는 이름은 격조 있는 프랑스 귀족이나 18세기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는 브루클린 브시윅에 살고 있고 겨울이 되면 L.A.에 있는 작업실에서 서핑을 즐기며 작업을 하고 있다. 프랑스 출신인 것은 맞다. 파리에서 태어나 10살 되던 해 산타모니카 마운틴에 정착하기 전까지 발랭쿠르는 취리히나 이비자 등에 살면서 방랑하듯 생활했다고 한다. 하이틴 시절을 L.A.에서 보낸 그는 2000년에 뉴욕으로 건너와 대학원을 다니고 브루클린 부시윅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뉴욕 아티스트들의 아지트가 되었지만 당시 부시윅은 그렇지 않았다. 발랭쿠르는 작업을 이어나가는 틈틈이 레스토랑 배달원이나 아트 핸들러 등의 일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앞서 내가 그를 우연히 발견한 뉴욕의 아트 딜러 자크 포이어의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등을 시작으로 발랭쿠르는 승승장구했다. 여러 비엔날레에 참가하고 모리 아트 뮤지엄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가졌으며 아트바젤 등의 아트 마켓에서 가파른 상승세로 가격이 오르는 인기 작가가 된 것. 밝은 색채와 대담하고 경쾌한 선, 추상과 구상 사이에 있는 미묘한 뉘앙스, 현 시대상(특히 미국 사회와 문화)에 대한 풍자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점점 더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고 있다.지난 4월 빅토리아 미로에서 열린 개인전 오프닝 날 갤러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그의 인기를 대변한다. 나무로 덧댄 천장을 통해 햇살이 들이치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에 둘러싸여 사람들을 맞이하는 발랭쿠르의 모습은 극도로 생기 넘쳤다. 유럽과 뉴욕에서 시간을 보내다 15년 만에 돌아온 어린 시절의 고향 L.A., 도시와 자연의 양면을 모두 지닌 채 발전해 나가는 L.A.를 담아낸 작품들에는 발랭쿠르의 인장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일몰에 흠뻑 젖은 자연, 협곡, 고속도로, 수영장.... L.A.의 풍경은 특별한 에너지를 내뿜었다. 캘리포니아의 활기찬 풍경을 다양한 크기의 패널에 꿈같이 담아낸 그 투명하고 신중한 그림들은 여전히 나를 홀렸다. 10년 전 우연히 본 그의 작품에 반해서 시작된 나의 애정은 그를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3개월여 만에 얻어낸, 를 위해 그가 고른 자신의 작품들과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한다. 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의 작업에 대해 ‘현실적인 천진난만함(The Realistic Naivety)’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당신이 생각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은 항상 특정 카테고리로 분류하기를 원한다. 뉴욕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은 나를 ‘Faux Naïve(가짜 순수성)’ 또는 ‘Outsider Artist’로 분류하려고 했는데, 사실과 다르다. 나는 예술을 공부했고 내 작업에서 ‘Faux’를 찾아보긴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나를 둘러싼 주변의 세상을 해석하고 그것을 그릴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작품을 어떻게 경험하고 해석하는지 보는 것은 흥미롭다. 사람들은 자신의 예술사나 개인적 취향 안에서 내 그림을 해석하고 결론 짓는다. 그에 대해 나는 그저 관찰할 뿐 호오를 갖지 않는다.당신의 작품을 막 발견한 2007년 무렵 에서 당신이 케이드 스페이드의 남편 앤디 스페이드와 함께한 인터뷰가 기억에 남는다. 인터뷰 내용 중에서 당신이 잘 알려지지 젊은 아티스트였을 때 고객들의 집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일을 아르바이트로 했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2000년에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왔을 때 뉴욕의 아트 신은 뚫고 지나갈 수 없는 빽빽한 숲처럼 느껴졌다. 차가운 갤러리스트들, 완벽하게 큰 화이트 큐브의 갤러리들, 문 밖으로 줄 서 있는 VIP.... 아트 핸들러 일은 어떤 면에서는 그 숲으로 들어가는 뒷문으로서 현대미술의 비하인드 신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목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큰 트럭을 운전했고, 예술작품을 배송하고 설치했는데, 루이스 부르주아, 재스퍼 존스, 필립 존슨과 같이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명망이 드높은 컬렉터와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예술 세계의 면면이 내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내가 알기로 당신은 컬렉터이기도 하다. 어떤 작가의 작품들을 수집했고 그 작품들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지 듣고 싶다. 나의 컬렉션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고, 친구 아티스트들과 서로의 작품을 교환하거나 아직 가격이 비싸지 않았을 때 구입한 멋진 작은 그림들을 모아놓은 개인적인 수집품에 불과하다. 내 컬렉션 중에서 특별히 멋진 몇몇은 친구들과 교환하거나 선물로 받은 것들이다. 내가 소장한 작품들은 알렉스 카츠, 조시 스미스(Josh Smith), 휴마 브하바(Huma Bhabha), 크리스 요한슨(Chris Johanson), 로이 할로웰(Loie Hollowell), 자크 해리스(Zach Harris), 제이슨 폭스(Jason Fox), 마리아 칼란드라(Maria Calandra), 데니스 쿠퍼슈미트(Denise Kupferschmidt), 에디 마르티네스(Eddie Martinez) 등의 작품이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동체의 삶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는 브루클린에 스타 스페이스(Starr Space)라는 복합 커뮤니티 센터를 설립해 퍼포먼스, 영화 상영회, 콘서트, 심지어 요가 클래스까지 진행했었다. 매우 이상적인 지역 사회를 위한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 공간을 만들게 되었고 지금은 어떤 이유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는가? 스타 스페이스는 미리 계획했던 것은 아니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커뮤니티 센터였다. 브루클린의 부시윅 지역은 히스패닉 계열 주민이 대다수인 커뮤니티였는데 이곳에 있던 선구적인 소수의 예술가들이 모일 만한 모임이 전혀 없었다.그때 요가 스튜디오나 춤출 곳, 영화 볼 곳이 없어서 스타 스페이스를 가끔 이용하면서 이벤트를 만들거나, 공연, 자선모금을 위한 행사장소 등으로 사용했고, 부시윅 지역의 교회 모임을 위해 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뉴욕시의 관료와 규칙 때문에 이 커뮤니티 센터를 유지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져서 나중에는 그냥 내 작업실로 이용하게 되었고, 이제는 그 황금시대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일 이외의 계획이 있다면 언젠가는 예술가들의 유토피아였던 스타 스페이스와 같은 공간을 코스타리카에 만들어볼 생각이다.(빅토리아 미로에서 선보인, 정글 속을 걷고 있는 배낭여행자들을 그린 ‘캐니언 키즈’는 발랭쿠르에게 지상낙원과 같은 곳인 코스타리카를 방문한 경험에 기반해 그린 것으로 그는 훗날의 계획을 위해 그곳에 2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나는 어린 소년 시절부터 서핑을 즐겨왔고 지금도 여가로 서핑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코스타리카 지역 커뮤니티와 함께 작은 예술가들의 레지던시를 만들어 그곳에서 생활하며 서핑을 즐기는 것,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꿈이다.2015년에 에서 알렉스 카츠와 함께한 긴 인터뷰는 매우 흥미로웠다. 그와 찍은 사진은 서로를 존중하는 스승과 제자처럼 보였다. 알렉스 카츠가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인가? 알렉스 카츠는 확실히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고, 그 인터뷰는 내가 진심으로 즐겼던 스승과 제자 간의 논의였다.그런데 당신의 성(de Balincourt)은 유명하고 명성 있게 들린다. 조상이 귀족이었나? 성에 ‘de’가 들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상이 프랑스 귀족이었다. 조상의 일부는 남작, 백작이었고 어떤 이는 보르도 시장이었다고 한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귀족들의 성을 대단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재산과 명성으로 대를 잇는 관습은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나의 부모님은 자유주의자이고 히피였다. 아버지는 패션 포토그래퍼였고 예술과 패션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1960년대 파리지앵이었다. 운 좋게도 내가 자란 캘리포니아에서 나의 성은 아무런 권위도 명성도 없었다. 단지 학교의 축구 코치나 같이 서핑하는 친구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었을 뿐이다. 당신의 그림 속 팔레트는 종종 무질서하게 밝아 보인다. 이런 컬러는 어디에서 오는 건가? 환각을 일으키는 약에서?(웃음)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직감에 의해 진행된다. 심지어 나는 작업을 할 때 밑그림을 그리거나 계획을 세우는 일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의 이런 작업 방식을 독특하다고 하는데 내가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그저 나로부터 일어나는 어떤 현상이다. 나의 팔레트를 설명하라는 요구는 내 목소리를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너무 어렵다.그렇다면 어떤 세계관이 당신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나? 많은 것들이 영향을 주었을 테지만 미국으로 이민을 온 것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보수적인 레이건 시절에 공립학교에서 보낸 나의 청소년 시절 말이다. 그때엔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지했고 반공 영화들을 통해 프랑스인들은 전부 공산주의자라고 소외시켜버리는 황당한 시절이었다. 또한 L.A.에서 자란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경찰들의 탄압은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6살 때에 경찰이 내 머리에 총을 겨냥한 일이 있었는데 이 경험은 옳지 않은 권한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내가 소외된 문화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그 후로 몇 달간 L.A. 외곽의 집단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레인보 게더링과 그레이트풀 데드 콘서트장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유토피아이며 그 안에도 바깥과 마찬가지로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빠르게 현실로 돌아왔다. 일종의 아웃사이더 관찰자 같은 경험이었다.작업에 메인 테마가 있다면 무엇인가? 세상은 점점 더 작아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서 일어나는 내전, 석유전쟁, 독재로 인한 전 세계적인 긴장을 피할 길이 없다. 지구는 어떤 면에서는 에덴 같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히에로니무스 보시(Hieronymus Bosch)의 그림 속 같기도 하다. 이런 세상의 양면성에서 영향을 받는다. 세상이 무엇처럼 보이는지, 무엇처럼 보일 수 있는지, 앞으로 무엇처럼 보일 것인지. 내 흥미는 거기에 있다.예정된 전시 계획이나 프로젝트가 있는지 알고 싶다. 현재 도쿄의 모리 아트 뮤지엄에서 그룹 전시를 진행하고 있고, 뉴욕 시티 발레단과 함께 이번 겨울에 링컨 센터에서 초연할 스트라빈스키의 를 위한 배경을 설계하고 그렸다. 그리고 다가올 다양한 전시를 위해 새로운 작업을 진행 중이다.